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한당 명랑쾌활

소오~설

[회사의 부득이한 사정] 4/5.

명랑쾌활 2020. 5. 18. 12:38

<사진 출처 : https://en.netralnews.com/>


"최 차장님, 이럴 때일수록 근태는 더 확실하게 지키세요. 최차장님 근태가 안좋으면 현지인 직원들은 어쩌겠어요."

이호병 상무의 말에 당혹스럽긴 했지만, 최준영은 알겠다고 대답하고 전화 통화를 끝냈다.



원래 최준영은 소유통운 입사 전엔 자카르타에서 1시간 반 거리인 찌까랑 지역에 살고 있었다. 소유통운 입사 후 임대 기간이 반 년도 더 남은 집을 포기하고 파견 근무지인 수방 지역으로 이사 갔다. 자카르타 반대 방향으로 1시간 반 더 간 시골이었다. 그리고 국순 수방과 소유통운 양사 간의 외주 계약이 끝나면서 소유통운 자카르타 오피스로 출퇴근하게 되었다.

애초에 파견 공장 내 기숙사 거주가 근무 조건이었는데, 최준영이 외부에 살겠다고 한 탓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소유통운은 기숙사에 거주한다면 발생하지 않을 비용이라는 이유로 주거와 출퇴근 차량 지원을 일체 제공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제 외주 계약이 끝나면서 사측이 제공했어야 할 기숙사는 사라졌고 출퇴근 수단이 필요하게 됐지만, 회사가 그에 대해 전혀 고려한 바도 없었다.

물론 최준영은 그런 모순을 따질 생각 없었다. 원래 회사는 직원에게 들어가는 비용에는 갖은 규정을 들이대며 10원 단위까지 꼼꼼하게 따지지만, 직원이 회사 업무 때문에 입는 손해에는 불가피한 상황과 의리를 갖다 붙이며 너그럽게 넘어가는 습성이 있으니까. 한국에 본사를 둔 한국 회사는 그런 면이 더 심했다. 회사측의 유불리에 따라 한국 기준을 근거로 삼기도 하고, 현지 기준을 갖다 붙이기도 한다. 이번 경우도 회사 지시에 따라 미국이든 베트남이든 말레이시아든, 2개월이든 반 년이든 파견 나갔다가, 끝나면 다시 한국으로 복귀하여 출근하는 본사 직원 기준을 갖다 붙여 자기 합리화를 끝났을 게 뻔하다. 최준영은 출장이 아니지만, 그런 거 일일이 배려해줘서야 한국 회사 간부 자리 못버틴다. 쓸데 없이 자기 양심 낭비하지 말고, '회사의 부득이한 여건'이라는 마법의 키워드면 끝날 일이다.


월급 챙겨 주려고 대기 발령 조치를 한 건 절대 아닐 거다. 없는 자리 만들어서 직원 챙겨주는 회사 따위는 원래 없다. 그동안 겪어 온 바, 소유통운은 더더욱 그럴 회사가 아니다. 고객사 문제 해결할 목적으로 뽑은 직원일 뿐이니 맘같아선 뎅강 자르고 싶겠지만, 그에 따른 부작용도 만만치 않을테니 유보했을 터였다.

최훈 차장에게 따로 전해 들은 바로는, 다른 고객사와 조율 중인 창고 위탁 관리 계약이 2월 초 쯤 성사될 예정인데, 그 곳으로 발령되기 전까지 대기하는 거라고 했다. 정말 그렇게 된다면 또 다시 이사를 해야 하게 되지만, 최준영은 해당 지역의 집을 알아보는 수고를 굳이 하지 않았다. 사장이 같은 자회사끼리면 모를까, 다른 회사 간에 맺으려는 계약이 시간표대로 착착 진행될리 만무했다. 2월 초에 성사되기는 커녕, 계약 자체가 무기한 연기되거나 무산될 수도 있다. 차라리, 계약 무산에 대한 대비를 하는 편이 현실적이었다.

자카르타 오피스로 출근해봐야 최준영에게는 할 업무가 없었다. 무능해서가 아니다. 최준영의 이전 경력이 법인 총괄이었든 대통령이었든 소유통운에는 창고 관리자 아저씨로 입사했고, 자카르타 오피스에는 창고가 없었다. 출근도 안하는데 월급 줄 수는 없는 거 아니겠냐며, 최준영은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출퇴근 며칠 해보기 전까지는.


뿌르와까르따에 있는 최준영의 집에서 자카르타 오피스까지는 안막힌다면 2시간 정도 걸리지만, 그런 건 심야에나 가능한 일이었다. 통상적인 교통 상황에 2시간 반에서 3시간, 정체가 심해지면 4시간 넘게 걸리기도 했다.

