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한당 명랑쾌활

여행기?/인도네시아

[Manado는 섬 이름이 아니다] 3. 섬 안의 섬에 고립, 탈출, 실패, 타협

명랑쾌활 2012. 5. 15. 10:16

내가 묵었던 파노라마 코티지의 위치.

도대체 왜 난...

 


아직까지도 앞으로 무슨 일이 닥칠지 몰랐던 나는 이 해먹을 보는 순간 입이 찢어져라 기뻤다.

해변에서 유유자적할 땐 역시 해먹이다. +_+

그것도 밑으로 이런 풍경이 펼쳐져 있는 곳이라면 더욱 환상적이다.

 

모기장이 쳐져 있는 침대와 그 옆의 보조침대

침대 인심이 후하긴 한데... 어라, 마루의 틈이 제법 넓다.

 

샤워하고 난 다음의 땟물...이 아니라 그냥 저런 물이 나온다.

그리고 짭짤한 정도가 아니라, 그냥 짠 물이다.

그나마 타일이라도 깔려있고, 비록 바가지로 퍼부어 물을 내려야 하지만 그래도 좌식 형상의 변기라도 있다면 양호한 거다.

 

자정에 출발해서 비행기 타고 차 타고 배 타고 숙소에 도착한 시간이 12시, 피곤할 만도 하다.

정수나 체로 거르는 따위의 인공적 가공 없는 청정(?) 바닷물로 해수 샤워를 산뜻이 마치고, 생각할 것도 없이 해먹에 몸을 던져, 선선한 바닷바람과 파도소리를 들으며 낮잠을 마구 즐겼다.

그 좋은 바다를 놔두고 어떻게 낮잠을 잘 수 있냐고?

시끄럽다.

산이 거기에 있는 의미가 꼭 등산하라는 것은 아니지 않능가?

 

이정도면 제대로 바다를 즐기는 거 아닐까?

좋다... 딱 이것만 좋다.

거짓말쟁이 스탭 아가씨가 밥 먹으라고 부르는 소리에 깨어보니 어느새 깜깜하다.

아주 제대로 깜깜하다.

저멀리 보이는 불빛이 부나켄섬 동쪽의 번화한 곳인가 싶다. (나중에 알고보니 마나도 뭍이었다.)

 

저녁 식사는 밥과 내가 싫어라~ 하는 브로콜리와 각종 야채 볶음이었다.

코티지에 묵는 사람은 다 모여 한 소쿠리의 밥을 각자의 접시에 퍼 담고, 반찬 역시 각자 먹을 만큼 담는다.

나 말고는 다 양넘들이다.

동양인 체면에 골라 먹기도 그래서 시장을 반찬 삼아 대충 퍼넣고 내 방으로 왔다.

아직은 끕끕한 해변 특유의 습기에 선풍기 바람이 들지 않는 모기장 안에 들어가기 싫다.

옆의 보조침대에서 글도 좀 끄적거리고 음악도 듣고 하다 보니 적당히 졸음이 몰려온다.

모기장 안으로 들어갔는데 이게 왠걸, 매트리에 모래가 버석거린다.

게다가 바닷물에 젖었다 마른듯 끈적한 느낌도 든다.

청소를 전혀 하지 않은 것이다!

예전에 브로모 화산 갔을 때 묵었던 최악의 숙소가 오버랩된다.

도저히 몸을 누일 엄두가 나지 않는다.

이미 시간이 늦기도 했고, 다른 방이라고 상황이 다를리 없을 것 같았다.

어차피 모기향도 피워뒀겠다, 그냥 보조침대에서 자기로 했다.

 

...그러나 난 밤새도록 벌레들이 주변에 바스락 바스락 지나다니는 소리에 흠칫흠칫 놀라며 잠을 설쳐야 했다.

게다가 아직은 깜깜한 새벽 무렵부터 쏟아지기 시작한 비의 습기까지 괴로움을 더했다.

