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한당 명랑쾌활

단상

어느 70세 노인의 친일, 반공, 데모, 그리고 박정희에 대한 가치관

명랑쾌활 2017. 4. 27. 10:51

어느 70세 노인이 있다.


그는 일본 강점기에서 해방된 다음 해 태어났다.

그의 나이 5살 때 발발한 625 전쟁은 8살이 되던 해 끝났다.

나라는 잿더미가 됐고, 미국의 원조품으로 끼니를 연명하던 시절이었다.

친일 문제는 반공 사상으로 덮였고, 빨갱이로 몰리면 곧 죽음이던 시절이었다.

어쩌면 그게 그에게는 다행일 수도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일본 강점기 시절, 일본인이 소유한 정미소에서 일하던 솜씨 좋기로 유명한 기술자였고, 해방 이후 정미소 주인인 일본인이 그의 아버지가 아니면 정미소 기계 다룰 사람이 없다면서 정미소를 그의 아버지에게 넘기고 갔다.

그 시절이 그랬다.

일본 강점기를 지나 해방 때까지 살아 남은 조선인들은 소수의 독립운동가와 소수의 반민족 매국친일파를 제외한 대부분이 소극적 일본 부역자였다.

반공 혈풍이 없었다면, 조금이라도 덜 친일한 조선인이 조금이라도 더 친일해서 뭐라도 좀 쥐고 있는 조선인을 치도곤 냈을 거다.


그가 중학교 3학년이 되던 해, 박정희가 쿠테타를 일으켰다.

그리고 그가 고등학교 2학년이 되던 해, 박정희는 대통령이 된다.

그는 대학교에 가고 싶었지만, 가정 형편 때문에 포기해야 했다.

일본인이 그의 아버지에게 줬다는 정미소는, 기생놀음과 노름에 빠진 그의 아버지가 기계 부품을 하나 둘씩 빼다 팔아 탕진하다 결국 다른 사람 손에 넘어갔고, 유일하게 남은 구멍가게로는 8남매 가족을 먹여 살리기도 힘들었다.

그가 서울에 올라가 양복점에서 일하며 기술을 배우던 때 김신조 사건이 터졌고, 북한에 대한 공포와 반공 기치는 더더욱 높아졌다.
박정희에 대한 반대 시위는 학생과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점점 격화됐지만, 그는 학생이 아니었고 지식 운운하기에는 생계가 버거웠다.
그가 27살이 되던 해, 박정희는 드디어 유신헌법을 공표하고, 그 악명높은 긴급조치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그의 아버지가 일본 강점기 때 그랬듯, 그 역시 독재정부의 압제에 숨 죽이고 따를 수 밖에 없는 소시민이었다.
박정희가 경제를 살리겠다 장려한 사업 중 봉재업은 낮은 임금과 열악한 환경, 장시간 노동 착취로 해외 경쟁력이 있었다.
그는 양복점에서 솜씨를 인정 받아 꽤 쏠쏠하게 돈을 벌 수 있었던 것도 박정희 덕분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정부를 반대한답시고 풍파를 일으키는 사람들이 미웠다.

친일 부역자에 대해 둔감하고, 반공에 민감하다.
미국을 생명의 은인이라 생각하고, 북한을 원수라 생각한다.
박정희 독재를 긍정적으로 보고, 모든 종류의 정부 반대 시위를 부정적으로 본다.
한국의 소위 보수라고 하는 노인들의 사고방식은 그들이 살아온 시절을 보면 이해할 수 있다.
그들에게 그 사고방식을 바꾸라는 것은, 그들의 삶이 틀렸고 비겁했다는 걸 인정하라는 소리다.
그래서 그들에게 박정희는 신이고, 반공 이념은 종교 교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