출근은 좀 일찍 할 수도 있지만, 퇴근 시간은 모든 회사가 비슷하니 정체를 피할 방법이 없었다. 오후 5시 퇴근 후 즉시 출발해도 집에 도착하면 보통 밤 9시가 넘었다. 바로 퇴근해서 밤 9시 넘어 저녁을 먹거나, 밖에서 저녁을 먹고 밤 10시를 훌쩍 넘어 귀가하거나 둘 중 하나라는 뜻이다. 평일 집에 있을 수 있는 시간이 8시간이 안된다는 점도 문제였다. 그 시간 동안 먹고 자고 싸고 씻고 하려면, 그 외 활동은 아예 생각도 못한다. 그마저도 대중 교통 수단이 없어 자가 운전을 해야 하는데, 졸음 운전 위험 때문에 자는 시간을 줄일 수도 없다.

출근한지 며칠 만에, 출퇴근길 교통 정체로 왕복 9시간 넘게 걸리는 상황을 겪자 최준영은 심각성을 깨달았다. 그는 하루 8시간의 업무 시간과 별개로 6~9시간의 운전 업무를 하는 셈이었다.


소유통운의 인니 지역 본부라고 할 수 있는 자카르타 오피스에는 이 문제를 해결해 줄 사람이 없었다. 법인을 열었던 당시 있었던 한국인 법인장이 몇 개월 만에 사직을 한 이후로 법인장 자리가 몇 년 째 공석이었기 때문이다. 졸지에 법인장 '무기한 임시 대행'을 맡게 된 슬라맛이라는 이름의 현지인은 총무가 아니라, 회계 담당 이사였다.

소유통운 본사의 임원들은 비록 임시라 해도 법인장 대행을 맡기면 감지덕지 황송해 할 줄 알았던 모양이다. 인니의 보편적인 직업 의식이 한국과 다를 거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슬라맛은 정식으로 발령을 받은 바도 없고, 상응하는 임금 보상도 없이 떠맡게 된 임시 법인장 자리가 달갑지 않았다. 열심히 하면 정식 법인장이 될 거라는 기대를 할 정도로 바보도 아니었다.

슬라맛은 업무에 대해 도와주기는 하지만 책임은 지지 않겠다는 입장을 철저히 견지하고 있었다. 자신은 아무런 결정권이 없으니, '한국인 끼리 교신해서' 본사 정식 지시가 내려오면 해주겠다는 태도였다. 최준영이 국순 수방 공장에서 파견 근무를 하는 동안 현지 지원을 거의 받지 못했던 것도 그런 이유였다. 그런 임시 법인장 대행에게 출퇴근 문제를 상의해봐야 아무 소용 없을 건 뻔했다.


최준영은 이호병 상무에게 출퇴근 문제에 관해 이메일을 보냈다. 인니의 일개 창고 관리자지만, 조직도 상 그 위의 한국인 상사는 무려 아시아 총괄 담당인 이호병 상무 외에는 없었다. 이호병 상무가 직속 상관이라는 내용을 공식적으로 전달 받은 적 없었고, 베트남에 오피스가 있는 그를 본 건 반 년 근무하는 내내 딱 두 번이지만, 얘기할 사람은 그 밖에 없었다. 그는 소유통운을 대표하여 국순과의 창고 외주 재계약과 클레임 문제 협상을 주도한 사람이기도 하다.

사실 출퇴근 문제 관련하여, 자카르타 오피스로 출근 하라는 지시를 받았을 당시 이미 이호병 상무에게 메일을 보낸 적이 있었다. 하지만, 다른 메일에는 답신이 왔어도, 유독 출퇴근 문제 관련 문의 메일에 대해서는 '아예 그런 메일을 받은 일조차 없는 것처럼' 답신이 없었다. 최준영도 이호병 상무의 무반응을 이해했다. 회사는 '알았다'는 답신 하나로 문제의 모든 책임을 뒤집어 쓸 수도 있는 살벌한 판이다. 그런 판에서 살아 남아 책임자 위치에 오른 회사원이라면, 애매한 문제에 대해 '뭉개기'로 대응하는 요령 정도는 기본 중의 기본이다. 최준영의 자카르타 출퇴근 문제가 바로 그 애매한 문제였다. 대기 발령하는 직원에게 차량이나 숙소를 지원하기도 그렇고, 그렇다고 출근하지 말라고 할 수도 없었다.

최준영도 왜 답신이 없냐고 메일을 다시 보내는 촌스런 짓은 하지 않았다. 메일을 통해 상관에게 전달한 걸로 충분하다. 무반응은 승인을 하지 않았다는 뜻이지만, 동시에 반대하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사정이 이러니 출퇴근 시간은 엄수하지 않아도 되겠지요?'라고 묻는 것도 웃기는 일이고, '그렇게 하세요'라는 답이 온다면 뉴스에 나올 일이다. 최준영은 이호병 상무의 무응답을 적당히 알아서 하라는 묵인으로 받아 들였다.

