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한당 명랑쾌활

소오~설

[회사의 부득이한 사정] 5/5

명랑쾌활 2020. 5. 25. 11:01

 

- 최차장님, 신규 고객사와의 계약 체결이 연기되었습니다.

- 회사 사정 상, 부득이 2월 1일부로 최자장님의 무급휴가를 실시하고자 합니다.

- 무급휴가 기간은 특정할 수 없으나 3개월 정도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누군가 결정하고 지시했고, 누군가 지시대로 통보한다. 개인의 인생에게 중요한 결정을 한 무게와 죄책감은 두 사람 사이 어딘가를 부유하다 '회사의 부득이한 사정'이라는 곳에 흡수된다. 회사는 실체가 없지만 사람들이 실제한다고 믿기 때문에 실제한다. 실체가 없지만 믿기 때문에 존재한다는 점에서 종교와도 흡사하다. 광신도가 사람 목을 산채로 베면서도 '신의 뜻대로'를 외치며 자신의 행위를 자신이 믿는 종교를 위해 응당 해야 할 일이라고 변환하듯, 회사원은 개인이라면 하기 힘든 일을 '회사 방침상'이라며 자신이 속한 조직을 위해 응당 해야 할 일이라고 합리화 한다.

 

이호병 상무가 스스로 하기 싫은 일을 종종 떠넘기는 백현민 부장으로부터 이메일이 왔다. 어느 정도 예상했던 일이라, 최준영은 그리 놀라지 않았다. 아니, 너무 예상대로 돌아가는 게 오히려 놀라웠다.

무급 휴가에 대해 잘 알겠다고 답신을 보내며 (싫다고 하면 어쩔 건가?), 내일도 연차 처리 해줄 것을 요청했다. 내일은 1월 말일, 이틀 전에 일방적으로 무급휴가를 통보하는 회사에 도리를 다하겠다고 굳이 하루 꾸역꾸역 출근해서 자리에 대기하고 있는 것도 병신짓이다.

연차 처리를 승인한다는 답신은 30분 만에 왔다. 미안해서는 절대 아닐 것이다. 하찮아서 그랬을 거다. '모레부터 나오지 마'라는 회사 통보에 '그러지 말고 내일부터 안나올게요'라고 대꾸하는 부하 직원이 고깝긴 하겠지만, 이 판국에 회사원의 바람직한 태도를 설파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다.

 

최준영은 고용 계약이 종료될지도 모른다가 아니라, 종료가 기정사실이라 간주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껏 그랬듯 이번 예상도 맞을 확률이 컸다.

갑작스런 퇴사에 대한 대비는 몇 년 전부터 늘 되어 있었다. 외국인이 자국에서 어떤 경제 활동이든 할 수 있는 권리를 일정 기간 부여하는 미국이나 한국의 취업 비자 체계와는 달리, 인니는 근무하는 회사에 한정하여 취업 비자를 발급하기 때문에 소속 회사와의 고용 계약이 종료되면 취업 비자도 취소된다. 고용 계약이 종료되면 체류 허가도 취소되어 꼼짝없이 귀국해야 하는 상황은 인니에 기반이 있고, 뭔가를 모색하려는 사람에겐 큰 리스크다. 고용 업체가 갑질의 도구로 휘두르는 족쇄이기도 했다. 최준영도 인니에서 계속 살 계획이었고, 회사는 상황에 따라 언제든지 개인 사정 봐주지 않을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몇 년 전부터 그 대비로 조그마한 사업을 준비해뒀는데, 결국 그 대비책을 쓸 때가 온 것이다.

물론 여행 계획은 변함없었다. 플로레스행 항공권을 미리 예약해 둔 것은 잘한 일이었다. 통보 받고나서야 여행 준비하느라 어영부영 했다면 기분 더러웠을 거고, 항공권도 비쌌을 거다. 훌쩍 떠났고, 아주 좋은 치유의 시간이었다. 1달 정도 예상했던 여행은 대비해뒀던 곳에서 미팅 요청이 오는 바람에 보름 정도로 끝났다.

 

최준영도 떼돈이라도 벌듯 희망찬 마음으로 사업을 준비하는 건 아니었다. 안해도 된다면 안하고 싶었다. 다른 회사로 이직할 수 있다면 가장 좋은 해결책이지만, 세상 일은 그렇게 딱딱 맞아 떨어지지 않는 법이다. 예금도 눈에 띄게 줄었다. 사업 자금도 가지러 갈 겸 한국에 다녀 와야 했다.

최준영은 고용 계약 해지 통보가 온다면 3월 말 쯤일 것이라고 예상했다. 지금까지의 패턴으로 보아 소유통운 측은 '계약 해지는 1개월 전 통보해야 한다'는 계약 조항을 지키려 할 것이다. 3개월이라고 한 무급휴가 기간이 끝나는 시점은 4월 말이니, 그로부터 1개월 전은 3월 말이다. 무급휴가가 끝난 시점에서야 계약 해지를 통보해서 다시 1개월을 끌어야 하는 리스크를 감수할 리 없었다.

