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한당 명랑쾌활

단상 231

뭘 자꾸 하려는 게 문제

좋아하는 상대에게는 뭘 자꾸 해주고 싶다는 생각부터 든다. 꽃다발이라던가, 맛집이라던가, 사람 많은 곳에서 공개 프로포즈라던가. 좋아하면 다행인데, 싫어하면 역효과다. 몰라준다고 섭섭해하기도 한다. 뭘 하는 건 리스크가 있다. 자칫 잘못하면, '내 생각에 좋은 걸' 상대하게 강요하는 꼴이 된다. 부모가 '이게 다 너를 위한 거야'라면서 강요하면 자식은 진저리를 친다. 자식을 위한다기 보다는, 자기 욕망을 자식에게 투영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배도 별로 고프지 않고, 입맛이 없는 손자에게 억지로 밥 권하는 할머니의 모습이 아름다워 보이겠지만, 손자 입장에선 참고 받아줘야 할 강요다. 손자 생각해서 그러는 거지만, 사실 그저 할머니의 만족이다. 상대가 싫어하는 걸 하지 않는 건 온전한 배려다. 뭘 한다는 건 ..

단상 2024.03.08

무책임한 믿음

어떤 상황에서도 변하지 않는 사람은 이상하다. 상황에 따라 변할 수도 있는 건 나쁜 게 아니라 당연한 거다. 변하지 않는 사람은 어떤 상황이냐에 따라 비정상적인 인간이 될 수 있다. '절대로' 남의 돈에 손을 대지 않는 사람이 있다. 훌륭한 사람이다. 믿을 만한 사람이다. 하지만 자기 자식이 수술비 안내면 죽는데, 수술비로 충분할 만큼의 남의 돈을 갖고 있는 상황이라면? 절대로 남의 돈에 손을 대지 않기 때문에 자기 자식 죽게 두는 사람이 여전히 훌륭한 사람일까? 소위 '좋은 사람'이나 '믿을 만한 사람'이라는 말은 모호하다. 아무리 좋은 사람이더라도 상황에 따라 태도가 변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렇지 않은 사람이 이상한 거다.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인간에 대한 불신은 그럴 당위성이 있다..

단상 2024.02.23

노쇠의 의미

20세에게 말했다 네가 20년 후에는 마흔살이 될 거라는 건 진리다. 오래 산 만큼 더 보다 경험이 많고 네가 모르는 걸 안다는 게 아니다 그냥 난 내가 스무살 때 어땠는지 알지만, 넌 네가 마흔살 때 어떨지는 20년 후에나 알게 될 거라는 얘기다. 거듭 말하지만, 내가 현명하고 네가 무지하다는 뜻이 아니다 나이 먹는 게 뭐 대단하다고. 별 일 없으면 네가 아무 노력하지 않아도 저절로 알게 될 것들이다. 그냥 먼저 겪어서 아는 것 뿐이다. 90세 노인이 100미터를 10초에 뛰는 게 불가능하다는 걸 너도 동의할 거다. 89세까지는 가능했다가 90세가 되면서 갑자기 그렇게 되는 게 아니란 것도 너는 안다. 성장의 시기가 끝나면 몸은 시간이 지날수록 낡아간다. 열정이나 근성 따위 정신적인 문제가 아니다. 육..

단상 2024.02.16

내가 속은 건 네가 속였기 때문이야

프로레슬링은 짜고 하는 거다. 당연하다. 사람을 진짜로 그렇게 패면 죽는다. 배움이 짧든, 물정을 모르든, 조금만 생각해 보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사실이다. 프로레슬링은 쇼다. 가짜라고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다. (유독 한국인들이 그런 성향이 강하다.) 속였다고 기분 나쁘댄다. 1960년대 후반, 한국 프로레슬링 계에서 벌어진 일이다. (물론 한국 프로레슬링이 추락한 원인은 그 때문은 아니다.) 정글의 법칙이 가짜라며 싹 돌아서는 것도 그렇다. 아니 그럼, 진짜로 외지인 들어서면 창부터 들이미는 부족에 카메라 들고 가서 촬영을 할까? 창에 찔리고 뱀에 물리면 그거 그대로 촬영해서 방송에 내보내나? 60-70년대도 아니고, 그정도 생각도 못하는 사람이 있을리 없다. 하지만 그딴 상식은 필요 없다. 논리가 아..

단상 2024.02.09

공정함을 가장한 편파

1. 부자 부모가 자식 미국 유학 뒷바라지를 대줬다. 2. 노점을 하는 부모가 자식 미국 유학 뒷바라지를 해줬다. 자식 쪽에 포커스를 맞추면 1번은 자식이 갈만한 형편이니까 간 거고, 2번은 자식이 부모 등골 빼먹은 게 되겠지만 부모 쪽에 포커스를 맞추면 1번은 부모 찬스라 욕하고, 2번은 훌륭한 부모라고 칭찬한다. 둘 다 부모 찬스다. 부자의 돈이나 가난한 사람의 돈이나 돈은 똑같다. 둘 다 부모 덕 본 거다. 1번에는 분노하면서, 2번은 괜찮다고 하는 건 공정이 아니다. 그런 공정은 정의가 아니라, 자신에게 불리한 것에 대한 불만일 뿐이다.

