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한당 명랑쾌활

단상

유능해 보이고 싶은 본능, 그걸 포기하는 심리

명랑쾌활 2016. 2. 19. 08:52

최근 잠시동안 인터넷 쇼핑몰 물류센터에서 단기알바를 했을 때 느낀 점을 정리해 봅니다.

 

그 전에 업무가 어떻게 돌아가는가를 간단히 설명 드려야겠네요.

(서론이 좀 긴데, 귀찮으시면 스크롤 내리셔서 바로 본론으로 가시길~)

1. 팔 제품을 대량으로 받는다.

2. 받은 제품을 검수하고, 일련번호가 부여된 선반에 적재한다.

3. 인터넷 쇼핑몰을 통해 들어온 주문대로 선반에 돌아다니면서 낱개를 카트에 담는다.

4. 잘 포장해서 발송한다.

 

                                    (출처 : 모름. 대충 구글에서 퍼왔음. 기업 기밀이면 삭제 요청 하시길~)

 

뭐 별거 없습니다.

굳이 물류 관련 일을 해본 적 없어도, 산업 시스템을 알면 '중요한 부분들'은 누구나 어렵지 않게 추정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일이라는 건 '중요한 부분들'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중요하진 않지만 필요한 일들'도 잔뜩 있고, 대개의 업무상 스트레스는 그런 부분에서 발생합니다.

그런 부분은 그 일을 직접 경험해 보지 않으면 추정하기 어렵습니다.

가령 예를 들면, 진정한 군생활의 고난은 일과시간이 끝나면 시작된다던가, 전투 훈련의 힘든 부분은 마지막 고지 점령을 위해 "돌격 앞으로"를 외치며 뛰어가는 순간이 아니라 돌격할 고지까지 몇 시간이고 걸어가야 한다는 긴 시간이라던가, 유격의 지옥은 헬기 레펠이나 각종 장애물 넘기 같은 훈련 코스가 아니라 그 훈련 코스 이전과 이후 사이사이 끊임없이 굴려대는 얼차려라던가... 뭐 그런 겁니다. ㅋㅋ

 

인터넷 쇼핑몰 물류센터에서도 여러 가지 '기술이나 요령이 필요하진 않지만 반드시 해야할 일들'이 많습니다.

그 중 하나가, 제조공장에서 큰 박스포장으로 온 제품들을 주문 수량에 따라 소량씩 출하하면서 나오게 되는 폐박스나 비닐 등 쓰레기를 치우는 일입니다.

중요하지 않더라도 업무상 필요한 일이라면 시스템, 혹은 규칙이 없을 리가 없지요.

원래 규칙은, '쓰레기를 발생하게 한 사람이 회수하여, 쓰레기 집하장에 가져가 잘 정리해 쌓는다'입니다.

(100개 들이 박스에서 마지막 1개를 집는 사람이 그 박스를 치운다)

아주 심플하고 공정한 규칙이죠.

이를 위해 상품을 담는 카드에는 쓰레기를 담을 공간도 따로 있습니다.

알바로 처음 교육 받은대로 일을 하는데, 이 심플하고 공정한 규칙이 은근히 지켜지지 않고 점점 더 개판이 되어가더군요.

심한 경우는 물건 1개 꺼내려고 다른 사람이 치우지 않은 빈 박스 3개를 치우는 일까지 생겼습니다.

어차피 손발이나 부지런해야지, 머리는 주문리스트나 상품 코드 이해하는 거 말고는 쓸데도 없어서, 이 현상을 주의깊게 관찰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뭐, 짜증이 나서 그랬다는 것도 부인은 못하겠네요. ㅋㅋ

 

이 개판 현상을 유발한 원인제공자는 몇 년 동안 일해온 아줌마 직원들 (일명 여사님) 중 일부였습니다.

원래 단기 알바는 바쁜 시즌에는 잠시 쓰는 존재일 뿐이고, 평상시는 여사님들이 카트에 주문 물건 담아와 포장까지 합니다.

오랫동안 같은 일을 해서 익숙하다는 건 대단한 능력입니다. (그래서 사회에서 경력이 대접 받습니다. 요즘은 그렇지도 않지만요.)

생소한 일에 안쓰던 근육을 쓰는 어정어정 알바들이 보기에 여사님들은 정말 파다다닥 슥슥 날아 다닙니다.

그런데 그런 여사님들 중 몇 분이 (주로 성격 더러운 분들) '자기는 다른 중요한 일로 바쁘다는 듯이' 물건만 슥슥 집고 가버리더군요.