어지간하면 설핏 깨어도 눈은 잘 안뜨는 편인데, 여기저기 들려오는 요상한 소리가 신경쓰여 일어나 앉기까지 해야 했다.

그리고, 자고 있던 보조침대에 잇닿아 있던 벽에, 내 몸으로부터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붙어있던, 손바닥보다 좀 더 큰 도마뱀의 초롱초롱한 눈망울과 마주쳤으나... 그냥 다시 누워서 잤다.

제법 크긴 하지만 내 눈알을 파먹을 수 있을 정도로는 크지 않아 보였다.

 

그렇게 꾸역꾸역 잠을 자며 밤새도록 되뇌었다.

내일 날이 밝으면 미련없이 다른 숙소로 옮기리라...

다시 얼마쯤 잠들었을까, 왠지 심상치 않은 존재감이 느껴지는 곤충 날아다니는 소리에 잠이 깼다.

그토록 기다리던 날이 밝았다.

 

내 잠을 깨워준 내추럴 알람, 손바닥만한 메뚜기과 괴곤충.

기억엔 없지만 내 몸뚱아리에도 몇 번 앉지 않았을까 싶다...

 


밖으로 나서니 제대로 흐린 날씨의 진면목을 보여준다.

흐리건 말건 개뿔, 난 여길 나갈 거다.

 

아침 식사라고 나온건 대충 구워 일부는 차가운 토스트 빵에 튀겨서 익힌 계란 후라이 하나가 다였다.

뭐 어떠랴, 이제 옮긴건데.

끼니를 떼우자 마자 (그렇다! 이런 것이 바로 끼니를 떼운다는 표현이 적절한 거다!) 더 생각할 것도 없이 다른 숙소를 찾아본다.

멀리 갈 것도 없다.

 

바로 옆에 훨씬 고급인 숙소가 붙어있다.

숙소 이름은 까먹었다. 아니, 기억하고 싶지도 않다.

 

이 방의 가격은 50만 루피아, 대략 6만원 정도다.

숙소는 그럭저럭 괜찮은 편이지만 50만 루피아의 값어치를 한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언젠가 아는 사장님이 말했었다.

빈부의 격차를 가장 극명하게 느낄 수 있는 것이 세 가지 있다고.

숙박업소, 비행기 좌석, 그리고 차량.

전적으로 동감한다.

그 돈을 지불할 수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다.

그만큼의 값어치가 되지 않는다며, 지불할 수 있음에도 하지 않는 것은 여유의 문제다.

가령 200원짜리 생수를 천원에 사먹는 정도는 그냥 혀 한 번 차고 대수롭지 않게 사먹는다.

요컨데 난 800원은 우습게 볼 정도의 경제적 대범함이 있지만, 4만원은 그렇지 못하다는 거다.

하지만 그로 인해 비관하거나 억울해하지 않는 것 보면 나름 건강하게 잘 컸나보다.

참치라면 일가견있는 일본인이 한국의 무제한 참치집 참치 먹어보고는 이런건 일본에서는 국거리로 밖에 못쓴다며 못 먹겠다고 하건 말건, 난 그 참치가 너무 맛있으면 그걸로 된거 아닐까?

한 끼에 몇 십만원 짜리 식사를 한다고 몇 백 그릇 먹을 수 있는거 아니고, 하룻밤에 몇 백만원 짜리 호텔방에서 자봐야 어차피 몇 백 시간 잘 거 아니다.

 

또 다른 숙소를 찾아 부나켄 섬에서도 번화한 동쪽으로 가기로 했다.

그런데 어째 길이 안보인다.

비싼(?) 숙소 스탭에게 길을 물어보니 울타리를 가리킨다.

 

오른편에 높은 기둥에 대나무가 낮게 가로지른 것이 비싼 숙소의 울타리다.

즉, 따로 문이 없다는 얘기다.

