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한당 명랑쾌활

여행기?/인도네시아

쁠라부한 라뚜 Pelabuhan Ratu ~해변~ 4/4

명랑쾌활 2010. 5. 30. 15:04
새벽의 해변.
요 멋드러진 사진은 영이가 찍은 거임.
이 시간에 난 늘어지게 자고 있었음. ㅋㅋ

숙소 앞 해변의 왼 쪽 끝.
파도의 힘이 느껴지지 않는가?
여기 무릎 높이 밖에 되지 않는다.
걸어 들어갈 수도 있지만, 파도에 휩쓸려 갯바위에 만신창이 될 거다.
한국 같으면 안전통제를 할 법도 한데, 이 곳에는 그런거 없다.

해변 왼 쪽 끝 살짝 너머.
혼자 서핑하는 히데키.
수영을 잘한다는 것은 부러운 일이다.

오른 쪽 끝까지 답사를 시도해 본다.

해변과 매우 가까이 논이 있다.
산으로부터 흘러 들어오는 물이 매우 풍부한 지역이다.

개 발자국.
보통은 고양이가 많던데, 이 지역은 고양이는 안보이고 개들이 종종 눈에 띄였다.
고양이는 물을 싫어해서 그런 것일까?

야자가 그렇게 무식하게 껍데기 두껍고 딱딱한 이유는 파도를 타고 바다를 건너, 다른 땅에 번식하기 위해서다.
이런 식으로 해변에 밀려 올라온 야자가 뿌리를 내리고 자라는 거겠지.
사람만 없다면.

민가는 바다에서 떨어져 산 쪽에 위치해 있다.
해변의 건물들은 관광객을 위한 숙소를 제외하고는 거주 목적이 드물다.
없지는 않다. 못사는 사람들의 집이다.
바다 가까운 곳은 사람이 살기 부적합한 곳인가 보다.
장기간 살아보지 않아서 이유는 잘 모르겠다.
(태풍 피해는 그다지 없는 곳이라고 한다.)
오랜 기간에 걸쳐 형성된 촌락의 형태에는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는 것만 알 뿐이다.

아주 조그만 꼬마들은 저런 곳에서 물놀이를 한다.
자카르타와 달리 이 곳의 하천은 깨끗한 편이다.
인구밀집, 도시화가 자연의 적이다.
한데 모아놓는 편이 전지구적 관점에서 자연에 덜 해롭다는 친구의 의견이 있었다.
글쎄, 아직은 동의하지 않는다.
좀 더 생각해 볼 문제다.

아직은 외지인의 때가 덜 탄 곳인 모양이다.
여기저기 사진을 찍는 나에게 사진을 찍어 달라는 아이들, 사진을 찍어주니 고맙다고 한다.
TV같은 곳에서 보기는 했지만, 경험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사진이 떠서 잘 보이진 않는데, 배 옆 그늘에 어른이 한 면 누워 낮잠을 자고 있었다.
인니는 쫓거나 윽박지르는 일이 매우 드물다.
어지간한 불편은 그냥 조용히 감수한다.

현지인 대상의 숙박업소일까?
형태로 보아선 그런데, 빨래 널린 것이나 생활도구로 보아선 일반 가정집으로 보였다.
(실례가 될 듯하여 가까이서 사진 찍진 않았다.)
뭍 안 쪽의 집들에 비해 많이 허름해 보였다.

이 곳의 아이들도 " 미스뜨르~" 하고 외치며 사진 찍기를 청한다.
미스뜨르는 미스터의 인니식 발음이며, 외국인 대상으로만 존칭으로 쓰인다.
김사장님, 최사장님 같은 정도의 어감이다.

이 곳의 모래는 검은 빛을 띤다.
저런 장치를 설치하고 모래를 퍼담고 후, 파도가 오면 물을 퍼 모래에 부어 모래를 씻어 내린다.
무엇이냐 물어보니, 생소한 무슨 단어를 말한다.
목걸이나 장신구를 만드는 재료인 돌의 일종을 캐는 것이란다.
나름 보석 같은 것이 아닌가 싶다.