그리고, 그로 인해 남의 빈 박스 치우는 일을 당하게 된 단기 알바들 중 기분 상한 일부가 (주로 뺸질이들) 자기 빈 박스마저도 안치우기 시작하면서 상황이 점점 더 개판이 됐습니다.

안치운 사람이든 치운 사람이든 어차피 빈 박스에 당해서 기분 상하는 건 똑같고, 전체적인 분위기가 점점 험악하고 짜증스러워지는 악순환은 덤이구요.

 

전 남의 것이든 내 것이든 빈 박스 잡히면 묵묵히 치우면서, 그 개판의 상황에서 철저히 관찰자 입장을 고수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뭐 보살이라서 그런 건 아니고, 그저 제가 알바 역할이라는 걸 늘 자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도 사람인지라 남의 박스 뒤치다꺼리나 하는게 짜증 날 때도 있었지만, 어차피 상품 담는 일을 하든 박스 정리하는 일을 하든 딱히 뭐가 더 힘들거나 더러울 것도 없고, 월급 나오는 건 똑같다 생각하니 별 거 없더군요.

열심히 하면 정직원이 될 수도 있지만, 그럴 생각도 없었습니다.

따로 할 일이 예정되어 있는데 그 사이 시간이 비어서 하는 알바이기도 하고, 정직원이래봐야 근무조건이나 대우도 한심하고, 전망은 거의 없어서 딱히 끌리지도 않았거든요. (그리고 말만 정직원이지 '고용보장'도 안됩니다. 한국 노동현장의 흔하디 흔한 현실이죠.)

그래도 사람인지라 불끈 불끈 뭔가 어필을 해야 하나 싶으면서도, '아냐, 여긴 나와는 상관 없는 곳이야. 난 알바야. 저 사람들이 보기에도 난 그냥 스쳐지나가는 알바일 뿐이고.' 라고 생각하며 마음을 다스렸습니다.

(그러다 보니 오히려 착하고 성실하다는 평판을 들었습니다. ㅎㅎ;)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과연 내가 만약 이 회사와 상관이 있었어도, 아무 내색하지 않고 남의 뒤치다꺼리 하면서 묵묵히 참았을까?'

또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박스 치우는 일이 왜 뒤치다꺼리지?'

 

뒤치다꺼리는 중요한 일을 끝내고 남은 덜 중요한 일입니다.

가령 잔치의 경우, 손님을 대접하는 게 중요한 일이고, 잔치 끝난 후 치우는 일은 뒤치다꺼리죠.

하지만, 위의 물류센터 빈 박스 치우는 일은 뒤치다꺼리 할 만큼 덜 중요한 일이 아닙니다.

빈 박스를 치워야 상품을 담는 일을 계속 할 수 있기 때문에, 누군가는 반드시 해야 할 일입니다.

상품을 담는 일이 업무 흐름에 있어서 목적이 되는 주된 업무이라면, 빈 박스 치우기는 필수적인 부차적 업무입니다.

결국, 빈 박스 치우는 일은, 자기가 맡은 일 중 가장 주된 일이라고 생각하는 일만 하고 나머지는 다른 사람에게 미뤄버린 사람들 때문에 하찮은 일로 전락한 것입니다.

 

빈 박스 치우는 일은 전혀 힘든 일이 아닙니다.

그 사람들도 (성격은 더럽지만) 뺀질거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 사람들은 왜 주된 일만 하려고 했을까, 또, 알바들은 왜 또 덩달아 빈 박스 치우는 일을 뒤치다꺼리라며 거부감을 갖게 됐을까, 전 왜 처음에는 불만을 갖다가 나랑 상관 없다라면서 마음을 다스렸을까 생각해 봤습니다.

이제 그 생각을 정리해서 적어 봅니다. (서론이 더럽게 길었네요. ㅎㅎ)

이하 평어체로 적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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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동물로서의 사람은 자신이 속한 집단에서 보다 중요한 사람이 되고자 하는 욕망이 있다.

사회 집단에 있어서 중요한 사람으로 인식되는 건 중요하다.

집단의 계급에 있어서 보다 높은 위치로 올라갈 수 있는 중요한 척도다.

주변 사람들도 보다 호의적으로 대한다.

집단이 어려운 상황이 되어 구성원 중 일부를 배척해야 할 경우에도 상대적으로 안전하다.

중요한 일을 하는 사람은 중요한 사람이고, 하찮은 일을 하는 사람은 하찮은 사람이라고 인식한다.

그래서 사람은, 중요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고 인정 받기 위해, '유능해 보이고 싶은 본능'이 있다.

