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한당 명랑쾌활

단상

대기업 횡포가 그렇게 심하다는데 왜 하청을 하고 싶어할까?

명랑쾌활 2020. 5. 15. 10:13


대기업의 하청 쥐어짜기 갑질 횡포는 대한민국 성인이라면 거의 상식처럼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중소기업 '사장'이 대기업 하청 오더 따려고 그렇게 노력하는 이유가 뭘까요?

'한국의 산업 구조가 워낙 대기업 중심이라 어쩔 수 없다'는 건 일부 맞는 부분도 있지만 부족한 답입니다. 어쩔 수 없으면 아예 안하고 말지, 언론에 나오는 거 보면 쥐어짜여 죽겠다고 하는데 아등바등 할 이유가 없습니다. 뭔가 득이 있으니까 하려고 한다고 보는 게 자연스럽습니다.


일단 대기업의 하청 쥐어짜기에 대해 말씀 드리자면, 100% 사실입니다. 국제 원자재 가격이 상승을 하든 인건비가 오르든 매년 정기적으로 '무조건' 단가 인하 협의가 들어오는데, 정말 기가 막히게 잘 쥐어짭니다. 하청사 제품의 원자재 단가 10원 단위까지 정확하게 꿰고 있으니 그럴 수 밖에요.

게다가 하청 중소기업 직원 수나 인건비, 관리비 규모는 거기서 거기입니다. 두어 군데 알면, 나머지 오십 군데, 백 군데도 어떤지 뻔히 알 수 있습니다. 거기에 대기업의 조직 정보력까지 더하면 단순히 납품 단가 정도가 아니라, 대기업은 중소기업 재무구조까지 손바닥 들여다 보듯 훤히 알고 있다는 뜻이 됩니다.

대기업 후려치기 때문에 중소기업 죽어난다는 하소연은 흔하디 흔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기가 막히게 잘' 쥐어 짠다는 말에 함정이 있습니다. 쥐어짤 수 있는 최대한을 쥐어 짠다는 의미로 착각하기 쉽습니다만, 사실은 '중소기업 사장의 수입'은 건드리지 않는 선을 기가 막히게 잘 파악해서 딱 거기까지만 후려친다는 뜻입니다.

후려 맞은 만큼은 그 중소기업의 직원들과 그 밑의 2, 3차 재하청 기업들이 골고루 분산해서 짊어지면 됩니다. 좀 심하게 후려 맞았으면 귀책의 의미로 임원들 법인 카드 사용 허가액을 낮추면 되고요. 대기업은 쥐어짜기를 하더라도 '사장이 가져가는 몫'은 보장해준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쥐어짜인 중소기업이 다시 하부 하청 쥐어짜는 건 더 무자비해서, 사장 몫이고 뭐고 신경 안씁니다.  3, 4차 하청 중소기업 사장이 사업 안풀리면 집에 생활비 못갖다 줘서 카드 당겨 쓰는 게 다른 이유가 아닙니다. 대기업은 최소한 그러진 않는다는 게 장점인 셈이지요.

'사장이 가져가는 몫'에 대해서는 밑에 다시 더 설명하겠습니다.


대기업 하청을 하려는 또 하나의 이유는 결제 때문입니다. 

흔히들 사업 망하는 원인이 동종 업계와의 경쟁에서 도태되거나, 제품이 안팔려서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안정적으로 팔 수 있기 때문에 대기업에 납품하기를 원하는 거라고 생각하지요. 하지만, 그런 건 음식점 같은 소매업을 보는 관점으로 기업을 보는 생각입니다. 

제조업은 아무나 뛰어들 수 있는 분야가 아닙니다. 맛있는 음식 싸게 만들어서 일단 내놓으면 손님들이 사먹는 음식점과 달리, 회사 대 회사의 거래에서는 싸고 좋은 물건이라도 선뜻 구매하고 그러지 않습니다. 가뜩이나 설립 비용도 만만치 않은데, 팔 곳도 없이 무작정 개업하고 나중에 경쟁하면 된다는 식으로 할 수 없습니다.

제조업 사업을 시작하기로 결정했다는 건 이미 기술과 판로가 어느 정도 확보되었다는 뜻입니다. 그 판로를 기반으로 회사를 유지하며, 영업을 통해 새로운 판로를 차근차근 넓혀가는 겁니다. 그렇게 확보된 판로가 있는데도 망하는 이유는 대부분 결제를 제때 못받아서 입니다.

