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서 일을 하든 일 잘한다는 칭찬을 듣고, 다음에 다시 오라는 소리 듣는 게 '제대로 일한 것'이라는 자부심이라고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 소리 듣고자 좀더 열심히 했다.
그런 소리 못들으면 부끄러움을 느꼈었다.
일을 잘한다는 평판이 곧 바람직한 인간이고, 열심히 일하는 게 삶의 의의라고, 국가와 사회가 내게 주입시킨 노동윤리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내 빈약한 자존감 때문이었을까?
그들에게 내 존재를 인식시킴으로서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싶었던 걸까.
지금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못한다는소리도, 잘한다는 소리도 듣지 않고, '딱히 별 문제 없는' 정도만 한다.
오늘부터 내가 직장에 보이지 않아도 별 감흥 없고, 나에 대해 별 기억도 없는 정도가 딱 좋다.
그런 건 의미가 없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들의 기억에 남는 것도 그들의 삶이나 내 존재 의의와는 별 상관없다.
그런 게 있든 없든 나는 나로 존재한다.
그저 자의식 과잉이다.
별 쓸모 없고, 필요 없으면 속절없이 잊혀질 만남이다.
못한다는 소리도, 잘한다는 소리도 안듣는 정도가 딱이다.
누군가가 인식하지 못했다는 건, 별 문제가 없었다는 얘기다.
상대가 필요로 한 바를 제공했고,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약속대로 받았다.
그걸로 충분하다.
노가다 잡부로 일했으면 노가다 잡부로 인식되는 거고, 치킨집 배달부로 일했으면 치킨집 배달부로 기억에 남는 거다.
부지런했던 노가다 잡부, 뭔가 유식했던 치킨집 배달부로 기억에 남는다는 게 뭐 그리 큰 의미가 있을까?
자신이 그저 그런, 널리고 널린 별 거 아닌 사람임을 인정한다고 해서 딱히 문제가 될 건 없다.
틀린 말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내 존재가 부정 당하는 것도 아니다.
남들 인정 받으면 좋은 점도 있기야 하겠지만, 그게 확실한 것도 아니다.
미래의 불확실한 보상을 확실한 것처럼 믿고, 현재의 희생을 감수하는 거룩한 짓은 종교로도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