협업해야 하는 복합적인 업무에서 보다 중요한 일만 하려고 하고, 덜 중요해 보이는 (= 하찮아 보이는) 일은 피하려는 건 이 본능 때문이다.

 

본능이라고 표현한 건 계산이 아닌 무의식적 영역에서 행동에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상대적으로 중요하지 않은 일을 회피하고, 그 시간에 보다 중요한 일을 더 많이 수행한다 하더라도 소속 집단에서 더 인정을 받을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렇게 행동한다.

아무리 잘 해봐야 단기 계약이 끝나면 해고될 거고, 자신도 더 일할 생각이 없는 알바가 하찮은 일을 하는 건 기분 나빠 한다.

그래봐야 자신에게 별 이익이 없음에도, 무의식적으로 자기가 해야 하는 일 중에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일'만 하려고 한다.

자신의 일, 혹은 소속된 집단과 자신을 동일시 하기 때문에 생기는 착각이다.

 

유능해 보이고자 하는 건 생존 본능이다.

유능하지 않으면 사회 집단에서 도태되고, 인간은 - 아니 무리생활 동물들 모두도 - 집단에서 도태되면 살 수 없다.

유능해 보이는게 중요한게 아니라 '생존' 본능이란게 중요하다

생존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순간, 유능해 보일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된다.

그러면, 인간 생존의 또다른 본능인 '자기 자원 보존'의 본능이다.

인간은 수고에 비해 얻는 결과물이 적다고 느끼면, 수고를 줄여 자기 에너지를 아끼려고 한다.

자기가 하는 일에 비해 받지 못했다고 느끼는 대우 만큼의 나태함, 미래를 같이 할 생각도 없고 언제든 버려질 수 있다고 느끼는 만큼의 비협조로 표출된다.

요즘 젊은 친구들 태도가 그렇다

열심히 해도 나아지지 않는 자기 처지를 인식하고 있다.

예전엔 '유능하고 성실하다고 인정 받으면, 당장 이 곳은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다 보상 받을 수 있다'는 레퍼토리가 어느 정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개인주의적이고 비협조적인 젊은 직원들을 통솔해야 하는 관리자들도 차마 그런 소리를 할 수 없다.

관리자도 그런 소리 할 입장이 아니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기껏 열심히 해봐야 고작 당신 처지 되는 거 아니냐고 하면, 그런 개망신도 없다.

 

'일이 곧 자신이며, 일을 하는 것이 자기 삶의 완성'이라는 일본 근대화 시절 개발되어 한국에 수입된, 거지 개떡 같은 사기꾼 개소리는 이미 더 이상 써먹을 수 없는 사회가 됐다.

의미도 없는 '유능함 본능'에 남 스트레스 줄 것도 없고, 자기 스트레스 받을 것도 없다.

일은 일일 뿐이고, 보수는 회사에서 자기 역할을 수행한 댓가일 뿐이다.

자기가 어떤 처지이고, 회사에서 어떤 존재인지 정확하게 인지한다면, 더 나아질 건 없어도 최소한 불필요한 스트레스는 줄일 수 있을 것이다.

 

참고로, 유능해 보이는 만큼 자신의 성공으로 돌아오는 집단은, 한국 내 기업들 중에서는 건전한 마인드의 회사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포기하는 편이 낫다.

어떤 기업이 마인드가 건전한가까지는 몰라도 적어도 썩었는지는 분명히 알 수 있는 척도를 하나 알려준다면...

그 기업에 사장 친인척이 몇 명이고, 어떤 과정을 통해 어떤 위치에 있나를 보면 된다.

마인드가 제대로 된 사장이라면 아무리 자기 자식이 취직 못해서 빌빌 거려도 다른 회사에 인사 청탁하면 했지, 절대 자기 회사엔 취직 안시킨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한국 유수의 대기업이라는 곳들 대부분은 기업 마인드가 썩었다.

그래도 너도 들어가고 싶을 거 아니냐고 하면...

맞다. 들어가고 싶다. 돈을 많이 주니까. ^^

유능해 보이지 않으면 짤리게 된다면 아주 유능해 보이려 노력할 거다.

하지만 들어가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라면 들어가고 싶지 않다, 내가 노력한 만큼에 대한 기대는 충족될 리가 없으니까.

요컨데, 마인드가 썩은 회사에 들어가지 말라는 게 아니라, 유능해 보이는 만큼 자신의 성공으로 돌아올 거라는 착각에 괜한 스트레스 받을 필요가 없다는 얘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