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한당 명랑쾌활

단상

[회사는 그리 합리적이지 않다] 12. 평판의 허상

명랑쾌활 2014. 10. 9. 08:54

아직 세상이 제대로 돌아간다고 믿는 푸르른 새싹들의 아름다운 인식을 깨부수고자 몇자 적어 보는 연재입니다.

 

 

실화다.

 

김전무는 해외지사의 법인장으로 발령 나왔다.

본사 대표이사였다가 나왔으므로 사실 상 좌천이다.

기분이 좋을리 없다.

김전무의 역할 중 하나는 생산 정상화였다.

회사는, 회사가 소규모일 때부터 생산 영업 안해본게 없는 김전무의 경험을 활용하고자 했다.

하지만 대표이사까지 한 사람에게 생산 관리라니, 권위로 똘똘 뭉친 김전무에게는 모욕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는 생산 현장을 현지의 한국인 관리자에게 맡겨 두고 방치해 버렸다.

해외에 가족들을 데리고 나온 김전무는 '한국에서 하던 것처럼' 가족과의 외식이나 여행에 사용된 돈을 회사 경비로 처리했다.

현지에서는 법인카드 발급 조건이 까다롭기 때문에 영수증을 제출하고 현금으로 되돌려 받았다.

문제는, 한국에서는 어디에 쓰든 지급된 법인 카드로 결재하면 묵인하고 넘어갔지만, 현지에서는 어느 회사의 누구와 쓴 비용인지를 증빙하지 않으면 회사 비용으로 처리가 안된다는 것이다.

권위적인 김전무는 가짜로 증빙한 영수증을 제시하는 것도, 가족과의 사용을 자재하는 것도 거부했다.

자신이 가족과 쓴 비용을 청구해도 된다는건 자신의 권리이기 때문이다.

이 일은 본사에 보고됐고, 김전무를 한국으로 다시 소환하는 결정의 중요한 단초가 되었다.

김전무는 발령 2년 만에 한국으로 소환되었고, 본사가 아닌 사장 소유의 조그만 자회사의 전무로 발령되었다.

 

김전무의 후임은 박부장이었다.

박부장은 전형적인 '사회 생활 잘하는' 인간이었다.

40 중반의 나이에 사장 앞에서는 파다닥 뛰어 다니며 굽신굽신 보필하는 아부는 물론, 부하직원의 공을 자신의 공으로 포장한다던가, 과오를 부하직원 감싸는척 덮어 씌우거나 하는 일에 능했다.

박부장은 생산부터 정상화 시켰다.

대단하게 개선한게 아니라 그저 정상으로 돌린 것 뿐이었지만, 이전 생산성이 워낙 방치되어 낮았기 때문에 대비 효과가 컸다.

회사 경비 처리 문제는 김전무보다 심각했다.

거의 대부분의 경비 처리건이 접대의 필요가 없는 하청업체 사람들이나 회사 업무와 연관이 없는 사람과 유흥 목적으로 쓴 돈이었다.

게다가 가짜 영수증으로 현금을 착복한 경우도 적지 않았다.

이렇게 충당된 돈은 현지 여성과의 내연 관계 유지에 소비되었다.

박부장이 사용한 경비는 김전무가 쓴 액수의 두세배가 넘었다.

하지만 회사 경비 문제도 규정대로 어느 회사의 누구와 만났다는 증빙을 제출했기 때문에 겉으로 보기엔 별 문제는 없었다.

 

박부장은 성과를 인정받아 회사의 신임이 커졌다.

회사는 박부장이 해외지사에 근무하기를 바랐지만, 박부장은 애초에 약속한대로 2년 임기를 채우면 한국 본사로 돌아가길 강력하게 원했다.

워낙 인물이 없는 회사는 김전무를 다시 발령내기로 했다.

문제는 박부장이 저지른 사고들이 잠복되어 있다가 나중에 터진다는 것이라는 점이다.

지난 해 임금협상 때 박부장이 무리하게 임금을 낮추면서 전원 2년 계약을 해버리는 바람에, 박부장이 들어가는 시점인 올해 임금협상에서는 매우 불리하게 됐다. 고용보장 기간이 1년 남았기 때문에 근로자측 입장이 유리해진 것이다.

또한, 현지 문화를 무시한 무리한 노조 압박으로 인해, 사내 노사협의체가 외부의 강성노조 전국연합에 가입해 버려서, 향후 심각한 노사문제가 두고두고 터질 불씨를 만들었다.

게다가, 생산성은 이미 한계점에 달했고, 근로자들의 경영진에 대한 불신이 극도로 악화되어, 개선 방안이 있어도 근로자들의 비협조로 인해 효율이 떨어질 것이다.

박부장도 그런 사실을 알기 때문에, 올해 12월 중순 이전에 한국으로 복귀하는걸 강력하게 밀어 붙여 결정짓지 않았을까.

이제 모든 문제가 김전무의 무능으로 뒤집어 쓰게 될건 명약관화한 일이다. (실제로 이 상황에 대해선 무능하기도 하지만...;;)

 

 

진실을 가정 정확하게 알고 있지만, 굳이 밝힐 생각은 없다.

누구에게 무엇을 밝히겠나.

이 일이 설령, 사건 범주 안에서 가장 높은 존재인 사장에게 알려진들, 달라지는게 뭐가 있겠나.

그냥 이렇게 묻혀질 것이다.

 

당신에 대한 평판이란 것도 이런 식이다.

진실은 중요하지 않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믿고 있는 이야기가 진실이다.

회사 내 평판이라는게 얼마나 허상인가.

 

*

앞으로 일이 터질 가능성은 90% 이상이지만, 사전에 조치한다면 좀더 부드럽게 해결할수도 있다.

이 모든걸 알면서도 그냥 방치하는 이유는, '그래봐야 아직 벌어지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아직 벌어지지 않은 비관적인 예측을 말한다면, 불신과 모함을 받는 카산드라가 될 뿐이다.

일개 사원이나 중간간부가 회사를 위기에서 구한다는건 드라마에나 가능한 판타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