그래서 최준영도 한국 왕복 일정을 3월 말로 맞췄다. 한국 갔다 올 때까지 회사에서 연락이 없다면 자신이 먼저 사직서를 제출할 생각이었다. 한국에서 사업 자금까지 이미 가져 왔다면 사업을 하기로 완전히 결정된 셈이다. 그 후로 뒤늦게 회사로부터 근무 발령을 받고, 그걸 거절해서 책잡히는 모양새를 만들고 싶지 않았다.

 

3월 중순 경, 백현민 부장에게서 메신저로 연락이 왔다. 국순 중부 자와 공장 창고에 추가 인원이 필요한데 그쪽에 파견 지원을 우선 갔다가 신규 고객사 계약이 성사되면 정식 발령을 하면 어떻겠냐는 의향을 묻는 내용이었다. 얼핏 신경 써주는 것 같지만, 최준영의 상황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제안이었다.

최준영은 엄연히 살고 있는 집이 있는 사람이다. 그 덕에 국순 수방 공장 파견 근무가 끝났다고 공장 기숙사에서 쫓겨 나오는 상황을 겪지 않았다. 자카르타 오피스로 출퇴근 하게 됐을 때 회사가 최준영의 숙소를 따로 신경 쓸 필요가 없었던 것도 최준영이 자기 집에서 살고 있었던 덕이다. 그런데, 중부 자와에 임시 발령을 가고, 신규 계약 성사에 따라 다시 다른 근무처로 정식 발령하겠다면, 자택 거주를 하는 최준영의 처지는 허공에 떠버린다. 더군다나 그 놈의 신규 계약이 언제 성사되는지, 아니 성사가 확실한지도 모르는 상황이다. 그에 대해 회사는 아무런 보장도 해결책도 없다.

외국에 사는 교민들이 집도 절도 없이 하숙집 같은 데서 살다가 누가 숙식제공 해준다고 하면 감격하며 어디든 가서 일하는 사람들인 줄 아는 모양이다. 아니면 한국처럼 회사가 발령 내면 처자식 놔두고 외국 어디든 나가 반년이고 몇년이고 일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던지. 그럴거면 애초에 현지 채용을 하지 말고, 본사 채용을 해서 파견을 했어야 한다. 뭐가 어찌됐든 회사가 최준영의 사정을 전혀 고려하고 있지 않다는 건 확실했다.

최준영은 '숙고해보겠습니다'라고만 짧게 답신을 보냈다. 백현민 부장은 '네, 잘 생각해보시고 답신 주세요'라는 답신을 다시 보내왔다. 최준영은 어쩐지 자신이 보낸 짧은 답 뒤편의 감정을 백현민 부장도 '인간적으로' 느끼고 있을 거라는 느낌이 들었다. 인간적 감정 따위 회사 업무에 그다지 중요한 건 아니지만.

최준영은 예정대로 한국에 갔다. 임시 발령 건에 관해 백현민 부장에게 답신은 하지 않았다.

 

인니로 돌아가기 전날, 백현민 부장에게서 '답신이 없어서 국순 중부 자와 공장 파견 제안은 취소했고, 다른 대안으로 진행하겠다.'는 답신을 받았다. 최준영은 알겠다고 답신을 보냈다. 인니에서 하게 될 사업에 필요한 자금은 며칠 전에 국제 송금을 한 상황이었다.

인니에 돌아 온 다음 날, 최준영은 사직서를 작성했다. 사직은 하지만 인니 체류에 필요한 회사 스폰서는 당분간 유지를 해야 했기 때문에, 이병호 상무나 백현민 부장이 기분 나쁘지 않도록 신경 쓰느라 하루 종일 꼬박 걸렸다. 회사의 일원으로서의 인간은 자신의 개같은 짓은 '회사의 부득이한 사정'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했을 뿐 개인 감정은 없다고 쿨한 태도를 보이다가도, 상대방의 태도가 좆같다고 느껴지면 개인적인 원한을 품고 '해줘도 상관 없을 것도 가급적이면 안해주는 쪽으로' 보복을 하는 습성이 있다. 괜히 신경 거슬릴 필요는 없었다.

하루 종일 쓰고 고치고 다듬은 사직서를 다음날 아침 다시 한 번 살핀 후, 최준영은 이메일을 보내려고 했다. 하지만, 이병호 상무와 백현민 부장의 이메일 주소가 회사에서 받은 이메일 계정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오랜만에 회사 이메일 계정에 들어간 최준영은 백현민 부장이 발송한 <고용 계약 종료>라는 제목의 메일을 발견했다. 법적 근거를 남기기 위해 굳이 공식 메일로 보냈을 것이다. 메일 발송일은 백현민 부장이 최준영에게 국순 중부 자와 공장 파견 제안을 취소한다는 메신저를 보낸 다음 날이었다. 3월의 마지막 근무일인 금요일이기도 했다.

