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한당 명랑쾌활

단상

관리자의 역설 - 일이 터지면 넌 뭐 했냐, 안터지면 넌 하는 게 뭐냐

명랑쾌활 2020. 7. 15. 09:07


관리자 업무로 커리어를 쌓으면서 느꼈던 점인데,

관리자는 일이 터지면 무능하다는 평가를, 일이 터지지 않으면 쓸모 없다는 평가를 받기 십상입니다.

일이 터지면 넌 뭐했냐는 소리를 듣고, 일이 터지지 않으면 월급 도둑놈 소리를 듣지요.

그래서, 닳고 닳은 월급쟁이 관리자 중에는 해결할 수 있는 선의 일들은 터지도록 냅두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저 같은 경우, 별일 없어서 매일 유유자적 노는 것처럼 보이는 관리자가 가장 일 잘하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덕분에 인니 첫 직장에서는 안정화가 된 이후 회사를 그만 두어야 하게 됐습니다만.

물론 그 이유 하나 만은 아니지만, 일정 부분 그런 점도 있었을 겁니다.

워낙 회사에 별일이 없다 보니, 한국 본사에서 발령 온 부장이 보기엔 제가 하는 일이 만만해 보였겠지요.

본인도 이제 인니 온지 1년 쯤 되어 현지 공장 돌아가는 폼도 눈에 슬슬 들어오겠다, 더듬더듬이지만 인니어로 대충 의사소통도 할 줄 알게 됐겠다, 한국에서 직장밥 20년 가까이 먹었던 내공까지 더하면 자기도 얼마든지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겁니다.

저 그만 둔 후, 인니어 할 줄 아는 한국인 신입을 한국 최저임금 수준으로 채용해서 제 자리를 대체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 신입은 1년도 채 안되어 회사를 나갔고, 그 후로도 이런저런 사건사고가 터졌다는 소식들은 덤입니다.


요즘 코로나19 사태와 한국에 쏟아지는 찬사를 보면서 그런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만약 코로나19가 조류독감이나 메르스와 비슷한 양상을 보였다면 지금처럼 한국이 극찬을 받았을까?

사태 초기 한국의 발빠르고 강력한 조치들은 메르스 때문에 겁 먹어서 호들갑 떠는 거라고 비웃음을 받았을 겁니다.

물론 질병관리본부는 차라리 별일 아니어서 자기들이 호들갑 떤 거라고 비웃음 받는 게 차라리 낫다고 받아 들일테고요.

소방관도 비슷합니다. 화재가 거의 발생하지 않아서 자신들이 놀고 먹냐고 비판 듣는 게 더 낫다는 마음이겠지요.


코로나19가 심각했기 때문에 오히려 칭찬을 듣게 되는 상황.

관리 영역의 역설이 그런 게 아닐까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