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한당 명랑쾌활

Indonesia/서식기 III

딱 한 박자 느린 판단

명랑쾌활 2017. 11. 23. 11:13

지금이야 절대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만, 인니 생활 초기에는 인니인들이 좀 멍청해 보였어요.

차와 오토바이가 많은 도로를 건널까 말까 건널까 말까 살피다가 막상 사고 나기 딱 좋은 타이밍에 툭 튀어 나오질 않나 (인니는 거의 대부분 무단횡단임), 앞 차량 추월할까 말까 살피다가 아슬아슬 위험한 타이밍에 추월하질 않나.


지금은 이해합니다.

여러 정보를 취합해 신속하게 결정 내리는 게 익숙하지 않은 겁니다. 그래서 판단이 한 박자 느린 것 같아요.

그것도 되게 느린 것도 아니고, 0.1-0.2초 정도요.

아주 촉박한 상황에 처하면 생각이 완전히 멈춰 버리는 경우도 봤어요.

(그 상태를 인니어로 그로기 grogi 라고 합니다. 네, 권투에서 말하는 그 그로기 맞아요.)

직원 채용 인터뷰를 진행하는데, 가뜩이나 잔뜩 긴장한 것으로 보이는 지원자에게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 몇 가지를 연거퍼 던졌는데 그런 일이 벌어졌던 적도 있습니다.

손까지 벌벌 떨더군요.


그러다 보니, 서둘러 어디를 가려고 급히 달리는 오토바이는 뒈질라고 환장할 짓도 많이 합니다.

빠른 상황 판단력은 없는데 고속으로 달리니 오죽하겠어요.

반대차선으로 마주오는 차량이 브레이크를 밟지 않으면 꼼짝없이 정면 충돌할 타이밍에 중앙선 넘어 추월하는 오토바이는 매일 출퇴근길에 대여섯번은 봅니다.

자기 딴에는 가능할 거 같아서 그러는 거 아닙니다.

워낙 생각이 느려서, 타이밍을 살피면서 '이번은 위험하니까 속력 줄이고 자기 차선으로 들어가야 하겠군'이라는 판단을 내릴 때 쯤이면 이미 그렇게 하기 어려운 지점까지 오토바이가 나아간 상태라, 어쩔 수 없게 된 거죠.

마주오는 차량이 속력을 줄여 간발의 차이로 빠져나간 오토바이는 이미 아드레날린이 잔뜩 분비된 상태이기 때문에 또 그 지랄을 합니다.


재미있는 건, 워낙 그런 오토바이들이 많다 보니, 자동차들이 알아서 방어운전을 한다는 겁니다.

결국, 오토바이의 무모한 주행이 그렇게 무모하지는 않은 상황이 되는 거죠.

한 박자 느린 판단을 하는 사람이 다수가 되면, 거기에 맞게 전체 상황이 바뀐다는 건 흥미로운 일입니다.

지역마다 관습과 규칙이 다른 이유 중 하나가 이런 요인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