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병 났다. 눈알이 새빨갛고 고름 줄줄.
일단 인터넷 검색해본다. 한국 같으면 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겠지만, 인니에서는 각자도생이다.
결막염인 거 같다.
젠장, 자가 면역 치료가 (=그냥 끙끙 앓고 낫는) 안되는 병이다.
정말 싫지만 병원에 갈 수 밖에 없겠다.
리뽀 찌까랑에서 가장 나은 병원은 실로암 Siloam 이다.
가장 나을 뿐이다. 생긴 건 종합병원 같지만 실속은 한국의 동네 1차 진료기관 수준이다.
홈페이지로 검색하니 오늘 오전 출근하는 안과 의사 이름은 마르셀라, 진료 시간은 8~10시다. (오후 출근하는 의사와 진료 시간이 따로 있다. 둘 다 매일 출근하는 거 아니고, 없을 때 땜빵하는 일반(?) 의사가 있다.)
8시 20분에 병원 도착했다. 진료 시간 곧이 곧대로 믿고 일찍 나오는 건 바보짓이다.
지금껏 제 시간에 출근하는 의사를 본 적이 없다. (https://choon666.tistory.com/744)
그래도 너무 늦으면 대기열이 얼마나 길지 모르고, 재수없이 줄 길어서 점심 시간 걸치는 짜증나는 상황에 처할 수 있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12시 전에는 끝날 ‘확률’이 높을 시간대라 생각하고 맞춰 온 거다.
일단 접수대로 가서 인적사항, 증상을 말하면, 접수원이 입력하고 프린트한 파일철을 준다.
그거 들고 안과 구역으로 가서, 안과 구역 접수대에 제출한다.
접수대에 직원이 없으면 (자리에 없는 경우가 많다), 접수대 책상 위에 올려 놓아야 한다.
먼저 올려놓은 파일철이 있으면 그 위에 얹어 놓으면 된다.
나중에 직원이 와서 밑에 놓인 파일철부터 순서를 부여한다.
직원 오면 주겠다고 들고 있는데 뒤에 온 사람이 접수대에 먼저 올려 놓으면 줄이 뒤로 밀리는 거다.
그러고서 내가 먼저 왔네 따져면 서로 뻘쭘하다.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지만 인니 병원의 암묵적 규칙이 원래 그렇다.
그런 원시적인 시스템을 개선할 수 없다면 최소한 안내판과 파일철 놓는 곳을 만들어두는 정도는 얼마든지 할 수 있을 거 같지만, 인니에서는 그런 발상을 기대하지 않는 편이 낫다.
딱히 인니인이 창의적이지 않아서가 아니라, 불편함을 표출하지 않는 문화라서 그럴 거라고 생각한다.
손님들이 몇 번 지랄했으면 벌써 대책을 강구해도 했을 거다.
3명이 대기하고 있다. 양호하다.
인니는 어떤 증상을 막론하고 병원에 혼자 오는 사람이 드물다. 배우자 아프다고 연차내는 게 황당한 게 아닌 거다.
내 뒤로 2명이 더 왔다.
의사는 9시 10분에 도착했다.
1시간 넘게 늦었지만 당연하다는듯, 서두르는 '시늉'도 안한다.
진료 시작. 내 뒤로 온 2명을 먼저 호명하네?
뭔가 VIP 고객인가 보다. 접수 창구나 홈페이지에는 예약 접수하는 곳이 없다.
인니가 뭐 다 그렇다. 나도 관공서 일 볼 때면 에이전트 통해서 순서 건너뛰고 먼저 들어간다.
10시 15분, 드디어 내 이름을 부른다. 기다린지 2시간 만이다.
내가 증상 말하는 거 듣고서, 시력검사를 시킨다.
뜬금없이 왠 시력검사? 눈병 걸리기 전 시력을 모를텐데 시력 검사를 뭐하러?
