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여행입니다.
새 회사 들어가서 세팅하느라 바빴고, 얼마 지나 르바란 휴가로 한국 갔다 온 걸로 여행 갈증을 푼지 두어 달이 지나니, 이제 또 집 떠나 고생질 한 번 해야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마침 Idul Adha (희생절)이 월요일인 연휴가 여행의 당위성을 주장하더군요.
그런데, 확실히 나이 먹긴 먹었나 봅니다.
혼자 떠나려니 당최 의욕이 생기질 않습니다.
낯선 곳의 불편함과 설레임도 이제 느낄만큼 느껴봐서 새롭지 않고, 그냥 집에서 뒹굴거릴 때의 편안함과 금전 절약의 이점이 더 매력적으로 느껴집니다.
차라리 누군가와 같이 간다면 책임감과 의무감이 동기부여라도 될텐데 말이죠.
그래도 갔다 오면 또 의욕 충전 되고 마음이 밝아질 것을 아니 꾸역꾸역 비행기와 숙소를 예약했습니다.
가서 좋은 게 아니라, 갔다 오면 좋다는 이유로 여행을 하는 것도 뭐 나쁘진 않겠죠.
여행 횟수가 늘어날수록 짐이 점점 줄어듭니다.
출발 전날 짐 싸는데, 한 20분 싸고 나니 더 이상 넣을 게 없어, 생각이 나지 않아서 그런 건가 당황했네요.
생각을 거듭거듭 해봐도 정말 다 싼 게 맞았습니다.
2박3일 일정이 이렇고, 1박 늘어난다 해도 티셔츠 두 벌 더 늘어나는 게 고작일테니, 이제 배낭여행 짐이래봐야 배낭 한 개도 다 안차겠네요.
3박4일 일정 이상의 여행은 어차피 도중에 빨아서 입을테니까요.
이번 여행지는 롬복 남동부 꼬리 부분은 에까스 Ekas 지역이다.
꼬리는 다시 동서 두 지역으로 나눠, 서쪽은 에까스 Ekas, 동쪽은 순웃 Sunut 이라고 불린다.
예전에 남부 꾸따 Kuta 여행 때 남부지역 풍광이 인상 깊었던 만큼 남서부와 남동부 지역도 궁금했는데, 남동부 에까스로 여행지를 결정한 이유는 순전히 가격은 좀 비싸지만 괜찮을 거 같은 숙소가 있어서였다.
발리 동쪽으로 누사뜽가라 Nusa Tenggara 지역은, 저개발된 곳은 고생할 각오 단단히 하고 가야할 정도로 인프라가 뒤떨어져 있다.
젊어서 사서 고생하려 여행하는 게 아닌 이상, 숙소는 여행지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다.
관광 인프라가 어느 정도 갖춰졌다는 기준은, 내 경우엔 시원한 맥주를 파는 곳이 있느냐다.
인도네시아는 발리를 제외하고는 거의 대부분 이슬람 지역이라 주류를 취급하지 않는 게 일반적이다.
그런 만큼, 맥주를 판다는 건 자기들과 문화가 다른 외지인을 손님으로 받을 준비가 되어 있다는 뜻이 된다.
...뭐 설명은 그럴듯하게 주워다 붙였지만 간단히 말해, 저녁에 시원한 맥주 들이키지 못할 거면 여행이 뭔 재미가 있겠나 생각한다. ㅋㅋ
지도를 보고 있자니, 앞으로 시간이 나는대로 롬복 남서부, 동부, 북부 등도 방문하고, 최종적으로는 롬복 전역 오토바이 여행을 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든다.
공항 건물 출구 앞에 바글바글 모여있는 내 팬들
뭐 이제는 수십명의 시선쯤은 아무렇지도 않다.
예약한 숙소에서도 픽업 서비스를 하는데 가격이 50불이다.
아무리 비싸도 그 가격 이상일 리가 없다는 확신에 공항에서 바로 찾아보기로 했다.
두리번 두리번 초짜 티 내지 말고, 흡연구역에 가서 담배 한 대 물고 나는 떡밥이다~ 놀이 하고 있으면 알아서 물러 온다. (흡연자의 정말 몇 안되는 장점이다.)
여행자만 아쉬운 게 아니다. 운송업자도 여행자가 아쉽게 마련이다.
흥정이란 게 결국 누가 더 아쉬운가 배틀하는 게 아닐까 싶다.
흡연구역에 있던 공항경비대 군인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며 교통편을 물어 봤더니, 건너편에 바글바글한 사람들 사이에 있는 운송업자들을 가리킨다.
