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한당 명랑쾌활

조직 10

악의 평범성 - 조직의 일원으로서 해야 할 일을 했다.

'명령에 복종한다'는 군인의 여러 덕목 중 하나다. 대부분의 군 훈련은 병사를 명령에 복종하도록 만들 목적으로 한다. 상관의 명령에 묻지도 따지지 않고 따르도록 반복을 거듭해서 신체와 정신에 새기는 것이다. 그래야 포탄과 총알이 빗발치는 전장에서 돌격 앞으로가 가능해진다. 그렇게 해서 일부는 죽더라도 부대의 목표를 달성한다. 심지어 부대 전체를 희생하여 다른 부대들의 목표를 달성하도록 하기도 한다. 명령을 하는 부대장도, 따르는 부대원도 누군가는 죽을 수 있다는 걸 알면서 지시하고 따르는 것이다. 서로를 독립적 개체로 여긴다면 해서는 안되는 명령이고, 따르길 거부해야 할 명령이다. 집단이 목표를 달성해봐야 개인 입장에서는 죽으면 끝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명령에 복종한다는 것은 부대원 개개인이 자신을 부..

단상 2021.01.11

[회사의 부득이한 사정] 5/5

- 최차장님, 신규 고객사와의 계약 체결이 연기되었습니다. - 회사 사정 상, 부득이 2월 1일부로 최자장님의 무급휴가를 실시하고자 합니다. - 무급휴가 기간은 특정할 수 없으나 3개월 정도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누군가 결정하고 지시했고, 누군가 지시대로 통보한다. 개인의 인생에게 중요한 결정을 한 무게와 죄책감은 두 사람 사이 어딘가를 부유하다 '회사의 부득이한 사정'이라는 곳에 흡수된다. 회사는 실체가 없지만 사람들이 실제한다고 믿기 때문에 실제한다. 실체가 없지만 믿기 때문에 존재한다는 점에서 종교와도 흡사하다. 광신도가 사람 목을 산채로 베면서도 '신의 뜻대로'를 외치며 자신의 행위를 자신이 믿는 종교를 위해 응당 해야 할 일이라고 변환하듯, 회사원은 개인이라면 하기 힘든 일을 '회사 방침상'이라..

소오~설 2020.05.25

[회사의 부득이한 사정] 3/5

- 최센터장님, 국순이 수방 공장 창고를 자체 관리하기로 결정했습니다. - 올해 말까지 철수할 예정이오니 국순 측과 인수인계 일정을 잡아 보고하시기 바랍니다. - 회사 사정상, 부득이 갑작스럽게 결정된 점 양해 바랍니다. - 향후 근무처 관련하여 추후 통보 드리겠습니다. 최준영은 이메일을 읽고, 태연하려고 노력했다. 집이었다면 기쁨의 떰부링을 스물 세 바퀴 정도 돌았을 거 같은 기분이다. 파견 근무처가 사라져 일자리가 붕 뜨게 된 상황이지만 그저 기쁠 따름이었다. 국순 수방 공장의 창고 외주 관리를 했던 지난 5개월은 그정도로 끔찍했다. 아무 문제 없이 잘 돌아가고 있는 회사에서 멀쩡하게 일하던 직원이 그만 두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새로 오픈하는 회사가 아닌 이상, 한창 운영 중인 회사가 후임을 급구하..

소오~설 2020.05.11

[회사는 그리 합리적이지 않다] 15. 사실은 그냥 당신이 미워서 그런 거야

아직 세상이 제대로 돌아간다고 믿는 푸르른 새싹들의 아름다운 인식을 깨부수고자 몇자 적어 보는 연재입니다 직원 A가 개인 사유로 토요일에 연차를 쓰겠다고 금요일에 부서장에게 보고했다.부서장 B는 갑작스런 사유를 제외한 모든 연차 신청은 미리 해야 한다고 예전에 얘기했는데, 또 다시 전날 갑자기 보고한 부분에 대해 질책을 하고, "니 마음대로 해!" 라고 했다.A는 토요일에 결근을 했다.부서장 B는 월요일에 본사 관리부장 C에게 와서 다짜고짜 "A가 무단결근을 했다"라고 말했다. C는 양쪽의 입장을 듣고 정리해본다.직원 A의 입장1. 연차는 개인의 권리로서, 회사에 심각한 손해를 끼치지 않는 한 보장되어야 한다.2. 미리 보고할 기회가 없었다.부서장이 월요일 본사 주간회의, 화요일 거래처 미팅 때문에 출근..

단상 2018.02.23

차라리 돈 때문에 그러라고.

직원 관리하는 업무를 하다 보니, 개인적으로는 참 괜찮은데 조직 전체 관점에서는 문제가 되는 면면들을 볼 때가 있다. "전 돈 때문에 그러는 게 아니라, 저에 대한 예의를 지켜달라는 겁니다."당연한 말이다. 인신공격이나 도에 지나친 무례는 어떠한 경우에도 옳지 않다.하지만, 개인에 대한 예의와 직급에 따른 예의를 혼동하는 경우엔 오히려 가소롭다.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예의 바르게 대하는 건 좋은 덕목이지만,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자신에 대한 예의를 요구하는 건 전혀 별개의 문제다.사장이나 상급자, 하급자, 경비나 운전기사, 청소부 등 위치에 따라 대하는 바가 다른 건 어쩔 수 없다.어느 회사 부장이 사장에게 90도로 인사하듯 경비에게도 90도로 인사한다면 어색한 일이다.운전기사에게 '기사 아저씨'라고 부른..

