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한당 명랑쾌활

소오~설

[회사의 부득이한 사정] 1/5

명랑쾌활 2020. 4. 27. 09:07

 

- 팀장님, 저 너무 힘들어요. 사람 좀 뽑아 주세요. 파견으로 해결될 상황이 아니예요.

소유통운의 한국 본사 고객지원팀 소속인 최훈 차장은 이현재 팀장에게 카톡을 보냈다. 인니 수방 지역에 소재한 고객사 국순에 파견 나온지 한 달이 조금 넘은 시점의 일이었다.

 

해외에 진출한 한국의 봉제업체가 보통 그렇듯 수방 지역 역시 인건비가 저렴한 시골 깡촌에 있었다. 여가 생활은 커녕 인프라나 치안 수준이 낮은 지역이라, 한국인 관리자들은 공장 부지 내 한 켠의 기숙사에서 숙식을 하는 시스템이었다. 덕분에 파견 나온 최훈 차장 역시 꼼짝없이 감옥 아닌 감옥 생활을 해야 했다.

 

국순은 세계 최대의 생산 규모를 가진 가방 제조업체다. 한국이 아닌 베트남에 본부가 있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 베트남으로 처음 진출하여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베트남 곳곳에 몇 천 명 규모가 큰 공장을 세운 것을 넘어 이제 인도네시아까지 진출했다.

물류 업체인 소유통운에게 국순은 주요 고객사 중 하나다. 국순과 맺은 외주 계약의 주업무는 원부자재 및 완성품 물류 관리 대행이지만, 원부자재와 생산을 분리해서 관리하려는 국풍의 관리 방침에 따라 창고 관리 역시 외주로 위임 받아 관리하고 있었다.

창고 관리 대행은 이익 규모가 의미 없을 정도로 미미한데 리스크만 큰 분야다. 생산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게 되면 원부자재 공급이 원활하지 않은 탓에 생산 차질이 생겼다며 창고 관리 측에 책임을 돌리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같은 회사 소속이라면 모를까, 하청에게 떠넘기는 건 사정 봐줄 필요도 없다. 을인 하청은 근거 제시하며 반박하기도 어려운 입장이니 뒷탈도 거의 없다.

소유통운 입장에서도 떠맡고 싶지 않은 외주였지만, 주업인 물류업의 큰 고객사인 국순의 요청을 거절할 수 없어 서비스 차원에서 운영하는 일이었다.

그러다 작년 중순 경, 국순은 연말까지 수방 공장 창고 관리 외주 계약을 종료한다는 통보를 했고, 소유통운은 흔쾌히(?) 동의했다. 수방 공장은 주민들이 드세기로 유명한 지역에 위치하여, 그전부터 원부자재가 없어지고 생산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는 등 이런저런 사고가 자주 터졌던 곳이었다. 동남아시아 전역에 10여 곳의 생산 공장을 두고, 한국인 관리자들을 정기적으로 순환 배치 근무를 시키는 국순 내에서도 구제불능의 기피 지역으로 유명했다. 소유통운에게도 골치 아픈 곳이라 국순의 계약 해지 요청은 환영할 일이었다.

 

물론 소유통운 소속으로 국순 수방 공장 창고에 3년 째 파견 근무를 하고 있던 구상훈 창고장에게는 그다지 환영할만한 상황은 아니었다. 하지만, 회사 앞에서 개인의 안타까운 상황 따위는 작은 일에 불과하다. 비즈니스의 세계에서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일일 뿐이다. 소유통운은 고객사와의 외주 계약 종료라는 '회사의 부득이한 사정'에 따라, 고용 계약을 연말 부로 종료한다고 구상훈 창고장에게 통보했고, 그는 받아 들였다. 40대 후반의 나이에 갑작스럽게 일자리를 잃는다는 건 뼈 아픈 일이지만, 안받아들이면 어쩔 건가.

새해가 되어 구상훈 창고장은 회사를 그만 두었다. 그리고, 국순 수방 공장 창고는 중간에 붕 뜬 채로 방치됐다. 마침 국순의 신임 공장장이 부임한지 얼마 안되는 상황까지 겹쳐 창고는 아수라장이 되어갔다. 상황이 점점 심각해지자, 국순은 소유통운에 비공식적으로 컴플레인을 걸었다. 아무리 계약을 아직 연장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이런 식으로 팽개치고 가면 어쩌냐는 억지 논리였다. 자기들이 먼저 그랬으니 겸연쩍을 만도 하지만, 원래 회사 대 회사 관계라는 게 그렇다. 컴플레인을 거는 직원은 회사의 손발일 뿐이다. 손발은 염치나 수치심을 느끼지 않는다. 그런 게 혹시 있더라도, 그 건 회사의 몫이다. 혹시 어느 일개 직원이 양심이 찔린다 하더라도, '회사의 부득이한 사정'은 만능의 키워드다. 손발은 양심이 없어야 한다.