군인에게 감사인사를 하고, 바로 흥정에 들어갔다.
...뭐 한푼도 못깎았다.
난 흥정 더럽게 못한다. ㅋㅋ
에까스 지역까지 40만 루피아에 가기로 했다.
사설 택시업자 겸 여행업자 디까 Dika (0823-3990-7324, 영어 못함)
의외로 가격표까지 떡하니 갖고 다닌다.
택시업자들 다들 갖고 다니니, 교통편을 찾는다면 저런 종이를 들고 있는 사람과 얘기하면 되겠다.
롬복의 어지간한 지역이 다 있었는데 에까스 지역만 없는 것으로 보아, 아직까지도 관광지로 그리 유명하지 않나 보다.
에까스까지 가면서 디까를 구워 삶았다.
"블로그에 글 쓰는데, 내 글 보고 당신을 찾는 사람들이 있을 수도 있다. 혹시 그런 사람이 있다면 40만 루피아는 너무 과하고, 35만 루피아만 받았으면 한다. 물론 나는 약속한 대로 40만 루피아를 지불하겠다. 하지만 35만 루피아에 팁 5만 루피아라고 생각했으면 좋겠다."
디까도 동의했다.
군인 얘기로는 30만 루피아 정도 할 거라 했으나 그건 현지인 가격일 거다.
거리 상으로 따지면 셀롱 Selong 지역과 비슷하니, 35만 루피아면 적당한 가격이라고 할 수 있다.
홍보해주겠다고 약속한 바 있으니, 디까가 얘기해 준 내용을 적는다.
1. 1일 투어 60만 루피아
- 08:00~21:00
- 기사, 기름값, 밥값 모두 포함
2. 2박3일 투어 (식사, 숙박 모두 포함)
- 숙소 별1개 : 1인 130만 루피아
- 숙소 별2개 : 1인 170만 루피아
- 숙소 별3개 : 1인 240만 루피아
- 숙소 별4개 : 1인 260만 루피아
* 10인 이상일 경우 1명 공짜
도로 사정 좋다.
국제공항이 생긴 이후로 롬복 도지사가 남부지역 관광산업 육성을 위해 인프라 확충에 많은 예산을 투자했다고 들었다.
하지만, 그 인프라라는 게 구석구석 확충됐을리는 없다.
숙소 이름을 듣고 어딘지 안다고 말했던 기사도 슬슬 불안한지, 사람들에게 길을 묻는다.
어딘지 안다는 게 아니라 숙소 이름을 들어봐서 안다는 뜻이었겠지. ㅋㅋ
이런 지역에 괜찮은 숙소가 있을 수 있나 싶을 때쯤...
숙소 간판이 보인다.
저 간판 없었으면 분명히 지나쳤을 거다.
깡시골 지역에 오아시스처럼 서양식 숙소가 있다.
도착하자 스텝들이 반갑게 맞아 준다.
아고다 평에 친절도 점수가 매우 높았었다.
총괄 메니저 헤루 Heru.
영어와 이탈리아어가 능숙한 재원이며, 작지만 카리스마가 넘치는 사람이었다.
겉모습만 보고 사람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
짐 풀고 일단 맥주부터!
어딜가나 꼭 먹어보는 나시 고렝도.
무려 7만 루피아 짜리인데, 그만큼 맛있지는 않았다.
밥은 좀 떡이 졌고, 야채는 신선했다.
롬복 지역은 아얌 딸리왕 Ayam Taliwang 이라는 닭튀김이 유명한데, 이 곳 역시 정말 맛있었다.
보기에는 그냥 맹닭을 튀긴 거 같지만 소스가 배어 있다.
재미있는 건, 딸리왕은 롬복 동쪽 숨바와 섬 Pulau Sumbawa 에 있는 지명이다.
숨바와 섬 서쪽으로, 롬복과 바다 건너 마주한 곳이다.
밥 먹는 중에 뒤편에서 종업원들이 현지어로 잡담을 하자, 매니저 헤루가 잡담은 좋은데 영어로 하라고 일침을 놓는다. ㅎㅎ
나 빼고는 손님들이 다 서양인인데, 덕분에 다들 의사소통에 불편없이 지내는 모양이다.
나야 뭐 인니어를 하니까 특이한 손님으로 특별대접을 받았다.
발리나 또바에서는 영어 못하면 좀 깔보는 기색이었는데, 여긴 아직 그런 물이 덜 든듯 하다.
서양 여행자들이 더 늘어나면 여기도 점차 변해가겠지.
영어는 돈이 되는 언어고, 돈이 되는 언어를 할 수 있다는 건 그 지역 내에서 일종의 특권이다.