한국 기업판에는 대금 결제 기한을 길게 늘어뜨리는 아주 고약한 관행이 있습니다. 물론 다른 나라들도 그렇긴 하지만, 한국은 유독 심해요. 아무리 빨라도 1개월 뒤 결제, 보통은 2개월이지만 3개월 결제 조건인 회사도 드물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1월 15일에 납품한 제품 대금은 1개월 결제 조건이면 2월 말, 2개월이면 3월 말, 3개월이면 4월 말에 결제를 받게 됩니다. 3개월 결제 조건이면 물건 납품하고서 그 대금을 무려 100여 일 후에나 받는다는 뜻이지요. 100일이면 한 분기예요.

사장 포함해서 2~3명 규모의 작은 기업이라도 한 달 매출은 최소 5천만원 정도는 되어야 기업 유지하는 의미가 있는데, 3개월 결제 조건이면 2억이 묶이게 된다는 거지요. 사업장, 기계 설비 차리는데 들어가는 돈 빼고도 생돈 2억이 더 든다는 얘기예요. 그런데 만약 원청이 이런저런 핑계를 들어 결제일 한두 달 미루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한 달 미루면 5천이, 두 달 미루면 1억이 더 들어가는 겁니다. 사장이 월 3~5백만원 겨우 가져가는 소규모 기업에는 치명적인 액수입니다.

사업하는 사람들이 은행빚이나 사채를 쓰고, 일가친척 돈 빌려 넣는 이유가 그겁니다. 그러다가 돈 융통이 도저히 안되면 망하는 겁니다. 결제 못받은 돈 계산하면 분명히 흑자인데 망하는 거지요. 사업 망하는 기업들 대부분이 이런 '흑자 도산'으로 망합니다. 게으르거나 생각이 짧아서, 혹은 물건이 안좋아서 망하는 게 아니예요. 대부분 납품 대금 결제 밀려서 망합니다.

반면 대기업 하청을 하면 결제는 깔끔합니다. 지정한 결제일에 따박따박 결제해요. 심지어 결제일이 주말이면 금요일로 당겨서 하기도 합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웃기는 일이지요. 결제해야 할 금액은 물건 납품한 하청의 돈이고, 약속한 날까지 결제하는 건 당연한 일이잖아요. 남의 돈 약속 지켜 돌려 주는 게 당연한 게 아니라, 대단한 장점 취급을 받는 게 정상은 아니지요. 한국의 사업판이 워낙 더럽다보니, 별 게 다 장점입니다. 뭐 어쨌든 대기업 하청을 하면 최소한 자금줄 막히는 일은 드물게 됩니다. 이익은 적지만 안정적이라는 건데, 사업에서 '안정성'은 엄청난 장점입니다.


쥐어짜지만 사장 이익은 보장해 준다는 점과 결제는 안정적으로 따박따박 해준다는 점, 이 두 가지 만으로는 대기업 하청을 하고 싶어하는 이유로는 부족합니다. 공장 하나 세우고 운영하는데 최소한 몇십억이 드는데, 그 돈 들여 뭐하러 리스크 짊어지고 대기업 개노릇을 하겠어요. 돈 벌려고 사업하는 거고, 돈을 많이 벌 수 있기 때문에 대기업 하청을 잡으려 하는 겁니다. 앞에 하청 기가 막히게 잘 쥐어짠다고 했는데,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니까 얼핏 앞뒤가 안맞는 거 같지요? 아닙니다. 대기업에 납품해서 버는 이익으로 돈 버는 게 아닙니다. 그리고, 기업이 아니라 '사장'이 돈을 많이 버는 겁니다.

최대한 좋은 물건을 최대한 싸게 만들어서 최대한 비싸게 팔아 돈을 번다 -> 번 돈의 일부는 기술 개발에 투자하여 경쟁력을 높여 기업을 성장시킨다 -> 회사가 성장하면 사장의 재산도 늘어난다. 대부분 이렇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원청이 원가 뻔히 알고 있기 때문에 비싸게 팔 수가 없고, 회사가 성장해도 회삿돈은 사장 돈이 아닙니다. 사장이 회사 주식 100% 소유하고 있어도 회삿돈 맘대로 쓰면 횡령입니다. 주식회사는 '법인', 즉 법의 틀 안에서 마치 사람인 것처럼 독립적으로 존재한다고 인정하는 개체 단위이기 때문에, 최대 주주라 하더라도 법인의 소유자일 뿐 '법인의 돈은 독립적 개체인 법인의 것'입니다.
사장이 '공식적으로' 받는 돈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그 돈 아껴 한 푼 두 푼 모아서 부자 되는 거 아닙니다. 사장의 공식적 수입은 그저 사장이 생활하고 품위 유지하는 데 쓰이고, 그 정도로 대부분 소진됩니다. 사장의 재산을 만드는 건 '비공식적인' 돈입니다. 큰 회사 굴리다 보면 비자금 나올 구멍은 많습니다. 세무 관청에서도 뻔히 알고 있는데, 뒤집어 까기 애매한 구멍들도 흔합니다. 해외 공장이라도 세워 돈이 해외로 들락날락 하면 더 쉬워집니다.
제가 다녔던 회사도 회계에 안잡히는 돈이 한 달에 1억원 정도가 쌓이더군요. 한국 본사 빼고, 인니 회사만요. 한국 본사도 그 정도라고 치면, 회계에 안잡히는 돈이, 그것도 현찰로 한 달에 최소 2억씩 생긴다는 얘깁니다.
이 돈은 어디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돈이 아니라, 원래 회사 이익이어야 할 돈인데 사장 개인 소유로 옮겨 간 겁니다. 이 글 앞부분에 언급한 대기업이 쥐어짜더라도 사장 가져가는 몫은 보장한다는 그 '사장 몫'이 바로 이 부분을 뜻하는 겁니다. 대기업도 뻔히 알지만 거기까지 건드리면서 단가 인하를 압박하지는 않는다는 거지요. 물론 중소기업 사장도 그 돈 혼자 다 먹지 않는 건 당연하고요.


