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한당 명랑쾌활

Indonesia/서식기 V

[풍경들과 추억들] 3.

명랑쾌활 2020. 12. 14. 11:51

다시 인니의 한국 업체에 취직하게 됐습니다.

새로 들어간 회사 사장님은 호인이었는데, 호인답게 술을 참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일주일에 세 번 정도 저녁 술자리를 같이 하는 게 회사 업무만큼 중요한 일이었지요.

그나마 찌까랑으로 이사 가서 주 3회였고, 입사 초기 회사 근처에 집을 얻었을 때는 거의 매일이었습니다.

주 5회도 그리 드물지 않고, 딱 한 번 주 6일 마신적도 있었습니다. ㅋㅋ

입사 초기엔 긴장이 뽝 되어 있었기 때문에 힘든 줄 몰랐는데, 반 년 정도 그런 생활이 계속되니 결국 지치더군요.


저녁을 먹으러 가는 식당들은 사장님 퇴근길 지나는 찌부부르 지역에 있었습니다.

찌까랑 정반대 방향이었죠.

찌부부르까지 30분에서 1시간 정도 걸려 가서 저녁을 먹고, 다시 온 길을 되짚어 회사를 지나 한 시간을 더해 찌까랑 집으로 가야 했습니다.

하지만 아무래도 좋았습니다.

기숙사를 벗어나 따로 집을 얻어 살았거든요.


일과 사생활을 분리하여 재충전의 시간을 가질 수만 있으면, 어지간한 스트레스는 감당할 수 있습니다.

전직장에서 뼈저리게 깨닫게 된 교훈인데, 실제로 검증이 된 셈입니다.

전 단체생활과 지지리도 안맞는 성격이었던 거죠.


해 떨어지기 전에 퇴근할 수 있는 날엔 멋진 시골 풍경을 볼 수 있습니다.

두 번째 회사를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풍경이지요.

사진으로 보기에만 그럴듯하지, 실은 볼품 없는 깡촌 시골입니다.

자카르타 경계와 직선거리로 5km 밖에 떨어지지 않은 지역인데 그렇습니다.

인니는 소위 수도권이라는 지역 내 대부분이 이런 시골 마을입니다.


세 번째 회사 다닐적, 퇴근하면서 찍은 사진입니다.
원래 근무 조건 중 하나가 공장 내 기숙사 거주였는데, 전 공장 인근 시골마을에 따로 집을 얻어 출퇴근을 했었습니다.
제 자신에 대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면접 당시 기숙사 거주 조건을 단호하게 거부했거든요.
기숙사 사느니 차라리 입사 안한다는 태도를 보이니 물러서더군요.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차라리 그때 채용되지 않았다면 더 낫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ㅎ...

제가 조건을 거절하고 밖에서 살았기 때문에 운전기사도, 차량도, 유류비 지원도 없이 자력으로 출퇴근했습니다.
뭐 아무래도 좋았습니다만...
출퇴근길은 인니에서 인명 사고가 가장 빈번하기로 유명한 도로였는데, 실제로 체험하기로도 충분히 그럴만 했습니다.
쌩쌩 달리기 딱 좋게 쭉 뻗었지만 중간 중간 파손된 도로,
유료도로 통행료를 아끼기 위해 우회하는 엄청 낡은 화물차,
자신이 지금 얼마나 빨리 달리고 있는지 인지를 못한채 무식하게 달리는 승용차,
타이밍 더럽게 못잡고 도로 횡단을 할까 말까 알짱거리는 보행자,
그럴만한 실력과 안전장비도 갖추지 못한채 시속 80km 이상으로 달리는 오토바이,
뒤에서 오는 차량이나 오토바이가 알아서 비켜줄거라 믿으며 유턴하려고 차선을 바꾸는 오토바이
등등이 얽히고 설킨 곳이었거든요.
주행 내내 눈에 뜨이는 모든 것들을 돌발요소로 간주하고 긴장해야 합니다.
한국에서라면 '죽고 싶어 미치지 않고서야 절대 그렇게 할리가 없는' 움직임들이 얼마든지 발생합니다.
...하지만 여긴 인니니까요. 제가 이상한 겁니다.

