불한당 명랑쾌활

소오~설 28

[회사의 부득이한 사정] 외전. 황송하신 갑의 사과

"인도장에 있는 자재들 빨리 치우세요." 국순 본사 소속 전성만 차장은 창고 사무실에 들어오자 마자 인사도 없이 최준영에게 잔뜩 인상을 쓰며 다짜고짜 그렇게 말했다. "네? 뭔 자재를요?" 뜬금 없는 말에 최준영은 되물었다. "인도장에 있는 자재들이요. 언제까지 저렇게 방치해 둘 건데요?" 창고 관리자가 자재들 파악도 안했냐는듯, 전성만 차장의 목소리에는 짜증이 듬뿍 배여있었다. 비로소 뭔 소리인지 이해한 최준영은 대답했다. "그 자재들은 저희가 관리하는 자재들이 아닌데요?" 인도장은 창고의 자재들을 생산 쪽에 넘길 때 제품 종류와 수량이 맞는지 상호 검수하는 공간이다. 생산 부서와 창고 부서의 중립적인 공간이지만, 창고 부서 입장에서는 생산 부서가 요청한 자재들을 인도장까지 갖다 놓고 검수 확인 하면 ..

소오~설 2020.09.21

[회사의 부득이한 사정] 5/5

- 최차장님, 신규 고객사와의 계약 체결이 연기되었습니다. - 회사 사정 상, 부득이 2월 1일부로 최자장님의 무급휴가를 실시하고자 합니다. - 무급휴가 기간은 특정할 수 없으나 3개월 정도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누군가 결정하고 지시했고, 누군가 지시대로 통보한다. 개인의 인생에게 중요한 결정을 한 무게와 죄책감은 두 사람 사이 어딘가를 부유하다 '회사의 부득이한 사정'이라는 곳에 흡수된다. 회사는 실체가 없지만 사람들이 실제한다고 믿기 때문에 실제한다. 실체가 없지만 믿기 때문에 존재한다는 점에서 종교와도 흡사하다. 광신도가 사람 목을 산채로 베면서도 '신의 뜻대로'를 외치며 자신의 행위를 자신이 믿는 종교를 위해 응당 해야 할 일이라고 변환하듯, 회사원은 개인이라면 하기 힘든 일을 '회사 방침상'이라..

소오~설 2020.05.25

[회사의 부득이한 사정] 4/5.

"최 차장님, 이럴 때일수록 근태는 더 확실하게 지키세요. 최차장님 근태가 안좋으면 현지인 직원들은 어쩌겠어요."이호병 상무의 말에 당혹스럽긴 했지만, 최준영은 알겠다고 대답하고 전화 통화를 끝냈다. 원래 최준영은 소유통운 입사 전엔 자카르타에서 1시간 반 거리인 찌까랑 지역에 살고 있었다. 소유통운 입사 후 임대 기간이 반 년도 더 남은 집을 포기하고 파견 근무지인 수방 지역으로 이사 갔다. 자카르타 반대 방향으로 1시간 반 더 간 시골이었다. 그리고 국순 수방과 소유통운 양사 간의 외주 계약이 끝나면서 소유통운 자카르타 오피스로 출퇴근하게 되었다.애초에 파견 공장 내 기숙사 거주가 근무 조건이었는데, 최준영이 외부에 살겠다고 한 탓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소유통운은 기숙사에 거주한다면 발생하지..

소오~설 2020.05.18

[회사의 부득이한 사정] 3/5

- 최센터장님, 국순이 수방 공장 창고를 자체 관리하기로 결정했습니다. - 올해 말까지 철수할 예정이오니 국순 측과 인수인계 일정을 잡아 보고하시기 바랍니다. - 회사 사정상, 부득이 갑작스럽게 결정된 점 양해 바랍니다. - 향후 근무처 관련하여 추후 통보 드리겠습니다. 최준영은 이메일을 읽고, 태연하려고 노력했다. 집이었다면 기쁨의 떰부링을 스물 세 바퀴 정도 돌았을 거 같은 기분이다. 파견 근무처가 사라져 일자리가 붕 뜨게 된 상황이지만 그저 기쁠 따름이었다. 국순 수방 공장의 창고 외주 관리를 했던 지난 5개월은 그정도로 끔찍했다. 아무 문제 없이 잘 돌아가고 있는 회사에서 멀쩡하게 일하던 직원이 그만 두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새로 오픈하는 회사가 아닌 이상, 한창 운영 중인 회사가 후임을 급구하..