이 사람만 특이하게 송수관을 설치해 그 밑에 장치를 두었다.
모래 가까운 곳에 장치를 두고 물을 퍼붓는 것보다, 물이 부어지는 곳에 장치를 두고 모래를 떨어진 곳에서 퍼온다.
멋진 발상의 전환이다.
노동량으로 보았을 때, 이 편이 더 효율적이다.
어딜 가나 뛰어난 사람은 있게 마련이다.

30여 분을 걸어 드디어 해변 오른 편 끝에 다다랐다.

계단이 설치되어 있는데, 파도의 타이밍에 맞춰 재빨리 올라가야 한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파도 힘이 장난 아니다.
계단 밑 부분 께에 몰아 닥치는 파도는 무릎 높이 정도 되지만, 휩쓸리기 충분할 만큼 힘이 좋다.
그리고 휩쓸리면 반팔, 반바지로 오토바이 타다 아스팔트에 구른 것 만큼의 상처는 각오해야 할 것이다.
재수없으면 죽을 수도 있을 정도로 바위가 날카롭다.

그 위에 올라서니 반대편에 아주 작은 해변과 그 곳에서도 돌을 채취하는 두 사람이 보인다.
저 곳에 비치 의자를 깔아 놓고 앉아 있으면, 정말 호젓하고 좋을 것 같다.

파도가 두 방향에서 휘몰아쳐 들어온다.
백만 대군이 양동작전으로 몰아치는 기세랄까.
두 흐름이 맞닥뜨리는 부근에 떨어지면 곱게 죽긴 힘들어 보였다.

아, 이 곳에도 추락 방지 울타리라던가 안전장치 따위는 없다.

이제 다시 돌아갈 길을 돌아 본다.
내가 묵는 곳은 해변 반대편 끝에 있다.
왔던 만큼 가야 한다, 했던 만큼 해야 한다...
군대에서 이딴 말 들으면 하늘이 노랳는데... ㅋㅋ

파도의 기세에 밀물이 꽤 위까지 오간다.
그래서 해변 모래사장의 보이는 곳은 완만하지만, 썰물과 밀물이 부딪치는 지역부터 급격히 깊어진다.
즉, 보이는 부분만 생각하고 물에 발 담궜다간, 굉장히 당황스런 경험을 하게 된다는 얘기다.
게다가 끌어당기는 힘도 강하기 때문에 휩쓸릴 수도 있다.
녹색옷을 입고 해변에 나오면 바다의 여왕 니 로로 키둘에게 끌려 들어간다는 전설이 여기에서 온게 아닌가 싶다.

이 사진 찍은 지점이 밀물 들어치면 무릎 정도, 빠지면 땅이 나오는 지점인데도, 물에 밀려 넘어질 뻔 했고, 쓸려 들어가지 않게 발에 힘을 꾹 줘야 했다.

대여섯 살 정도 되어 보이는 꼬마가 조그만 널빤지 하나를 들고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들어가나 걱정했는데, 서핑하려고 온 것 같지는 않고 그냥 저 부근에서 배 띄우듯 갖고 놀기만 했다.
보호자는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저 멀리서 보고 있을 거라 생각한다.
이 곳의 아이들은 다 이렇게 자라나 보다.

사는 게 참 덧없다.
먼 자취는 속절없이 지워진다.
가까운 자취도 곧 먼 자취가 되고, 다시 지워진다.
남기려 살지 말고, 나아가려 사는게 옳다.



무지막지하게 강렬한 햇빛, 삼모작이 가능한 논, 그리고 바다.
이 곳은 넉넉한 땅 임과 동시에 힘든 일이 끊임없는 곳이다.
보는 사람의 관점에 달렸다.
그리고 사는 사람의 위치에 달렸다.