꽤 험상궂은 개 한 마리가 먹을 것 달라는 눈치를 은근히 보내며 주변에 자리 잡고 앉았다.
발리와 마찬가지로 롬복은 고양이 보다 개가 많다.
예전에 이슬람 영향력이 약한 곳일 수록 개가 많다는 얘기를 했었는데, 꼭 그렇지만도 않다는 걸 알았다.
롬복 남부 지역은 이슬람 강성 지역이기 때문이다.
적도지역스러운 외부와 달리 내부는 서구 스타일이다.
화장실도 신경을 많이 쓴듯 보였다.
다만 바닥 경사면을 잘못 시공했는지 바닥에 물이 고이는 곳들이 있었다.
그래도 이 깡촌에 이 정도 수준까지 지으려고 얼마나 고생했을지, 대단하다.
에까스 브릭스는 10여년 전 롬복 여행 왔던 프랑스인 세 친구가 나중에 이 곳에 숙소를 짓고 살자고 약속했는데, 그 약속을 지킨 결실이라고 한다.
세 친구 중 두 명은 스위스에 살고 있고, 한 명은 이 곳에 살고 있다고 한다.
뭐 각오는 했지만 모든 게 다 비싸다.
주변에 아무것도 없어서, 숙소에서 모든 걸 해결해야 한다.
오토바이 렌트도 1일 10불이다. 루피아로 10만 루피아 퉁칠 수 없다. 짤없이 환율 적용해서 지불해야 한다.
그나마 1일도 12시간 기준이며, 반일은 6시간 기준 5불이다.
아마도 소유주 특별 지시사항인듯 하다.
가로등도 없는데 도로 상태도 안좋아서, 저녁 6시 이후로는 오토바이를 타고 나가는 걸 강력히 금지한다. (그래도 굳이 타고 나가겠다면야 말리진 않겠지만)
매일 저녁 무료 선셋 나들이 서비스를 해주는데, 이때 마저도 일단 숙소로 복귀해서 오토바이를 주차하고, 숙소에서 운용하는 차량으로 갔다 와야 한댄다.
그래도 아주 융통성이 없진 않은지, 이틀치 렌트비로 2박3일 동안 총 24시간 쓰는 조건은 수락했다.
(1일째 3시간, 2일째 12시간, 3일째 9시간)
흥정은 끝났는데 정작 오토바이가 없다.
일단 숙소에서 30분 기다리니 오토바이가 왔다고 부른다.
숙소에서 자체적으로 관리하는 오토바이가 아니다.
근처 마을 주민에게서 필요하면 빌려오는 거다.
스위치 스타터가 고장 나서, 발로 밟아서 시동을 걸어야 한다.
이런 게 뭔 10불이여. ㅋㅋ
에까스 지역에 왔으니 에까스 해변 Pantai Ekas 에 가봐야 하지 않겠나.
아주 옛날에 깔았던 아스팔트가 다 벗겨진듯한 비포장길을 지나야 했다.
초등학교와 중학교가 같이 있다.
고등학교에 진학하려면 꽤 먼 곳까지 통학해야 할 거다.
아마도 중학교까지만 마치는 애들이 꽤 많지 않을까 싶다.
생선 말리는 곳으로 쓰였을 것 같은 곳
완전 깡시골 어촌이다.
여행 전 구글 지도로 검색해봤을 때 이 마을에 Sunset Homestay 라는 곳이 있었다.
지금 묵고 있는 에까스 브릭스가 너무 비싸, 선셋 홈스테이에 묵을까 고민했었는데, 저어어엉말 다행이었다.
여긴 맥주 파는 카페는 커녕 냉장고 있는 가게도 없지 않은가.
해변이긴 한데, 해수욕 하는 곳이 아니라 그냥 어촌 마을이다.
마을의 다른 쪽 길로 들어가봤다.
차 한 대 겨우 지나갈 비포장길에 트럭 한 대 서 있고, 사람들이 나무를 베어 트럭에 싣고 있었다.
예전 같으면 못가는 길인가 싶어 되돌아 갔겠지만, 이젠 별 망설임도 없이 설렁설렁 간다.
오토바이 한 대 지나갈만 한 공간은 내어뒀다.
해수욕할만 한 해변이다.
사람도 없고, 먹거리 파는 곳도 없는, 그냥 해변이다.
반대편은 어촌 마을의 배들을 대놓는 해변으로 나눴나 보다.
정말 아무것도 없다...
가지런히 뿌려진 개 발자국만 덩그러니 있다.
어디를 향해 갔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