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한당 명랑쾌활

Indonesia/서식기 II

[37시간 만의 귀환] 03. 산 넘고 물 건너 구름을 헤치고~

명랑쾌활 2014. 1. 27. 08:28

 

새로 정한 루트

꾸닝안 Kuningan, 마잘렝카Majalengka, 스머당 Semedang을 거쳐 반둥 Bandung으로 가서 자카르타-반둥 고속도로를 타고 귀환하는 루트다.

수방 Subang 지나는 루트가 좀 덜 돌아가지만, 홍수의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는 곳은 아예 다 피해서 산으로 산으로 돌아간다.

산사태로 길이 끊어질 지언정 침수는 이제 지긋지긋하다.

결과적으로 봐서 잘한 선택이었다.

나중에 알게된 사실인데, 수방 쪽도 홍수로 난리가 아니였다.

 

차가 엄청 밀린다.

예상했던 바다.

인드라마유 Indramayu 지역 홍수 소식은 뉴스에서도 크게 나올 정도니, 자카르타 갈 차들은 다 이리로 몰렸을게다.

구불구불한 산길에 반둥 가는 차량까지 겹쳐 난리도 아니다.

20~30분 꼼짝 않고 서 있는 경우가 흔하다.

 

하늘은 얼룩 한 점 없이 온통 회색이다.

빗발이 그쳤다, 부슬거리다, 굵어졌다, 계속 쏟아진다.

산간지역 일대에 이렇게 내린 빗물이 모여 인드라마유 쪽으로 흘러가는 거다.

이런 식으로 계속 비가 온다면, 인드라마유 지역은 비가 그쳐도 물이 빠질리가 없다.

 

10:06

마젤렝카 지역의 구불구불한 산길을 달리는데, 뿌옇게 안개가 꼈다.

아니, 안개가 아니라 구름이다.

 

당연한 얘기지만, 구름이나 안개나 똑같다.

높이 있으면 구름이고 낮게 깔리면 안개다.

냄새도 똑같다.

 

이런 가시거리에, 이런 산길을 60km 이상으로 달렸다.

극도로 피곤한 상태인데, 역설적으로 감각은 날카롭다.

24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운전대를 잡고 있었더니, 다른 감각은 둔해지고 운전에 필요한 감각만 극대화 된듯 하다.

단편적인 정보로도 예측 범위는 넓고, 팔다리도 평소보다 반응이 빠르다.

속도는 빨라도 돌발상황에 충분히 대처할 여유가 있다.

무엇보다도... 집에 빨리 가고 싶다.

안밀릴 때 1초라도 더 빨리 달려둬야 한다. @_@

 

17:34 반둥까지는 37km 남았다.

여기서도 1시간 가량 멈춰 서 있었다.

이제 1시간 멈춰서 있는건 아무렇지도 않다.

도로 침수 안된 것만 해도 어디냐. ㅋㅋ

 

17:42 반둥 들어서는 마지막 고갯길

엄밀히 말하면 여기도 반둥이다.

반둥군 안에 반둥시가 따로 있는데 여긴 반둥군 지역이다.

인니 행정구역은 군에 해당하는 지역 이름과 그 지역의 중심도시 이름이 같다.

 

움푹 패인 정도가 심해서 경찰들이 차량 통제를 하고 있다.

덕분에 심하게 밀린 거다.

사진엔 잘 안나왔는데, 내 앞차 그 앞의 트럭에 돌들이 실려 있고, 경찰이 트럭 운전사에게 싸바싸바해서 돌 열 개쯤 삥 뜯어 웅덩이에 메꾸고 있는 장면이다. ㅋㅋ

 

18:15 해 떨어지기 직전

 

반둥시에 진입한건 오후 7시 쯤 완전히 깜깜해 진 후다.

절대 원하지 않았는데, 하필이면 딱 퇴근시간 제일 복잡할 때 걸렸다.

그래도 괜찮다.

문명세계(?)에 왔다.

 

고속도로 진입했을 때는 눈물이 다 날 뻔 했다. ㅋㅋ

그러고도 두 시간을 달려야 하지만 괜찮다.

엄청나게 비가 쏟아졌지만 괜찮다.

고속도로도 패였는지 공사하는 구간에 좀 밀렸지만 괜찮다.

 

21:37 드디어 서식지에 도착했다.

전날 08:30에 출발해서 37시간 만이다.

지난 일들이 꿈 같이 아련하다.

냉장고를 열어보니 어제 저녁 도착하면 먹으려고 만들어 두라 했던 김밥이 있다.

봉인해 뒀던 식욕이 올라온다.

맥주 네 캔과 함께 후루룩 뽀개고 침대에 몸을 던졌다.

몸 누일 장소가 있다는건 참 행복한 일이다.

 

 

후일담..

 

1. 흔히 홍수하면 박력있게 범람하는 황토색 물줄기가 떠오릅니다.

하지만 넓은 평야 지역에 스물스물 차오르는 침수도 못지 않게 공포스럽습니다.

이러다 다시 낮아질거라는 기대에 멀거니 기다리다 문득 주위를 둘러보면, 어디에도 피할 곳이 없다는걸 깨닫게 됩니다.

주변의 높은 지역으로 피신 못하고 지붕 위에서 구조를 요청하는 상황에 처하는 경우가 그럴겁니다.

차라리 범람하는 물이 사납게 들이쳤다면 피신을 했겠지만, 발목이 잠기고, 종아리가 잠기고, 서서히 차오르면, 차마 집을 떠나지 못하다 결국 시기를 놓쳐 고립되는 거겠죠.

 

2. 재해지역의 또 다른 무서운 점은 치안의 부재입니다.

도와 달라 소리쳐 봤자 물리적으로 경찰이 올 수 없는 상황에 사람이 어떻게 돌변할지 모릅니다.

 

3. 침수 상황에 차량은 의외로 취약합니다.

사람은 허리까지 물이 차도 이동할 수 있지만, 승용차의 경우엔 고작 무릎까지만 차올라도 움직일 수 없습니다.

 

4. 제가 마지막으로 차를 돌린 마을은 결국 허리까지 잠긴 장면이 뉴스에 나왔습니다.

 

5. 5일 동안 인드라마유를 지나는 국도는 폐쇄됐습니다.

자와섬 중부 방향으로 가는 모든 차량은 반둥 방면으로 우회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