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한당 명랑쾌활

Indonesia/서식기 III

당신의 휴대폰 번호가 사용정지 될 예정입니다.

명랑쾌활 2018. 4. 10. 11:02


출근길에 인터넷 선불 충전을 하기 위해 고객센터에 접속했다.

-No Anda akan terblokir. Segera registrasikan No Anda-

(당신의 번호가 사용정지 될 예정입니다. 즉시 당신의 번호를 등록하세요.)

생뚱 맞은 메시지에 일단 빡부터 돌았다.

한참 전에 이미 통신사 고객센터에 가서 실명 등록처리를 다 끝내 두었었기 때문이다.

'이 새끼들, 제대로 등록처리를 안했구만.' 하는 생각부터 들었다.


2017년 10월 경, 인니 정부는 새로운 통신정책을 발표했다.

1. 모든 휴대폰 사용자는 실명 등록을 해야 한다.

2. 등록하지 않은 번호는시 2017년 12월 31일부로 사용정지가 된다.

3. 통신사 별로 개인당 3개의 번호를 등록할 수 있다.

4. 내국인은 주민번호와 가족기록부 번호를 등록하고, 외국인은 여권번호와 외국인 등록 번호를 등록한다.

차명폰의 난립으로 인한 폐해를 막아 보고자 하는 조치였다.

바꿔 말하면, 그 동안은 개나 소나 아무렇게나 번호를 개통하고, 아무렇게나 사용하고 있었다는 얘기다.

나는 정책 시행 첫날 즉시 통신사 고객센터에 찾아가 등록했었다.

어차피 해야 할 일은 후딱 해치우는 편이 낫다.

인니인이든 한국인이든 어차피 사람들 대부분은 하면 득 될 일에는 첫날부터 득달같이 달려 들지만, 해봐야 득 될 거 없고 안하면 손해 볼 일은 미루다 미루다 막판에 쫓겨서 하기 마련이다.

가뜩이나 인니는 전반적으로 사무 처리 속도가 느려, 평상 시에도  최소 15분, 보통 2시간 이상 기다려야 하는 게 다반사인 나라인데, 막판에 사람 몰리면 어떤 지옥이 펼쳐질지 모른다.

아, 최소 15분인 이유는, 번호표 1번을 받기 위해 서비스 센터 개장 시간 10~20분 전에 가서 기다려야 하고, 어차피 그래봐야 상담원이 개장 시간 이후 5~20분 정도 지나가 업무를 개시하기 때문이다.

한국은 개장 시간 이전에 조회를 포함한 모든 준비를 완료한 후, 개장 시장 땡 치면 바로 업무를 개시하는 게 '당연'하지만, 인니는 보통 개장 시간에 문은 열지만 (심지어 문 여는 것도 몇 분은 다반사요, 10~20분 늦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 상담원은 뒤늦게 자기 자리에 착석하여 컴퓨터 키고, 소지품 정리하고, 중간 중간 옆자리 직원과 잡담도 하면서 업무 준비를 끝마친 후에야 업무 개시를 한다.

번호표 뽑고 기다리는 손님들이 뻔히 보는 앞에서도 전혀 눈치 보지 않고 태연히 그 지랄을 하는 거 보면, 인니에서는 그런 태도가 당연하다는 뜻일 게다.

어쨌든, 시행 첫날 개장 10분 전에 가서 기다린 덕에 2번을 뽑았고, 5분 기다린 끝에 상담원에게 말하고 5분 만에 등록을 끝낼 수 있었다.


그랬는데, 반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등록 안해서 사용정지가 되느니 마느니 하는 메시지가 왔으니 빡이 돌지 않겠나.

인니 생활에 적응하게 되면 이런 상황에 처했을 때, 직접 가서 했는데 그럴 리가 있냐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럴 수도 있다고 받아 들이고, 아마도 담당 직원이 제대로 처리하지 않았기 때문일 거라는 생각부터 든다.

워낙 일상다반사로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이다.

편견일지도 모르겠지만, 내가 겪어 본 거의 대부분의 인니인들이 단순 작업은 싫증도 내지 않고 꾸준히 잘한다.

하지만, 머리를 써야하고 집중을 요하는 사무 업무를 실수 없이 처리할 수 있는 사람은 아주 드물다. (그래도 인구가 워낙 많아서 절대 수치로는 적지 않다.)

인니인이 한국인에 비해 지능지수가 떨어져서 그렇다기 보다는, 근무에 임하는 태도가 '해이하기 때문'이라고 본다.

업무 상 실수에 대한 제재가 약하기 때문에,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하는 압박이 크지 않다.



회사에 보고하고 바로 서비스 센터로 갔다.

개장 시간 10분이 지나서 도착했다.

센터 안에는 이미 손님 15명이 대기하고 있었다.

작년에 등록하러 왔을 때 3곳이었던 창구는 2곳으로 줄었다.

등록절차라고 해봐야 별 것 없다.

휴대폰 번호 알려주고, 신분증 제시하면 끝이다.

그 정도 업무 절차에 창구 2곳, 15명의 대기자라면, 한국이라면 30분이면 쌀을 빻아서 떡을 쳐도 될 시간이겠지만, 이곳은 인니다.