소오~설 2020.05.11

[회사의 부득이한 사정] 2/5

"안녕하세요, 최준영입니다." 최준영이 국순 수방 공장 창고 한 켠의 사무실에서 소유통운 입사를 위한 면접을 본 건 5월 중순경의 일이었다. 그의 앞에는 소유통운 한국 본사의 고객지원팀 이현재 팀장과 팀원인 최훈 차장이 앉아 있었다. 태연한 척 했지만 최준영은 내심 당황하고 있었다. 채용 공고를 보고 알아 본 소유통운에 대한 정보나 그 밖의 상황을 근거로 했던 예측과는 전혀 다른 상황이었다. 소유통운은 원래 한국 굴지의 대기업 산하 계열사였다가 오너 일가의 복잡한 다툼 때문에 분리되어 사명을 바꾼, 나름 규모가 작지 않은 물류회사였다. 그런 회사에서 '인니 지사 센터장'을 채용한다고 공고했으니, 최준영이 인니 지역의 센터 역할을 하는 물류 통합 창고를 관리할 사람을 뽑는다고 생각할 만도 했다. 수방 지역..

소오~설 2020.05.04

[회사의 부득이한 사정] 1/5

- 팀장님, 저 너무 힘들어요. 사람 좀 뽑아 주세요. 파견으로 해결될 상황이 아니예요. 소유통운의 한국 본사 고객지원팀 소속인 최훈 차장은 이현재 팀장에게 카톡을 보냈다. 인니 수방 지역에 소재한 고객사 국순에 파견 나온지 한 달이 조금 넘은 시점의 일이었다. 해외에 진출한 한국의 봉제업체가 보통 그렇듯 수방 지역 역시 인건비가 저렴한 시골 깡촌에 있었다. 여가 생활은 커녕 인프라나 치안 수준이 낮은 지역이라, 한국인 관리자들은 공장 부지 내 한 켠의 기숙사에서 숙식을 하는 시스템이었다. 덕분에 파견 나온 최훈 차장 역시 꼼짝없이 감옥 아닌 감옥 생활을 해야 했다. 국순은 세계 최대의 생산 규모를 가진 가방 제조업체다. 한국이 아닌 베트남에 본부가 있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 베트남으로 처음 진출하여..

소오~설 2020.04.27

어느 법인장의 생존법

권위적이고, 강압적이며, 비민주적인, 한국의 무식한 중소기업의 전형을 보이는 본사와 달리, 해외 지사는 초창기만 해도 '나름 상식적인' 분위기였다. 한국인이래봐야 초기에는 법인장과 직원 달랑 2명 (나중에 1명 추가) 이었고, 현지 사정이 아무래도 한국과는 다르다 보니 그럴 수 밖에 없었다. 그 당시만 하더라도, 한국에서 오너가 오면 해외에서 고생하는 한국 직원들 위무한다는 개념이 있어서, 좋은 식당에 가서 회식하고 뒷풀이 하는 식이었다. 오너는 자신이 시찰 오는 날이면 공장의 현지 직원들에게 점심으로 특식을 제공하라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법인장이 바뀌었다. 본사에서 대표이사로 대리경영까지 했었기 때문에 나름 여유가 있던 전임 법인장과는 달리, 신임 법인장은 그 '사람 걱정해주는듯이 얘기하는데 결국은 ..

소오~설 2016.04.29

부장과 임원이 대리와 과장보다 많은 회사

관리부서만 5개에 50여명 규모인데, 차장은 없고, 과장이 2명, 대리가 단 1명인 어떤 회사가 있다. 그나마도 전에는 과장이 아예 없었고 대리만 3명이었는데, 그 중 2명이 승진한 거다. 차장은 아예 없고 부장 2명, 이사 4명이니, 이른바 간부급인 차장부터 사장까지를 합친 수가 중간 관리자급인 과장, 대리를 합친 수의 세 배에 가까운 묘한 구조의 회사다. (간부급 중 사장과 이사 1명 제외하고는 전부 공수부대(?) 출신이다. ㅋㅋㅋ) 이 회사는 6명의 계장과 (일반회사에 계장이라는 직급이 있다는 것도 놀랍다) 16명의 주임이, 실제로는 다른 회사로 따지면 대리나 과장급 업무를 수행하고 있다. 이 회사 최고관리자는 종종 두 가지를 자랑하곤 한다. "우리 회사는 평사원도 바이어 과장과 상대하고, 주임 정..

소오~설 2013.1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