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한당 명랑쾌활

단상

족벌 중소 기업의 인너 서클

명랑쾌활 2020. 7. 31. 09:58


회사 조직 내에서 어느 정도 위치까지 올라가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세상에 관한 얘기입니다.

일단, 모든 중소기업이 그렇다는 거 절대 아니라는 걸 전제로 하겠습니다.

저도 어느 정도 위치까지 올랐던 경험은 기껏 두 회사 밖에 없습니다.

중소기업 운영은 사장 개인 성향의 영향을 크게 받기 때문에, 십인십색 다른 점도 많습니다.

그냥 이런 세상도 있구나~ 하고, 소설 보듯 보시면 되겠습니다.



한국 대부분 중소기업의 구성원들은 로열 패밀리, 인너 서클, 소모품, 이렇게 세 부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사장은 구성원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사장은 '신'입니다.

회사라는 세계의 창조와 종말을 결정할 권력을 가진 유일한 존재이니 신이라는 표현이 적절합니다.


소모품이 올라갈 수 있는 한계는 과장입니다.

인너 서클에 들어가는 건 차장급 이상이 보통입니다.

물론 모든 차장이 인너 서클에 들어가는 건 아닙니다.

회사에 대한 충성심을 인정 받아 차장까지 올라갈 수는 있지만, 사장에 대한 충성심이 없다면 인너 서클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회사에 대한 충성심과 사장에 대한 충성심이 다르다는 걸 이해하고, 회사가 아니라 사장에게 충성을 바치는 사람만이 인너 서클에 들어갈 기본 요건을 갖춘 겁니다.

즉, 조직이 아니라 사람에게 충성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인너 서클 후보가 되면, 사장의 사적 모임에 불리게 됩니다.

술자리일 수도 있고, 운동이나 등산일 수도 있습니다. (저 같은 경우 아주 질펀하게 노는 술자리였습니다.)

그 곳에서 사장은 자신의 본모습을 보여 줍니다.

하지만 취해서 그러는 게 절대 아닙니다. 사장이 자기 본색을 통제하지 않고 보여주는 건 심복 뿐입니다.

그렇다고 아닌데 그러는 척 연기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냥 자기 통제 하에서 보여줘도 되는데까지 보여 주고, 반응을 보는 겁니다.

자기 통제가 어쩌고 반응 체크가 저쩌고 하는 게 뭐 사장의 대단한 능력 같아 보이지만, 사회 생활을 하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다 자연스럽게 하는 겁니다.

거의 모든 인간은 친구와 직장 동료 대하는 태도는 각각 다르고, 장소와 상황에 따라 별로 어렵지 않게 적합한 처신을 연기합니다. (눈치 없는 사람이나 이런 걸 못합니다.)

사장이 다른 점은 갑의 입장이라 얼마든지 자기 하고 싶은대로 할 수 있는데도 조절한다는 것 정도입니다.


사적 모임에 불려 갔다고 감격에 겨워 무조건 충성충성을 외치며 굽신 거린다고 인너 서클에 받아 들여지진 않습니다.

사적 모임에는 계속 불려 갈 수 있지만, 따까리 정도나 되겠지요.

말귀 잘 알아 듣고, 무엇보다도 자기 주제를 알고 선을 지키는 모습을 보여야 합격입니다.


잔뜩 취해서 오고 가는 별 중요하지도 않은 얘기 속에서 사장은 여러 가지를 시험합니다.

인생관이나 직업관, 노조에 대한 생각이라던가 회사 조직 내에서의 야망 등등입니다.

탐욕은 어느 정도인가도 시험합니다.

취해서 호기 부리는 척 하면서, "뭐 바라는 거 없냐? 기분인데, 어지간하면 다 들어 줄게" 하는 식이지요.

아무 것도 바라는 거 없다고 하면 불합격입니다. ㅋㅋ

사장이 혈연관계도 아닌 생판 남을 아랫사람을 부리는 수단은 결국 돈입니다.

속물적 탐욕이 탐욕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믿을 수 없고, 진심으로 탐욕이 없는 사람은 부릴 수 없습니다.

사장이 별 부담 느끼지 않으면서도 생색은 낼 수 있는 걸 말하는 게 정답입니다.

가장 최악의 대답은 월급 올려 달라고 하는 겁니다.

절대 금기 중의 금기예요.

그 얘기 하는 순간 분위기 싸해지는 걸 볼 수 있을 겁니다.


사장의 마음을 흡족하게 하는 처신을 했다고 해서 '합격'이란 건 없습니다.

사장은 아무도 믿지 않아요.

자기 주변 거의 모든 사람들이 돈을 목적으로 자신에게 호의를 보이는 상황 속에서 산다면 당연히 그렇게 됩니다.

인너 써클 후보 기간을 거쳐, 인너 써클에 속하게 되어도 '보장'이란 건 없습니다.

사장 눈밖에 나면 언제든지 내쳐질 수 있는 상황 하에서, 회사가 아닌 사장을 우선하는 처신이 무엇인지를 배우고 익히고 끊임없이 시험 받으며 회사 생활을 하는 겁니다.


인너 써클에 발을 들인 대가로 주어지는 것은 우선 아량입니다. (라인 탔다거나, 이쁨 받는다고도 하지요.)