인니인의 사무 처리 속도는 보통 한국인의 절반 이하 정도다. (그런데도 업무 실수가 한국보다 많다.)

1시간 10분을 기다리고 나서야 내 차례가 왔다.

" 내가 여기 와서 실명 등록을 다 했는데, 안하면 번호 정지된다는 문자가 왔다. 어떻게 된 건지 확인하려고 왔다."

미소 띤 얼굴로 조근조근 상냥하게 말했다.

인니는 화 내는 사람을 미친 놈 취급하는 문화가 있다.

누군가가 타인에게 피해를 끼쳤다면 피해를 끼친 사람이 잘못이다.

하지만, 피해자가 화를 내면 상황이 돌변해서, 피해자가 이상한 놈, 나쁜 놈 취급을 받고, 피해를 끼친 사람이 오히려 피해자 대우를 받는다.

한 마디로, 화 내봐야 나아질 것 아무 것도 없다.

내 번호를 조회한 상담원은 작년 10월에 실명 등록 완료 된 것으로 나온다고 했다.

흐헐~ 그럼 등록 안하면 번호 정지된다는 이 메시지는 뭐냐고 보여주니... '아마도' 그냥 통상적인 안내 문자일 거라고 한다.


...뭐 등록이 됐다니 다행이지만 완전 개삽질을 했다.

상담직원의 업무 실수 탓이 원인이 아니라, 통신사 전체 공지 메시지가 명확하지 못한 탓이었다.

제한된 문자수로 정보를 전달해야 하기 때문에, 불필요한 부분을 최대한 생략해야 하는 건 당연하다.

하지만, <만약 아직도 등록을 하지 않았다면, 당신의 번호가 사용정지 될 예정입니다> 라는 정보에서 '만약 ~다면' 이라는 부분을 생략해 버리고, 다짜고짜 <당신의 번호가 사용정지 될 예정입니다> 라고 보내면 어쩌란 건가. =_=

누구라도 '아, 내 번호가 등록이 되지 않아서 이런 문자가 왔나 보다' 라고 생각하지 않겠나.


인니는 불특정 대상에 대한 편의 시스템의 수준이 한국에 비해 많이 떨어지는 것 같다.

작년에 새로 개장한 자카르타 3청사의 구조와 동선은 한심할 정도로 비효율적이고 불편하다.(http://choon666.tistory.com/944)

복층 구조의 고급 쇼핑몰들 중에서도 에스컬레이터로 한 층에 오른 후 그 다음 층을 올라가려면, 어쩔 수 없이 해당 층 플로어를 어느 정도 걸어야 하는 곳들이 있다.

다음 층 에스컬레이터로 바로 이어지지 않고,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기 때문이다.

명백하게 공급자 위주의 문화다. 사용자에게 강요하는 구조다.

잘못을 직설적으로 지적하거나 화를 내는 것을 나쁘게 보는 문화다 보니, 불편한 일을 겪더라도 그냥 감수하는 게 보편적인 국민성으로 형성되었고, 그로 인해 대중이 요구하는 서비스의 눈높이도 전반적으로 낮게 형성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무릇, 불편함을 못참고 개선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있어야 편의 수준이 올라 가는 법이다.

갓난아기도 울어야 잘못된 자세를 고쳐주고, 똥 싼 기저귀를 갈아준다.

식당에서 음식을 먹고, 짜다 시다 말을 해줘야 맛 없는 줄 알고 개선을 하던가 식당 때려치든가 한다.

불편함을 감수하는 게 일상이기 때문에 발전이 없다.

대상 가리지 않고 통신사의 모든 가입자에게 <당신의 번호가 사용정지 될 예정입니다> 라는 메시지를 보냈다?

한국 같았으면 벌써 통신사 고객 불만 접수처가 난리가 나고, 뉴스가 떴을 것이다.

하지만, 인니는 괜찮다.

애초에 고객 불만 접수처라는 곳이 없는 기업이 대부분이고, 있더라도 찾기 힘들 뿐더러, 찾아서 불만을 접수하려 해도 접수처 직원이 전화 대충 받고 고객이 화내면 뚝 끊어 버린다. (실제로 겪은 적 있다. ㅋㅋ)

잘못 해도 큰 탈이 없으니, 고객을 상대하는 서비스 시스템을 고객 입장이 아니라 만드는 사람 관점으로 구성하는 것이다.

잘못한다는 소리를 못들으니, 잘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리가 없다.


불명확한 공지 문자 한 통에 나는 나대로 개삽질을 했고, 애꿎은 상담 직원 뒷다마가 까였고, 인니 고객 응대 마인드의 후진성이 성토 당했다.

뭐 반은 울분풀이로 썼지만, 그 덕에 전부터 한 번 정리하고 싶었던 내용이 어느 정도 풀려 나온 거 같다.

당연하지만, 지극히 개인적인 시각에서 본 것만 가지고 때려 맞춘 내용이기 때문에, 사실과 다를 수 있다.

대부분이라는 표현이 자주 등장했지만, 내가 본 중에 대부분일 뿐이고, 전체로 보면 오히려 극소수일 수도 있다.

알아서 가려 읽고, 걸러 받아들이시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