상황이 예상보다 심각해서 보낸 두번째 메일 역시 이호병 상무로부터의 답신은 없었다. 최준영은 이만하면 충분히 양해를 받은 거라 판단하고, 한 시간 쯤 늦게 출근하고 한 시간 쯤 일직 퇴근하기 시작했다. 어차피 회사에서 하는 업무라고는 책상 지키고 앉아 있는 게 전부였다. 그래도 여전히 서울에서 대전 출퇴근 하는 정도의 시간을 매일 길에서 보내야 했지만, 그래도 출퇴근 러시아워는 피하기 때문에 왕복 8시간 이상 걸리는 대참사는 피할 수 있었다. 그렇게 지낸지 1주일 쯤 후 어느 날, 이호병 상무에게서 근태 문제에 관해 한 소리 듣게 된 것이다.



최준영의 당혹감은 출퇴근 시간을 지키지 않은 사실을 이호병 상무에게 들켰기 때문이 아니었다. 애초에 최준영은 이호병 상무가 다 알거라고 생각했다. 회사 총괄을 해봤기 때문에, 이런 종류의 일들을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상부로 보고하는 사람은 어느 회사든 반드시 있게 마련이라는 조직의 생리 정도는 당연히 알고 있었다. 회사가 모를 것이라고 생각하고 하는 행동만큼 멍청한 짓은 없다.

당혹스러운 건 이호병 상무가 자신에게 근태 문제를 직접적으로 언급했다는 점이다. 출퇴근 문제에 대한 최준영의 애로 사항을 고려하지 않겠다는 뜻인데, 그럴 거라면 애초 최준영이 보낸 메일을 뭉개지 말고 제대로 답신을 줬어야 했다. '사정은 알겠지만 상황이 이러하니 당분간 회사의 방침에 따르시오.'라고 했으면 될 일이다. 그런 답신마저도 보내지 않았다는 건, 회사의 방침에 따르다 발생할 수도 있는 불상사 - 가령 교통사고라던가 - 조차도 책임질 빌미를 만들고 싶지 않다는 의미가 된다. 이호병 상무의 뭉개기를 한 뜻은 직설적으로 표현하자면, '네 사정은 알 바 아니고, 책임도 지지 않겠다. 하지만 넌 그렇게 해야 한다.'였던 것이다.

최준영은 이건 좀 아니라고 생각했다. 애초에 자신은 국순 수방 공장에서 근무하기로 하고 입사한 사람이다. 국순과의 근로 계약이 끝난 게 최준영 탓도 아니다. 최준영 탓이었으면 진작에 책임을 물어 잘랐을 것이다. 최준영은 피해자 입장임에도 불구하고 자카르타 출퇴근 지시에 따른 피해를 개인적으로 감수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데, 약간의 리스크마저도 지지 않겠다는 상사의 태도는 도가 지나쳤다. 마음의 준비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준영은 이호병 상무의 전화 이후로도 출퇴근 시간을 여전히 준수하지 않았다. 그의 됨됨이로 보아 소처럼 따른다고 해서 없는 자리 만들어 줄 것도 아니었다. 새 고객사 계약이 성사되면 발령되는 거고, 아니면 잘리는 거다. 물론 새 고객사 계약이 성사됐는데 자신을 자르고 다른 사람을 뽑을 가능성이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이호병 상무가 그렇게 부지런할 것 같지도 않았다. 그가 최준영의 입장을 무시하는 건 미워서가 아니라 하찮기 때문이다. 사고라도 쳤다면 근태 나쁜 사람이 사고 쳤다며 옳다구나 뎅강 자르겠지만, 근태 문제만 꼬투리 잡아 크게 부각시켜 자르기에는 사안이 너무 잘았다.

혹여 이호병 상무가 부지런을 떠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유통운 입사로 인해 최준영이 겪어온 일들을 인연으로 따진다면, 소유통운은 악연 중의 악연이었다. 끝끝내 버텨낸다 하더라도 그뿐이고, 장래성도 전혀 보이지 않았다. 살다 보면 가끔 불운이 닥치기도 하기 마련이고, 그럴 땐 피함으로써 더 큰 나락으로 말려들어가지 않는 것도 방법 중 하나다.


최준영은 소유통운에서 있었던 일들을 글로 끄적이며 소유통운에서의 근무 시간을 때우는 한편, 인터넷으로 플로레스 정보를 검색했다. 10년 전부터 가고 싶었지만 제법 먼 곳이라 이래저래 줄곳 미루고 밀려 가지 못했던 곳이었는데, 이 시국에 문득 그곳이 떠올랐다. 소유통운이 다른 회사와 진행하고 있다는 계약의 성사가 2월 쯤으로 예정되어 있다고 했다. 정말 성사될 수도 있겠지만, 날짜 박아 놓은 게 아닌 이상 회사 간 계약은 일정이 밀릴 확률이 훨씬 높다. 그리고, 한 달이든 두달이든 밀리면 밀리는대로 월급을 계속 공으로 주는 회사는 없다. 아무래도 아주 긴 휴가를 받게 될 것 같았다.

최준영은 2월 초 무렵으로 가장 저렴한 항공편을 예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