단상 2017.09.26

부정적인 보고에 필요한 처세의 기술

품질관리를 따로 두지 않았던 모 회사로 이직한 경력직이 품질관리팀을 만든다.품질관리팀 도입 전의 회사 불량률은 4%, 도입 후 불량률은 20%가 됐다.이걸 갖고 품질관리팀 도입한 탓에 불량률이 증가했다고 까는 사람이 있더라.좋게 보면 보고를 곧이 곧대로 믿는 순수한 사람인 거고, 솔직히 말해 이런 사람은 공장 운영을 하면 안된다.(하지만, 주먹구구식으로 회사를 키운 사장의 대부분이 이렇다는 게 모순이다.) 애초에 새로운 부서를 만들어 투입한다고 해서 불량률이 5배로 늘어난다는 것 자체가 부자연스러운 현상이다.품질 관리팀 도입 이전에 불량률 4%와 도입 후 불량률 20%라는 얘기가 사실이라면, 품질관리팀 도입 이전에 운영하던 불량품 적재 공간에 5배로 늘어난 불량품이 쌓여 당장 티가 났을 거다.하지만 그런..

단상 2017.09.20

[회사는 그리 합리적이지 않다] 11. 하찮음 경쟁

아직 세상이 제대로 돌아간다고 믿는 푸르른 새싹들의 아름다운 인식을 깨부수고자 몇자 적어 보는 연재입니다. 직급이 다른 두 직원 (예를 들어 대리와 과장) 사이에 반목이 심해서 둘 중 한 명을 잘라야 하는 상황이 되면, 거의 대부분은 밑의 직급이 잘린다. 누구나 알고 있는 당연한 얘기다. 그 이유가 부장이 과장보다 회사에 더 중요하기 때문이라고 한다면, 회사를 잘 모르는 사람이다. 하극상으로 인한 조직 위계 질서 붕괴 때문에 상위 직급의 편을 들 수 밖에 없다고 한다면, 그나마 좀 아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아직은 본질이 아니다. 두 가지 시각 모두, 어느 쪽이 조직에 더 이익인가를 따지는 시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회사에 중요한 인재다? 누가 더 회사에 유용하냐? 회사란 기본적으로, 직원..

단상 2014.09.26

[회사는 그리 합리적이지 않다] 09. 회사 비용

아직 세상이 제대로 돌아간다고 믿는 푸르른 새싹들의 아름다운 인식을 깨부수고자 몇자 적어 보는 연재입니다. 회사 비용 : 회사 운용에 소요되는 비용, 회사를 위해 쓰이는 비용 얼핏 명확한 개념 같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몇 차례 얘기했지만, '회사'라는 단어의 개념이 명확하지 않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회 초년생들은 회사 비용을 '회사를 위한 비용'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생산성을 증대하기 위한 기자재 설치 비용, 단합을 위한 워크샵, 회식 등등 회사를 위한다는 목적성이 순수하다면, 조직이 그 비용을 납득하리라는 환상을 갖는다. 그리고 그런 비용을 요청했을 때 상사로부터 반려 당하면, 요청 근거가 설득력이 없어서 그랬다고 생각한다. (상사들이 그런 식으로 말하면서 반려하는 경우도 흔하다.) 김과장은 해외..

단상 2014.09.23

[회사는 그리 합리적이지 않다] 07. 월급 짠 회사 중간간부의 착각

아직 세상이 제대로 돌아간다고 믿는 푸르른 새싹들의 아름다운 인식을 깨부수고자 몇자 적어 보는 연재입니다. 자기 푸대접 감수하며 부하직원 다독다독 해서 꾸려 나가려 하는, '어설프게 선량한' 중간간부들이 있다. 자신도 감수하고 있다'라는 논리로 일에 비해 좋지 않은 회사 대우를 합리화 하려고 한다. 틀렸다. 자기 희생은 존경 받는 리더의 덕목 중 하나지만, 그것을 하급자에게도 강요하는건 잘못된 일이다. 신념을 위한 자기 희생은 지극히 개인적인 가치이고, 타인에게 강요할 수 없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럼 열심히 하면 고작 당신처럼 되는 겁니까?" 라는 말 한 마디에 무참하게 박살날 공허한 리더십이다. 하급자가 차마 말을 못하는 거고, 일단 얘길 꺼내면 관계는 끝장나는 거니까 안하는 것 뿐이다. 거기다 "..

단상 2014.09.18

부장과 임원이 대리와 과장보다 많은 회사

관리부서만 5개에 50여명 규모인데, 차장은 없고, 과장이 2명, 대리가 단 1명인 어떤 회사가 있다. 그나마도 전에는 과장이 아예 없었고 대리만 3명이었는데, 그 중 2명이 승진한 거다. 차장은 아예 없고 부장 2명, 이사 4명이니, 이른바 간부급인 차장부터 사장까지를 합친 수가 중간 관리자급인 과장, 대리를 합친 수의 세 배에 가까운 묘한 구조의 회사다. (간부급 중 사장과 이사 1명 제외하고는 전부 공수부대(?) 출신이다. ㅋㅋㅋ) 이 회사는 6명의 계장과 (일반회사에 계장이라는 직급이 있다는 것도 놀랍다) 16명의 주임이, 실제로는 다른 회사로 따지면 대리나 과장급 업무를 수행하고 있다. 이 회사 최고관리자는 종종 두 가지를 자랑하곤 한다. "우리 회사는 평사원도 바이어 과장과 상대하고, 주임 정..

소오~설 2013.1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