최준영의 예상대로였다.

 

최준영이 하루 종일 쓴 사직서는 필요가 없어졌다. 최준영은 알겠다는 답신을 쓰기 전, 비공식적인 사안은 메신저로 주고 받는다는 회사의 방침에 따라 백현민 부장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회사 스폰서 유지를 부탁하는 내용이었다. 백현민 부장은 '이호병 상무에게 얘기해 보겠다'며, 고용 계약 종료에 대한 답신을 우선 회사 메일로 보내 달라고 했다. 백현민 부장 입장에서는 최준영의 공식 답변 근거를 확보하는 것이 더 중요할터다. 최준영은 회사 메일로 답신을 보냈다.

이틀 후, 최준영은 소유통운 자카르타 오피스에서 근무하고 있는 한국인 직원으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이호병 상무가 스폰서 유지에 대해 법적으로 문제의 소지가 없는지 확인하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그 한국인 직원은 수출입 실무만 봤기 때문에 노동법이나 외국인 체류 규정에 대해서는 잘 몰랐다. 그 쪽 문제는 최준영의 전문 분야였고, 최준영과 사이도 좋은 편이었기 때문에 별 뜻 없이 문의를 해온 모양이었다.

최준영으로서는 우스운 일이었다. 스폰서 유지나 무급 휴가나 이름만 다를 뿐, '회사 소속은 남겨 놓고 월급은 안주는 조치'라는 본질은 똑같다. 회사 필요대로 무급 휴가는 이미 진행해놓고서, 직원이 회사에 똑같은 걸 요청하니 몸사리는 꼴이다. 좋게 넘어가자고 회사에 선처를 요청했다지만, 사실은 자신이 오히려 회사를 봐준 거였다는 사실을 모르는 모양이다.

법률 규정 철두철미하신 소유통운의 이호병 상무는 고용 계약서를 믿고 있는 모양인데,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인니 노동법은 원칙적으로 직원이 심각한 잘못을 저지르지 않은 이상, 회사가 일방적으로 직원을 해고하는 것을 금지한다. 아무리 계약서에 명시해 봤자, 적법하지 않으면 소용 없다. 당사자가 동의하고 서명했어도 신체 포기 각서가 합법이 될 수 없는 것과 같다. 즉, 고용 계약서에 1개월 전에 고용 계약 해지를 통보할 수 있다라고 명시해봤자, 그 알량한 '회사의 부득이한 사정' 핑계로 직원을 맘대로 해고할 수 없다는 뜻이다. 만약 최준영이 노동청에 일방적인 해고 사유로 신고한다면, 소유통운은 무조건 나머지 근로 계약 기간에 해당하는 급여를 지급해야 한다. 재판 걸어봐야 100% 패소할 것이다. 그런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최준영은 그냥 좋게 좋게 넘어가려고 하는 거였다.

최준영은 한국인 직원에게 회사에 아무 문제 없을 거라고 했다. 부하 직원이라는 입장 상 이호병 상무에게 그냥 아무 문제 없다고만 보고하기엔 난처할테니, 이미 진행했던 무급 휴가나 스폰서 유지나 본질적으로 동일한 조치라는 논리로 보고하면 될 거라고 조언했다. 그리고, 인니 노동법 상 일방적인 근로 계약 종료는 불법이라는 사실을 지금 이호병 상무에게 굳이 보고할 필요는 없겠지만, 만약 이호병 상무가 스폰서 유지를 안해주겠다고 결정한다면 보고가 필요한 상황이 벌어지게 될 거라고 넌지시 귀띔해줬다.

이후, 이호병 상무이나 백현민 부장으로부터 스폰서 유지를 해주겠다는 답신은 오지 않았다. 하지만, 스폰서를 끊겠다는 연락도 오지 않았다. 뭘 해주겠다고 했다가 혹시 책임질지도 모르는 상황을 끝까지 꼼꼼하게 회피해야 할터다.

 

이후 최준영은 새로 취업 비자를 만들었고, 소유통운의 스폰서를 종료했다. 7개월 간, 소유통운과 관련하여 좋은 기억은 하나도 없었다. 그렇다고 소유통운이 최준영에게 원한을 품고 의도적으로 그런 건 아니었다. 그저 회사의 사정이 그랬을 뿐이다. 하지만, 회사는 실체가 없기에 생각도 없다. 부득이한 사정이란 것도 자각할 수 없다. 그런 게 있다면, 그 건 그 회사에 몸을 담은 직원들의 사정일 것이다.

최준영과 소유통운의 악연은 그렇게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