소유통운은 컴플레인을 받아 들였다. 이 말도 안되는 컴플레인을 받아 들이지 않는다면, 베트남 곳곳에 있는 국순 공장들의 물류 전담 계약이 내년에도 연장될지 알 수 없는 일이다. 물론 그런 협박을 직접적으로 언급한 적은 없지만, 을 입장은 말하지 않아도 알아야 한다. 소유통운은 국순 수방 공장 창고 문제 해결을 위해 고객지원팀 직원을 파견 보내기로 했고, 해외 근무 경험이 많은 최훈 차장이 낙점 되었다. 외주 계약 종료로 방치된지 3개월 여 후인 4월, 최훈 차장은 인니 수방에 왔다.

 

최훈 차장이 직접 확인한 창고 상황은 심각했다. 단순히 3개월 방치된 문제가 아니었다. 재작년부터 공장 가능 생산량의 세 배에 달하는 주문을 때려 넣고 억지로 돌린 여파까지 누적된 상황이었다. 제품 생산이야 직원을 더 뽑아 주야 2교대든 3교대든 돌리면 가능할 수도 있겠지만, 창고는 공간도 늘려야 한다. 하지만, 국순은 창고 공간 문제도 해결해주지 않았을 뿐더러, 소유통운 구상훈 창고장의 창고 직원 증원 요청까지도 묵살했다. 이런 상황에서 통상의 세 배에 가까운 자재가 밀어 닥쳤으니, 창고의 시스템이 제대로 관리될 리 없다. 자재가 제대로 넘어오지 않았을테니, 각 생산 부서 직원들이 창고에 들이닥쳐 당장 자기들 생산에 필요한 자재들을 직접 빼갔을 게 뻔하다. 그 정도만으로도 충분히 엉망이었을 창고 상태에 3개월 방치까지 겹친 상황이었다.

상황 해결이 암담했다. 최훈 차장이 무슨 슈퍼맨도 아니고 결국은 창고 직원들이 해야 할 일인데, 그들의 회사에 대한 불신은 일반적인 수준을 넘어 독까지 잔뜩 오른 상태였다. 국순 소속임에도 외부인 취급을 받아 온데다, 생산 차질이 발생하면 모두 창고 책임으로 몰렸기 때문에 진즉부터 불신과 냉소의 기조가 있었는데, 최근 생산 부서에서 정상적인 절차 없이 가져 가는 바람에 없어진 자재를 두고 창고 직원들을 도둑 취급하기까지 하면서 폭발한 상황이었다. 의사 소통을 할 수 있더라도 마음을 돌리기 어려울텐데, 최훈 차장은 인니어를 한 마디도 할 수 없었다.

국순 한국인 직원들의 비협조도 해결에 큰 걸림돌이 되었다. 국순 한국인 직원들도 뚝 떨어진 공장 생산성 때문에 본사에게 박살나고 있는 상황이었다. 지난 1년여 간 강행했던 주야 교대와 연장 근무로 인해 생산 직원들이 갈려나가 부서가 망가진 여파였다. 그 사실을 그대로 보고하고 생산 부서 재건에 필요한 시간을 달라고 하는 게 상식적인 조치겠지만, 멍청한 짓이기도 하다. 일감 폭탄을 수방 공장에 던진 어느 임원분과 1년여 간 생산을 쥐어짜 그 폭탄을 해결해낸 공훈을 새워 영전한 임원분 심복의 뒤통수를 때리는 짓임과 동시에 자신이 무능하다고 고백하는 짓이기 때문이다. 생산성 저조에 대해 다른 탓을 해야 하는데, 하청이 외주 관리를 하고 있는 창고야 말로 적절한 희생양이었다. 싸질러놓은 똥 뒷처리를 맡게 된 국순 한국인 직원들 입장에선 창고 문제가 해결되면 오히려 곤란해질 상황이었다.

 

사방에 인가 하나 없이 논밭으로 둘러쌓여 마치 섬처럼 고립된 공장에서 아군은 하나도 없는 사면초가 상황이었다. 퇴근을 해도 공장 내 기숙사에서 적대적인 고객사 직원들과 부대끼며 지내야 했다. 최훈 차장에게는 지옥의 나날들이었다. 어지간하면 죽는 소리 안하는 최훈 차장이 파견 근무 1개월 만에 이현재 팀장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카톡을 보내게 된 이유였다.

 

- 팀장님, 저 너무 힘들어요. 사람 좀 뽑아 주세요. 파견으로 해결될 일이 아니예요.

- 알았다. 일단 정식 메일 올려라. 다음 주에 내가 거기 갈게.

 

소유통운은 창고를 관리할 한국인을 현지채용키로 결정하고, 웹사이트에 인력 공고를 냈다. 국순과 소유통운의 수방 공장 창고 외주 계약은 작년 말 부로 종료되었다. 연장 계약서에 서명이 되지 않았으니, 공식적으로는 계약이 되지 않은 상태다. 이런 상황에 직원을 채용한다면 나중에 어찌 될지 모를 일이다. 하지만 '회사의 부득이한 여건' 때문에 사람이 필요하다면, 나중에 어떻게 되든 뽑고 보게 마련이다.

나중 일은 나중 일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