비자금 외에 남의 돈으로 땅장사하는 마법도 있습니다.

은행 대출과 부동산 투기를 이용하는 겁니다.

금융권에서 대기업 1차 하청은 벼슬이나 다름 없습니다. (대기업은 왕) 제발 자기네 은행 대출 좀 받으시라고 영업을 할 정도니 금리도 당연히 특별 대우겠지요.

실제로, 제가 다녔던 회사 공장 신축 진행 시에도 부지 구매부터 공사까지 모든 비용을 은행 대출로 조달했습니다. 그리고, 매월 이자와 원금 납부는 회사 이익에서 부담했고요. (그만큼 이익이 빠지는 게 당연한데, 실적 떨어졌다고 욕 먹는 건 덤입니다.) 3년 뒤, 회사는 대출금을 모두 상환하고, 땅값이 더 싼 시골에 다시 공장을 신축해서 이전했습니다. 기존 공장은 들어간 비용의 3배 가격으로 매각되었고, 차익의 대부분은 사장의 주머니로 들어갔습니다. 사장은 그럴 자격 있습니다. 부동산 시세 차익은 직원들의 노력과 헌신과는 상관 없으니까요.

개인이 땅을 사서 공장을 지어 팔았다면, 그 게 그렇게 쉬웠을까요? 인니 정부도 바보는 아닙니다. 부동산 투기를 제한하려는 정책은 한국 못지 않아요. 심지어 인니는 토지의 사용권만 인정하고, 소유권은 불허하는 법률까지 있습니다. 기업 투자니까 수월하게 진행할 수 있는 겁니다.

한국 본사도 처음 사업 시작해서 지금의 규모가 되기까지 공장을 몇 번을 옮겼다고 합니다.



중소기업 사자이 대기업 하청을 하고 싶어하는 이유는 돈을 벌기 위해서입니다. 하지만, 돈을 버느 건 사업을 해서가 아닙니다. 사업은 표면적으로는 손실 안보고 그냥 유지만 되면 됩니다. 정작 사장 돈은 그 외의 다른 쪽에서 버는 겁니다.

대기업의 단가 후려치기 관행이 여러모로 좋은 점이 있습니다.

대기업 구매 담당 직원은 단가 깎았다고 실적 올려서 좋습니다. 하청 기업은 직원들과 재하청 쥐어짤 좋은 핑계지요. 사장 가져가는 돈이 '표면적으로는' 얼마 안되니, 직원들 급여 짜게 주는 좋은 명분이 됩니다. '사장이 솔선해서 희생하며 고통을 감내하니, 직원들도 동참하자'는 아름다운 그림이잖아요. 그런 구조의 내막을 아는, 소위 사장의 심복 간부들도 거기에 동참해 일선 직원들에게 '자기도 월급 차이 얼마 안난다'면서 어르고 달래는 거고요. (이 부분은 나중에 따로 다뤄보겠습니다.)

중소기업 죽는 소리 언론에 자주 나오는데, 사장, 간부, 일반 직원을 잘 구분해야 합니다. 월급쟁이가 사장 불쌍하다고 하는 건 웃기는 일입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기업은 대기업 1차 하청을 말하는 겁니다. 사실 대기업 1차 하청 정도 되면 중소기업이 아니라 중견 기업이죠. 하고 싶다고 해서 아무나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요.

2차 하청만 되어도 형편 수준이 뚝 떨어지고, 3~4차 하청은 파리 목숨입니다. 3~4차 하청 사장의 죽는 소리는 정말 죽는 소리 맞습니다. 그야말로 먹고 살자고 아등바등 하는 겁니다.

누가 재재하청 하겠다고 하면 말리고 싶네요. 호황이 아니라면 절대 돈 벌 수 있는 구조가 아니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