매일 출퇴근하면서 목적지에 도착해 주차 장소에 차를 세우고 사이드 브레이크를 올리면, 그때서야 긴장이 풀리며 어김없이 안도의 한숨이 절로 나오던 기억이 납니다.


살던 곳이 워낙 시골이라 가끔씩 찌까랑에 나들이를 갔습니다.

지인을 만나 술 한 잔 하게 되면 호텔에 묵고 다음날 잔뜩 장을 봐서 집으로 돌아오곤 했었네요.

한인 마트는 커녕 대형 마트도 없었거든요.

그 때문에 샀던 아이스 박스는 다시 찌까랑으로 이사 온 이후 쓸 일이 없어서 한구석에 처박혀 있는지 오래입니다.


그 당시 한참 공사중이라 찌까랑 오가는 길 정체를 만들었던 복층 유료도로는 제가 찌까랑으로 이사 온 이후에 개통되었습니다.

제게는 방해만 됐고, 혜택은 하나도 못봤네요.


세 번째 회사 근무처인 공장에서 찍은 낮달이군요.

직원들은 모두 퇴근하고 저 혼자만 남아 일하고 나온 어느 날 찍은 사진입니다.

텅텅 빈 주차장에 제 차는 보이지 않습니다.

저 곳엔 제 자리가 없거든요.


지붕을 설치한 주차장에는 한국인 관리자 차량과 외부 손님 차량 자리를 제외하면 직급 좀 되는 현지인 직원들이 이용했습니다.

한국인 관리부서장에게 요청해서 한 자리 받아 사용했는데, 일주일 쯤 후 경비대장이 와서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그 자리를 양보해 달라고 부탁하더군요.

공식 통보는 아니고, 자리를 빼앗긴 직원과 동료들의 압박때문에 비공식적으로 부탁하는 눈치였습니다.

회사가 현지인들에게 먹히면, 한국인 관리자의 지시가 제대로 먹히지 않아 이런 일이 벌어집니다.

회사 소유의 공간이지만 이미 자신들의 것이자 권리라고 인식하고, 그 것을 침탈 당했다고 여기는 거지요.

공식 지시사항이니 대놓고 거부하지는 않지만, 뒤에서 수작을 부려 자신들이 원하는대로 되게 만듭니다.

이런 상황이면 별 수 없습니다.

관리부서장에게 다시 말해봐야 해결될 리가 없습니다.

이 지경이 됐다는 거 자체가 이미 관리부서장 능력이 떨어진다는 뜻인데, 그런 사람이 어설프게 관련자들 불러다 깨봐야 발뺌하면 그만이고, 그 원한은 제 차에게 돌아올 겁니다.

경비대장에게 알았다며 수긍하고, '사정을 이해한다'는 말을 덧붙여 해줬습니다.

발끈할 줄 알았던 한국인이 의외로 말귀 통하는 거 같아 마음에 들었는지, 경비대장은 그후로도 가끔 마주치면 중요한 소식이나 정보들을 알려 주곤 했습니다.

공장의 한국인 직원들은 제게 일절 말해주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전해주는 얘기들은 상황을 파악하고 예측하는데 매우 도움이 됐습니다.


이후로 저는 직급 낮은 직원이나 현지인 외부인들이 임시로 차를 세우는 땡볕 아래 공간에 주차를 했습니다.

출근해서 주차하고 내리다 기숙사에서 나오는 관리부서장과 마주치기도 했지만, 그는 아침 인사만 하고 지나칠 뿐 제가 왜 그곳에 주차하는지 묻지 않았습니다.

아무 관심 없었던 거겠지요.

그 곳에서 일하는 내내, 전 그렇게 늘 이방인이었고, 현지인보다도 더 낮은 위치였습니다.

세상 모든 일에 장점이 있으면 단점이 있고, 나쁜 게 있으면 좋은 것도 짝으로 있게 마련인데, 그 곳에 얽힌 기억 중 좋았던 것은 과장 전혀 없이 정말 단 하나도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