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한당 명랑쾌활

단상

내 절박함은 항상 그들의 무기가 되었다.

명랑쾌활 2013. 7. 29. 14:01

네이버 웹툰 이현민의 <나의 목소리를 들어라> 中 (http://comic.naver.com/webtoon/list.nhn?titleId=514917&weekday=tue)

* 인용으로 인한 법적 문제 발생 시 즉시 삭제토록 하겠음.

 

타인의 절박함이 내 유리함이 된다는 것은 이기적으로 치닫는 자본주의적 사고 방식의 당연한 귀결이다.

공산주의의 극단 스탈린식 극단주의의 북한과 같은 민족이라는 것을 대변하듯, 자본주의의 극단 재벌 자본주의 체제로 성장한 한국의 그 천박스러움은 결국 최저임금으로는 최저한의 삶도 유지 못하는 사회가 되어 버렸다.

니가 아니어도 하겠다는 사람은 많다.

극단적인 취업난 속에서 일자리의 절박함을 이용하는 회사의 야만성은 극에 달했다.

최저임금 상승률이 높으면 고용을 줄일 수 밖에 없다는 협박을 언론을 통해 서슴없이 내뱉는다.

1년에 한 번 한국에 들어가면 확 다가온다.

한국은 몰라보게 각박해졌다.

 

과연 '절박함'이란 취업난에만 해당되는 얘기일까?

왜 회사는 신입은 미혼을, 대리급 이상이나 경력직 채용은 기혼을 선호할까?

왜 회사는 이제 가정을 가져야 하지 않냐는 선량한 걱정으로 포장된 압박을 할까?

나에 대한 결혼 권유가 왠지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은근하면서도 끈질기다고 느꼈을 때, 생각이 시작됐다.

그리고 피상적이었던 생각은 회사의 부조리와 내가 생각하는 바른 길이 충돌하는 사건들을 겪으면서 점차 정리되었다.

 

1. 고용주 및 회사 기득권자(본문에선 앞으로 갑이라 표기)가 원하는 사람은 생각이 바른 사람이 아니라 부조리해도 무조건 따르는 사람이다.

  그렇다고 생각이 바르지 않은 사람을 고용하고 싶을 리는 없다.

  즉, 회사는 생각은 바르면서도 부조리한 회사의 방침에 순응하는 사람을 원한다.

  (이런 사람을 가리켜 흔히들, '사회가 뭔지 아는 사람'이라는 별 웃기지도 않는 긍정적 평가를 한다.)

2. '생각은 바른데 부조리에 따른다'는 명제는 근본부터가 이미 모순이라, 갈등은 필연적이다.

  바른 생각을 바탕으로 봤을 때 부조리를 느낀다. 그리고 표현한다.

  당연한 수순이다.

  그러나 갑의 입장에서 보면 체제에 대한 반항이다.

  갑은 사회의 룰은 '원래 그렇고 그렇지 않으면 미숙한 것'이라는 논리로 누른다.

  또한 피고용자(앞으로 을로 표기)를 두 종류로 분류를 한다.

  별로 필요 없는 자와 꽤 필요한 자.

3. 별로 필요 없는 자 - 신입, 혹은 말단 사원

  체제 논리로 누르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자는 대체 시켜버리면 된다.

  별로 필요 없으니 보수도 가장 적어야 하고, 보수가 적어도 감수할 수 있으려면 미혼이 낫다.

  미혼이기 때문에 성질 못이겨서 나간다? 상관 없다.

4. 꽤 필요한 자 - 고참 대리, 과장급 이상, 경력직

  필요해서 뽑은 거고, 쓸 모가 있다.

  없다고 회사 망하는건 아니지만 꽤 성가시다.

  판 돌아가는 상황을 알기 때문에 왠만한 부조리를 수용할 줄도 안다.

  하지만 그런 만큼, 터졌다 하면 꽤 골치 아프다.

  충동적인 행동을 조절할 수 있는 만큼, 수용 범위를 넘어서는 부조리에 대한 반항 방법이 치밀하다.

  실력있는 을일수록 그런 경향이 더 강하다. 여기 말고도 오라는 곳은 많으니까.

  때문에 무작정 명분도 없이 누를 수도 없다.

  실력이 있다는건 그만큼 쓸모도 있다는 얘기니 걷어 차버리긴 아깝다.

5. 꽤 필요는 하지만 통제가 어렵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당근과 채찍 - 금전적 보상과 공포

6. 별로 필요 없는 자에게는 아주 단순하고 노골적이다.

  너 없어도 하고 싶다는 사람 많다, 너 없어도 아무렇지도 않다.

  좀더 야비한 표현으로는, 이쪽 업계가 의외로 좁아서 한두 다리만 걸치면 서로 다 안다. (이쪽 업계 취직 어렵게 만들 수 있다는 노골적인 협박이다.)

  드라마나 영화로 접하며 피상적으로 나름 낭만적으로 그려온 어른들의 세계가, 실상은 노골적으로 천박하다는 의외성은, 그런 경험이 없는 사회초년생들의 얼을 빼고, 공포로 짓누른다.

  더 당황스러운 것은, 공포로 짓누르는 실행자는 자신이 직장 동료라고 부를 수도 있는 같은 처지의 을이다.

  그들은 절박함이라는 갑옷으로 양심을 감싸고, 사회초년생 을이 아직 절박함에 사로잡히지 않았다고 비하한다.

  배가 불렀구만. 너도 처자식 굶는다고 생각해 봐라. 뭐든 못하나.