사진을 보다시피 길의 풀을 보니 어째 사람들이 자주 지나다니지 않는 듯하다.

 

그나마 울타리 중 낮은 이 부분으로 출입하나 보다.

 

얼마 가지도 않았는데 왠지 이건 좀 아니다 싶은 분위기다.

가면 갈수록 그 생각은 점점 짙어진다.

새벽녘에 내린 비로 가뜩이나 진창이다.

그나마 길이라고 할 만한 곳이 나왔다.

오토바이 지나간 자국도 있는 거 보니 길은 맞는 모양이다.

그러나 이건 슬리퍼로는 도저히 걸어 다닐 수 없는 진창길이다.

거기에 간 따위는 보지 않고 착륙과 동시에 침을 꼽아대는 호쾌한 산모기들이 습격해오기 시작한다.

군대 시절 격오지에서 짬구덩이 팔 때 습격 받았던 이후로 참 오랜만의 재회였다.

녀석들의 열렬한 환영에 밀림 횡단은 포기해야 했다.

뻘짓만 하고 숙소로 돌아오니 벌써 9시다.

에라... 스노클링이나 하자.

 

해변에 가보니 산소통에 공기 채우는 모터실이 있다.

스노클링 장비 빌리는데, 다른 장비는 다 양호한데 구명조끼가 제대로 된 것이 없다.

하긴, 대부분 스쿠버 다이빙 하는 사람들이니 구명조끼가 필요 없겠지.

게다가 지금은 파도가 심해서 바다도 흐리고 별로 볼 것도 없댄다.

어제 오후나 오늘 아침이 좋았댄다... -_-;

날씨 봐서 오후에 하기로 하고 포기하고 숙소로 돌아와 책이나 읽었다.

 

브로콜리 못먹어서 뒈진 귀신이 들린 숙소의 오늘 반찬도 브로콜리 볶음, 짭짜이 Capcai 요리가 또 나왔다.

가뜩이나 생선도 별로 안좋아하는데... 이건 먹을만 헀다.

분명 시장에서 사온 것이 아니다.

어디선가 잡아다 요리한 거다.

...어쨌거나... 이건 아니지 싶다.

 

거짓말쟁이 스탭 아가씨에게 배편을 물어보니 일요일은 쉰댄다.

마나도 지역은 기독교인들이 많아서 그런 모양이다.

아... 이런 염병할... ㅠ_ㅠ

뭔가 다른 방법은 없냐, 숙소에 벌레가 너무 많아서 도저히 잘 수가 없다고 하니, 어제 다 찼다던 새로 지은 건물의 방의 사람들이 체크아웃했다고 한다.

배편이 없는데 어떻게 체크아웃 했냐고?

스쿠버 다이빙 하러 온 사람들인데 아예 짐 싸서 나가서 스쿠버 다이빙 하고 뭍으로 나간댄다.

결국 스쿠버 다이빙할 스피드 보트는 있어도, 뭍으로 데려다 줄 퍼블릭 보트는 없다는 소리다.

 

그나마 상태가 좋다.

방을 옮기기로 했다.

그러나 여긴 콘센트는 있는데 전기가 안통한다.

화장실도 그럭저럭 괜찮다.

옆방은 콘센트가 살아있었다.

이 방에 묵기로 했다.

하루면 된다, 하루!

 

오후가 되니 날씨가 더 심상치 않다.

왠지 파도소리도 크게 들린다.

모래가 푹푹 꺼지는 출입구 계단을 가보니...

헐....

이거 말로만 듣던 고립...?

뚫고 지나갈 만한 파도가 아니다.

뒷 밀림길로 가지 않는 이상 유일한 길인 해변길이 막힌 것이다.

꼼짝없이 고립이다.

어제 섬에 도착했을 때눈 아무 생각 없었는데, 그 때가 날씨가 정말 좋았던 것이다.

그 좋은 타이밍에 낮잠을 늘어지게 잤다니... ㅠ_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