자본주의와 민주주의가 같은 개념인양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민주주의는 평등함을 추구하지만, 자본주의는 엄연히 계급사회를 지향하는 개념이다.
남보다 더 열심히 하면 더 많이 가질 수 있다는 개념이 곧 계급 아닌가?
민주주의는 곧 자본주의라고 착각하는 사람 만큼이나, 자본주의가 누구든 열심히만 하면 부자가 될 수 있기 때문에 평등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어리석은 사람이다.
그 이면을 알게 되는 사람은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한다.
체념하던가, 거부하던가.
보통은 체념하고 받아들이는 사람을 가리켜 ' 사회를 안다', 혹은 ' 철 들었다'라고 한다.
그리고, 거부하는 사람을 ' 아직 세상물정을 모른다'며 내려봄으로써 자기위안을 한다.
그렇게 계급은 다시 형성되어 간다.
거의 대부분의 인간들에게 있어서, 행복이란 상대적 만족감일 뿐이다.
타인보다 스스로 낫지 못하면 타인을 비하시키기라도 해서 자위를 하는 인간의 본성이 있어 계급은 필연적이며,
그 계급사회의 최신형 버전이 곧 자본주의다.
옛날의 노예제도를 보며 미개한 시절의 폐해라고 생각한다.
그럴까?
당신이 만약 먹고 살기 위해 힘들어도 새벽부터 밤까지 일해야 하고, 더러워도 할 수 밖에 없고, 싫어도 시키는 대로 굽신거려야 한다면, 당신은 이미 노예다.
노예의 삶이란 것이 그런거 아닌가?
다른 점이 있다면, 노예는 그걸 거역하면 제재, 혹은 죽음을 당하지만, 당신이 그걸 거부하면 먹고 살 수 없다는 것.
자기의지에 따라 이 일을 하는 것이라 항변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지기의지에 따라 노예, 혹은 노비가 되었던 인간은 옛적에도 수 없이 많았다.
선택의 여지가 없는 자기의지는 이미 자기의지가 아니다.

이런 얘기가 기분 나쁠 수도 있겠다. (아니, 기분 나쁠 거다.)
사람들은 진실을 원한다 하지만, 대개의 진실은 그다지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지 않는다는 사실을 모른다.
그저 진실이라는 단어가 주는 어감에, 그게 그냥 좋은 것인 줄 안다.
하지만 감당할 수 없는 진실은 대게 불쾌한 것들이고, 심지어는 사람을 망가뜨리기도 한다.
옳은 말 직설적으로 하는 인간 치고, 주위에서 배척 받지 않는 인간 있던가.
두루뭉술 애둘러서 묻는 부분만 적당히 답해주는 사람이 현명하다는 소리 듣는 거다.
대개 인간은 자신을 불편하게 만드는 진실보다, 그 진실을 알게 만든 사람을 (혹은 매체를) 미워하게 마련이다.
돼지에게 축사의 더러움과 축사를 벗어난 멧돼지의 삶을 깨우쳐 주면 어떨까.
그 돼지는 축사에서 사는 자신의 현실을 비판하며 벗어나려 할 것인가, 아니면 그 삶을 깨우쳐준 사람을 원망할 것인가...
정답은 없다.
절대적 행복은 너무나 먼 곳에 있고, 상대적 행복은 어디서 타협하느냐에 따라 각자 다른 법이니까.
확실한 사실 하나는, 그 돼지는 그 전까지 아무렇지 않았는데, 알게 된 그 순간부터 기분이 매우 더러울 것이다.
대개의 진실은 불편하다.
아니, 불편한 것들은 진실일 경우가 많다.

그 이치를 깨닫게 된 후, 난 세계에서 가장 극단적인 자본주의인 재벌자본주의의 나라, 한국을 떠났다.
다시 한국에 돌아가 노예로 사는 방법도 있기에, 선택의 여지가 있는 나는, 아직은 노예가 아니다..
만약, 결국 한국으로 돌아가 삶을 연명해야 하는 상황이 오게 되면, 아마도 난 누구보다도 열심히 비굴하고 충실히 시키는 대로 할 것이다.
저 놈 철 들었네 하는 주변의 칭찬을 들으며. ㅎㅎ
아마 사회에 대한 최소한의 반항이라면, 자식을 낳지 않는다는 것 정도 되겠다.
노비의 자식은 노비일 뿐이라며 자식 낳기를 기피한 조선시대 노비처럼.

그래서 난 모쪼록 내가 돌아가지 않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