  다른 데 가도 똑같다. 여기도 겨우 들어왔다.

  스펙은 스펙일뿐, 쓸 모가 있다고 다른 곳에 실질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것은 '경력'이다.

  그게 없는 한, 어디를 가도 똑같다.

  참아야 한다. 참아내지 못하면 패배자로 낙인 찍혀, 난 이 양지에 있을 수 없게 된다.

  그렇게 사회초년생 을은 절박해지고, 부조리를 감내하게 되고, 마침내 부조리가 '원래 그런 것'이라고 수용하게 된다.

7. 쓸모 있는 자에게 절박함이 희박하다면 강하게 만들면 된다.

  결혼, 가족, 자녀

  지킬 것이 있는 자는 선택의 폭이 좁을 수 밖에 없다.

  스트라이커, 미드필더가 경기장을 종횡무진 뛰어 다니지만, 골키퍼는 그럴 수 없다.

  갑의 입장에서 보면, 가족은 가장 효과적이고 강력한 인질이다.

  갑이 을에게 결혼을 권유하면서 상투적으로 말하는, '결혼을 해야 사람이 믿음직하고 안정된다.'라는 말의 실체가 이것이라 단언하다.

  전쟁 중에 상대의 말을 믿을 수 없으니 인질을 보내라는 것, 바꿔 말해 인질을 보내면 믿을 수 있겠다는 것은 너무 흔한 상황 아니던가. 하하...

 

 

어떤 부조리.

경력직 을을 뽑으면서, 어지간한 불이익은 감수할 수 밖에 없는 그의 절박한 처지(가족 부양!)를 이용하여, 조건을 심하게 낮추어 근로계약을 체결했다.

통상에 비해 현저히 적은 급여에, 주택 및 학자금에 대한 지원이 일체 없는 조건이다.

자녀가 셋인 그 기혼 을에게는 적자 없이 산다는 것이 불가능한 처우다.

(주택, 학자금은 지원하지 않아도 불법이 아니니 밝힌다. 같은 이유로 을의 퇴직금 및 4대보험 조건은 밝히지 않겠다.)

 

외국에서 일하는데 한국과 상황이 가장 다른 것은 집과 교육, 두 가지다.

한국인은 외국인이므로 부동산 취득에 심한 제약이 있고, 국가가 지원하는 의무 교육 기관은 그 국가 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곳이다.

특히, 사교육과 같은 선택적인 부분이 아닌, 기본적인 교육에 소요되는 비용이 한국에 비해 매우 크다.

(한국도 외국인 학교는 학비가 비싸다.)

인도네시아에서 한국 아이 한 명의 일년 학비를 간단히 적게 잡아 만불 정도로 본다.

(중급 수준의 모 외국인 학교 고등부의 2013년도 1년치 등록금만 1만4천2백불이다. 물가에 따라 매년 오른다.)

따라서, 외국에 소재한 한국 업체들의 처우 방식은 크게 나눠 둘 중 하나다.

급여가 적은 대신 주택, 학자금 등 부대지원이 있거나, 급여가 많은 대신 그런 부분은 알아서 하거나.

주로 한국에서 가족 동반으로 파견하는 방침의 회사는 부대지원 쪽에 비중을 두는 편이고, 가족은 한국에 두고 파견하는 방침의 회사는 반대인 편이다.

업종에 따라 급여 수준이 다른 것 같지만, 실상 따져보면 그렇게 큰 차이는 없다.

갑이 무조건 비용 줄이고 착취만 하는 거 같아도, '최소한의 기본적인 선'은 지킨다.

인질이 최소한의 삶은 유지해야, 인질로서의 효과가 있는 것 아니겠는가.

 

그 회사의 미혼 을 혼자 있을 적에는, 그 회사가 급여가 적더라도 다른 혜택이 있는 처우 방식일 것이라 용인되었다.

다만 혜택을 받을 대상이 없어서 그럴 뿐, 대상만 있다면 적정선의 부대 혜택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기혼인 또다른 을이 들어오자 부조리의 실체가 부각되어 버렸다.

그 회사는 최소한의 기본적인 선을 지킬 생각이 없었던 것이 드러났다.

미혼인 을과는 당장은 상관 없을 수도 있는 일이지만, 받아 들일 수 없는 부조리다.

이것을 받아 들인다면 결국은 미혼인 을도 그 부조리를 뒤집어 쓸 수 밖에 없다.

기혼인 을은 직접적인 피해자임에도 불구하고 거부할 수 없다.

그는 절박하기 때문에 그럴 수 없다.

미혼인 을은 상급자에게 정면으로 반박했다.

그는 절박하지 않기 때문에 그럴 수 있다.

같은 피해자이자 공조자인 그들은 모두 대답을 회피했다.

미혼인 을은 그 집단에 가담하지 않음으로 자신의 소신을 지키기로 한다.

미혼인 을은 절박하지 않기 때문에 순응 만이 선택지가 아니다.

 

 

결혼=적자 상황을 만든 주체인 갑은 지금도 여전히 결혼 안하냐는 얘기를 내게 툭툭 던지고는 한다.

" 이제 결혼해서 부모님 걱정 덜어드려야지. 나도 축의금 좀 내보자."

그 의도가 순수하다면 무지함이 죄요, 불순하다면 어설픔이 죄다.

한국처럼 맞벌이라는 임시 대안이 있는 것도 아닌데, 최소한의 당근은 깔아 뒀어야 하지 않겠나.

결혼이 그들이 이용할 족쇄라면, 거부한다.

절박하지 않아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