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한당 명랑쾌활

Indonesia/서식기 II

[37시간 만의 귀환] 01. 잘못된 판단의 연속

명랑쾌활 2014. 1. 23. 09:49

 

 

수도 자카르타 홍수 (출처 : 구글에서 아무렇게나 퍼옴)

 

요즘 인도네시아는 4~5년 주기로 발생하는 최악의 홍수 재해로 연일 난리도 아닙니다만...

전 그냥 자카르타만 그런가 보다 했습니다.

 

왜냐하면 사진과 같이, 자카르타의 홍수는 자카르타 지역에 온 호우 때문이 아니라, 자카르타를 둘러싼 산간 지역의 호우로 인해 불어난 강물이 모두 자카르타 지역으로 가기 때문입니다.

인니어로 이런 형태의 홍수를 반지르 끼리만 Banjir Kiriman (Bajir 홍수 Kiriman 보냄) 이라고 합니다.

자카르타는 옛날부터 큰 도시를 형성했습니다.

큰 도시는 기본적으로 식량 자원이 풍부해야 합니다.

자카르타와 일대 지역은 비옥한 평야와 함께, 벼농사에 필수인 수자원도 풍부했기 때문에 큰 도시가 형성되기 좋은 조건인 지역입니다.

하지만 홍수 재해의 위험도 함께 상존합니다.

그래서 옛날엔 몰라도 지금과 같은 수도 역할의 현대 대도시에는 입지가 맞지 않는 곳이기도 합니다.

 

잡설이 길었네요.

어쨋든 홍수는 자카르타와 일부 몇몇 국지의 문제일뿐, 다른 지역은 괜찮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친구 만나러 찌르본 Cirebon 이라는 곳에 혼자 차를 몰고 갔다.

내 서식지에서 찌르본까지 거리는 200km가 좀 안된다.

 

국도인데 무려!! 왕복 4차선의 상태가 괜찮은 도로다.

이 국도는 자카르타와 자와 섬 중부를 잇는 대동맥 역할을 하는 도로이자, 나아가 자와 동부까지 연결되는 매우 중요한 도로다.

 

갈 때도 그닥 순조롭지는 않았다.

비도 많이 오는데다, 인니의 우기에 도로는 생각지도 못한 위험요소가 있다.

 

아스팔트 도로가 여기저기 패여 있다.

1차적으론 부실공사 탓이겠지만, 열대지방 우기의 무식하게 때려붓는 폭우엔 어지간히 야무지게 타설하지 않으면 버텨내기 힘들게다.

심하면 자동차 바퀴가 절반 정도 들어갈 정도다.

도로가 좋은 편이라 안막히면 80~100km로 달리는데, 저런 웅덩이는 밟는다면 헐리우드식 떰부링 카액션을 보여줄 수도 있겠다. ㅋㅋ

가뜩이나 비가 오니 웅덩이가 잘 보이지도 않는다.

혼자라면 그래도 시속 60km 이상으로 달릴 수 있지만, 서행하는 자동차들 때문에 여의치 않다.

 

강이나 호수, 바다가 아니다.

원래 논이었던 지역이다.

 

강 근처는 범람으로 무시무시하다.

 

인니는 전력 사정이 안좋아서 대부분의 국도에 가로등이 없다.

해 떨어지고 비까지 내리면 가시거리는 최악이다.

물이 빠질새 없을 정도로 비가 들이붓기 때문에 도로에 빗물이 찰랑찰랑 해서 웅덩이가 있는지도 구분이 안된다.

그래도 선방해서 원래 4시간 걸리는 길을 6시간 만에 도착했다.

 

다음날, 정체될거 감안해서 아침 일찍 나섰다.

친구를 집에 데려다 주고, 서식지로 출발한 시간 09시 30분.

이때만 해도 전 밀려봐야 최악으로 10시간 정도로 각오했다.

한국 같으면 이제 상상하기도 힘들겠지만, 인니에서 어디 10시간 걸린다는건 그리 대단한 일이 못된다. :)

 

찌르본이 비교적 지대가 높아서 그런지 초기엔 그럭저럭 달리면서 주행 중에 사진을 찍는 여유도 있었다.

 

10:43 어떤 학교

 

10:49 호수나 바다처럼 보이는 논들

 

11:03 그 와중에 낚시를 하는 사람

 

한국 같으면 욕을 바가지로 먹을 일이지만, 여기선 흔하디 흔하고 뭐라 욕하는 사람도 없다.

딱히 욕할 일도 아닐 뿐더러, 낚시를 하는 사람들이 바로 수해를 입은 사람들이다.

집 잠기는데 낚시할 정신이 있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집 잠긴건 잠긴거고 먹고 살긴 해야 한다.