단상 2024.02.02

곤란한 부탁을 받았을 때

"생각할 시간을 달라." 사정은 잘 알겠는데... 무슨 얘긴지 알겠는데... 구구절절 어색하게 이런 저런 말 주워섬길 필요 없다. 그냥 일단,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하면 된다. 그러고서 거절할 방법을 찾든, 들어줄 방법을 찾든, 다른 방법을 찾는다. 상대도 당신이 곤란해할 부탁이란 거 안다. 고민을 거듭하다 부탁했을 거다. (그게 아니라면 들어줄 필요도 없다.) 그렇다면, 부탁 받는 당신도 들어줄지 고민할 시간을 갖는 게 당연하다. 보신하라는 게 아니라. 그저 당신 입장이 그렇다. 한쪽만 희생을 감수해야 하는 부탁은 부탁이 아니다. 상대의 부탁을 그대로 들어주는 것보다, 서로를 위해 더 나은 길이 있을 수도 있다. 당신도 사정이 있어서 전부 들어줄 수 없을 수도 있다. 그 게 당신 입장이다. 상대가 즉답..

단상 2024.01.26

삶의 의미고 나발이고

당신이 어떤 목적에 의해 태어났다면, 기쁜 감정이 들까, 불쾌한 감정이 들까. 당신이 의도에 의해 태어났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거의 대부분의 인간은 별다른 목적 없이 태어났다. 어디 써먹으려고 나온 게 아니다. 거대한 참사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인생을 허무하게 느낀다고 한다. 희생자 중엔 평소 늘 타인을 배려하고 양보하던 사람도 있었을 거다. 생존자 중에 나쁜 사람, 타인에게 해를 끼치는 사람도 있을테고. 생사를 가른 이유가 체력이나 기민한 판단력이 아닌, 그저 운이다. 내가 살아 남은 건 착한 일을 많이 해서가 아니라, 그저 마침 이 곳에 있어서다. 의도가 없는 죽음이란 건 그래서 무자비하다. '무슨 짓을 했기 때문에' 당하는 죽음이 차라리 인간적이다. 인간이 목적 없이 태어났다는 사실..

단상 2024.01.19

우린 서로 당연히 다르다

우리는 흑도 아니고 백도 아닌, 그 사이에 어딘가에 있으면서 흑이나 백 쪽으로 약간 치우쳤을 뿐이다. 성격이 소심한 사람이라고 해서 모두 똑같은 게 아니다. 소심한 정도는 모두 다르다. 이기적인지, 성급한지, 폭력적인지, 교활한지, 비겁한지, 성향 각각은 모두 정도가 다르다. 그리고 그 각자 무수히 다른 지표들이 모여서 한 사람의 성격을 형성한다. 우린 서로 당연히 다르다. 사람을 무언가를 하려고 움직이는 동인은 세 가지다. 하고 싶어서거나, 하기는 싫지만 한 후의 보상 때문이거나, 하기는 싫지만 안했을 경우 겪을 대가가 더 싫거나. 그런데, 하고 싶다거나 싫다는 감정도 사람마다 각자 그 정도가 당연히 다르다. 우리 애는 왜 공부를 안할까. 옆집 애처럼 진득하게 하지 못할까. 감각하는 바가 달라서 그렇다..

단상 2024.01.12

소유보다 일상

잠을 청하려 눈을 감은 상태에서 생각해본다. 이대로로 잠들고, 다시는 깨지 않는다고. 내 책상이 어떤 모습이었는지, 통징 잔고도 생각해보고, 박스에 보관하지만 몇 년 간 거의 열어보지도 않은 물건들은 뭐였는지, 내 옷들은 어떻게 될지, 하던 일은 어떻게 될지. 처음엔 생각을 오래 이어가기 괴롭다. 시람은 본능적으로 죽음을 현실적으로 인지하는 걸 외면한다. 괜찮다. 정말 오늘일리는 없다. 내일이라면 혹시 몰라도. 어느 정도 익숙해져서 제법 오래 생각하다 문득 깨닫는다. 내가 소유했다고 생각한 것들, 소중하다고 생각한 것들 거의 대부분이 별 거 아니, 그보다는 그냥 흔하디 흔한 내일의 평범한 일상이 경이롭다는 사실을. 내가 사회에서 맡았던 역할들 중 나 아니면 안되는 일 따위는 없고, 그보다는 누군가의 자식..

단상 2024.01.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