한국 안경점에 널리고 널린 시력 검사 기계도 아니다.
진료실 끝에 앉아서 내 손으로 한쪽씩 눈을 가리면 간호사가 반대편 벽에 붙은 숫자판 찍고 읽어보라는, 석기시대 방식이다.
다시 의사 앞에 앉아 이마와 턱 붙이는 틀에 얼굴 붙이고, 후레쉬로 눈알 상태를 검사했다.
의사는 Hordeolum인 거 같댄다. 자기네 병원에도 요즘 많이 온댄다. (인니 종합병원 의사들은 개인 병원을 따로 운영한다)
뭔 소린지 몰라서 다시 물으니 bintitan 이라고 한다. 다래끼? 다래끼가 눈알이 빨갛게 충혈된다고?
어쨌든 의사가 그렇다는데 뭐.
진찰 5분 끝. 내 앞 다섯 사람은 왜 1시간이 걸린 걸까?
진료실 나와서 기다리면 안과 접수대 직원이 호명해서 아까 제출한 파일철에 진찰 결과를 적은 서류를 넣어 돌려준다.
그거 들고 다시 접수 구역(?)에 가서 수납 카운터 번호표를 뽑고 기다린다.
10시 26분, 모니터에 내 번호가 떴다. 5분 기다렸다.
파일철을 제출하면 내용 입력하고 진찰비, 약값 계산하는 거 기다려야 한다. 번호표는 뽑지 않는다.
카운터 앞에 서있으면 지들이 불편한지, 근처 의자 앉아서 기다리라고 한다.
5분 정도 지나서 내 이름을 부른다.
528,000 루피아. 5만원 정도 나왔다.
진찰비 170,000 루피아
시력검사 장비 사용료 94,000 루피아 (선사시대식 시력 검사!)
검안 장비 사용료 54,000 루피아 (후래쉬 빛 쏴서 눈 자세히 관찰하는 장비)
항박테리아제 안연고 19,668 루피아
소염제 52,699 루피아 (비슷한 효과 약 약국에서 10,000 루피아)
인공눈물 59,732 루피아
항균제 안약 32,905 루피아
불필요한 시력 검사, 그것도 대충 하는 데 1만원 가까이 받아 쳐먹는다.
약값도 일반 약국보다 전부 다 비싸다.
이러니 인니 병원을 경멸하는 거다.
의료 민영화가 되면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거다.
이게 끝이 아니다. 약 나오는 거 기다려야 한다.
약 나오는 쪽 직원들 보고 있으면 스트레스 올라서 병만 악화되니 안보는 게 낫다.
죤나 느릿느릿, 느긋하기 짝이 없다.
수납 창구에서 약 불출 창구로 자료가 넘어가니, 뭐 따로 제출할 필요는 없다.
약 불출하는 쪽 모니터에 이름이 뜨는 거 지켜보고 있다가 약 나왔다는 표시 뜨면 가면 된다.
11시 3분, 내 약이 나왔다.
돈 내고 약 타기까지 다시 30분 기다린 거다.
약 불출 창구 가서 영수증 보여주면 약 준다.
무조건 기본 1주일치다. 3일이면 나을 것도 예외 없다.
약 주면서 하루 몇 번 어쩌고 용법 알려준다. 포장에도 다 쓰여 있다.
이제 집에 가면 된다.
8시 20분에 와서 11시에 끝, 거진 3시간 걸렸다.
그래도 점심 시간 전에 끝냈으니 양호한 거다.
인니에서 살려면 기다림에 익숙해야 한다.
누가 짜증이라도 내면 바뀔지 모르겠지만, 모두가 기다리는 걸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나라다.
바뀔 거라 기대하지 않는 게 낫다. 인니 사람들도 다 그렇게 포기하고 받아들였을 거다.
투쟁하지 않는 시민에게 민주주의가 없듯, 합리적인 고객 대응 역시 거저 주어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