낙천적이라는 이유도 있겠지만, 가진게 워낙 없어서 그럴 수도 있다.

아니, 가진게 워낙 없기 때문에 낙천적일 수도 있겠다.

주어진게 워낙 없다면, 작은 것만으로도 만족하지 않고는 삶이 너무 힘들다.

물론, 빈부격차가 크지 않다는게 전제조건이 필요하겠지만.

 

11:07 빗발이 심상치 않다.

 

11:08 도로 한쪽을 완전히 폐쇄해서 반대편 차선 2개를 양방향이 나눠써야 했다.

 

한쪽 방향 2개 차선을 완전히 막고 이재민 대피소 공간으로 쓰고 있었다.

 

이런 특수상황이 아니더라도, 인니인들은 대체적으로 자기 마을 지역을 지나는 길을 마을 소유로 인식하는 경향이 강하다.

결혼식 행사장이 도로 일부 침범하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다.

심하면 차 한 대 지나다니는 골목을 턱하니 막고, 오토바이만 지날 수 있게 하기도 한다.

저 도로 통제도 경찰이 아닌, 주민들의 지도자 격인 사람들이 결정하고 자체적으로 했을 수도 있다.

 

재해가 난 곳엔 어김없이 이재민들이 도로에 나와 '도움 요청'을 한다.

 

인니 정서에서는 구걸을 딱히 부끄러워 하지 않는다.

목숨이 위험한 상황만 제외하고, 어떤 상황에서도 타인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행위 자체를 부끄럽게 생각하는 한국과는 많이 다르다.

(당장 죽을 일도 아닌데 타인에게 아쉬운 소리 하는게 나약하다는 인식일까?)

'도울 수 있고 도울 마음이 있는 타인'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행위가 굳이 꼭 부끄러워 해야 할 일은 아닌거 같다.

그래서 표현 자체에 부정적인 의미가 있는 '구걸'보다는, '도움 요청'이라는 표현이 보다 정확하다.

 

뭐 아무리 긍정적으로 생각하려고 해도, 자기들 '도움 요청' 하려고 차량 서행 시키는 장애물 만드는건 아직은 열받는다.

속도 안줄이고 지나가면 욕도 한다. ㅋㅋ

무슨 권리로 '도울 마음이 없는 타인'까지 방해하는 거지?

 

강을 건너는 다리인데, 어디까지가 강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다.

 

11:14 한 쪽편만 침수가 심한 상황

 

인니의 도로교통 문화에서는 양방향 차선 중앙을 물리적으로 막는게 필수다.

법보다 마을 관습이 더 우선일 정도로 준법 정신이 희박하기 때문에, 중앙선만 그었다면 무시하기 일쑤다.

물리적으로 막지 않으면 안된다.

이제 역으로, 물리적으로 막지 않은 중앙선은 얼마든지 위반해도 된다는 인식이 정착되었다.

좋은게 좋은거니 좋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손실이 심하다.

선만 주욱 긋고 다 같이 지키면 간단할 일을 굳이 세멘공구리 부어서 분리대를 만들어야 한다.

그것도 낮으면 100% 타넘나들테니 충분히 높게 쌓아야 한다.

자원 낭비 뿐만 아니다.

위 사진과 같이 도로가 침수될 경우, 중앙 분리대가 둑 역할을 해서 물이 빠져나가기 어렵고, 일부지역에만 침수가 집중되어 피해를 가중시킨다.

넓을수록, 수위를 높이는데 필요한 물의 양이 많아진다.

도로 양쪽 지역이 공평하게 침수되었다면 발목까지만 잠길게, 한쪽 지역만 종아리까지 잠기는 격이다.

 

11:18 본격적인 정체가 시작되었다.

 

11:48 30분 동안 약 100m 왔다.

침수된 집이 보인다.

 

12:39 한 시간 동안 100m 온거 같다.

차들은 이제 아예 멈췄다.

 

15시 즈음, 승용차, 승합차들은 차를 돌려 왔던 길로 돌아간다.

반둥 쪽으로 돌아서 간댄다.

주변엔 대형 트럭들 밖에 없다.

대형 트럭들은 차를 돌리기도 힘들 뿐더러, 돌아가는 만큼의 유류비를 더 주는 것도 아니고 늦었다고 벌금을 무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그냥 서있다.

 

길을 몰라 헤매더라도, 이때 반둥으로 간다는 승용차들을 따라 갔어야 했다.

12시 반부터 5시간 반 동안 꼼짝도 못하고 기다린 끝에 차는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고, 그 앞에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길을 잃는 것은 비교도 안되게 끔찍한 상황이었다.

 

 

* 2015년 5월에 내용 추가 

6개월 쯤 후에 침수된 곳 사진

아무 일 없었다는듯 벼는 자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