사장이 질색하는 것만 아니라면 좀 잘못해도 봐줍니다.

가끔 땡땡이 좀 쳐도 봐주고, 적당한 거짓 핑계를 대고 칼퇴도 할 수 있습니다.

사고 쳐도 어지간하면 공개 장소에서 박살 나지 않고, 조용히 불려가 적당히 훈계만 받고 끝납니다.

고작 그 정도냐 싶겠지만, 그 정도만으로도 조직 하부의 고만고만한 구성원들 사이에서는 '남다르다'는 평판을 받게 됩니다.

별 것도 아니고 딱히 비용이 들어가는 것도 아니지만, 인너 써클에 들어갈 싹수를 가진 사람에게는 특별 대우를 받는다는 충족감과 그로 인한 고양감을 느끼기에 충분합니다.

사람에게 충성하는 사람은 그 사람이 보여주는 약간의 총애 만으로도 큰 기쁨과 보람을 느낍니다.


인너 써클 안에서 점점 올라가다 보면 (사장의 총애가 점점 커지다 보면), 권력도 갖게 됩니다.

누군가를 잘되게 하는 능력까지는 아니더라도, 누군가를 엿되게 하는 능력 정도는 어렵지 않습니다.

잘되게 한다는 건 비용이 들지만, 엿되게 하는 건 그렇지 않으니까요.

누군가의 잘못을 적당히 덮고 넘어가도록 도와주는 정도도 아주 가끔이라면 가능합니다.

크게 박살 낼 거 덜 혼내는 데는 비용이 들지 않으니까요.

네, 비용이 중요한 포인트입니다.

비용이 들지 않는 선이라면, 어느 정도 무마할 수 있는 권력이 생기는 거지요.

뭐 여기까지는 누구나 생각해보면 알 수 있는 것들입니다.


인너 써클에 들어감으로써 발생하는 가장 확실한 혜택은 돈입니다.

법인카드로 회식하는 우회적인 방법은 뻔한 거고요, 사장이 하사금을 내리기도 합니다.

다 큰 어른들이, 그것도 회사 조직 관계에서 용돈을 주고 받는다니, 믿기지 않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돈만큼 강력한 게 어디 있을까요?
사장이 하사하는 돈은 액수부터가 달라서 단맛이 엄청납니다.
게다가, 현찰입니다.
모든 돈 거래가 디지털 숫자로 오고 가는 현실에서, 표도 안나고 흔적도 없는 현찰은 단숨에 이성을 날려 버릴 정도로 강렬한 감동을 줍니다.

이런 것들에게 혹해 길들여져 가다보면, 어느새 자신이 경멸해 마지 않았던 직장 상사와 점점 닮게 됩니다.
무능 무책임해서, 부하직원의 공을 가로채고, 잘못은 뒤집어 씌우는데, 아부는 잘해서 승진은 척척하는, 그러면서 다른 직원들을 미련하다고 깔보는 그런 사람이 되는 거지요.
자신은 절대 그렇게 살지 않겠다고 생각하겠지요?
처음부터 사장의 개가 되겠다고 마음 먹고 입사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게 길들여 지는 거지요.
권력과 돈의 단맛은 강력해서, 이겨내는 사람은 흔치 않습니다.
더군다나 위로 올라갈 길은 오로지 개구멍 밖에 없다는 회사의 구조를 알게 된다면 더욱 그렇습니다.

그래서 뭐 개가 되시라 권하는 거 아닙니다.
어차피 개는 원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품종 보고 간택되어야 합니다.
간택 되어도 우선 개의 개로, 아니면 개의 개의 개로 시작해야 하고요.
그저, 성실히 일하고 실적을 올려 인정 받으면 위로 올라갈 수 있다는 착각을 깨시라는 겁니다.
원래 그 판이 그렇게 생겨 먹었다는 사실을 알기만 해도 헛된 꿈에 속아 언젠가는 인정 받겠지 하면서 회사에 인생 갈아 넣는 멍청한 짓 할 일도 없고, 그러다 한 순간에 떨려 나가 배신감에 치를 떨며 망연자실 하게 되지도 않겠지요.

잘리지 않을 정도로만 적당히 일하고, 에너지 남겨서 다른 일거리 미리 대비하는데 쓰는 게 낫다는 것도 깨닫게 될테고요.


이런 글 주절주절 적는 제가 무슨 사회나 회사에 되게 불만 많은 불평분자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겠습니다.

회사의 불합리한 처사에 용감하게 맞서는 무슨 정의의 사도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겠고요.

저언혀 아닙니다.

그냥 월급 받는 만큼 일하고요, 직장 상사가 불합리한 이유로 깨면 적절히 수그립니다.

상사의 지랄 감수하는 것도 월급값의 일부라고 그냥 감내하고 넘깁니다.

다만 무시는 안당합니다.

회사의 인정을 받는 것에 대한 기대가 없다는 걸 상사도 알기 때문에 함부로 대하진 못합니다.

욕망하는 것이 있어야 그 욕망을 들어준다는 걸 미끼로 흔들며 더 심한 짓을 참으라고 강요할 수 있는 거니까요.

대신 한 회사에 오래 다니긴 어렵습니다만, 그거야 뭐 무시 당하지 않는 대가로 감수해야 할 일이지요.

어차피 한 회사 평생 다니다 정년 퇴직 하는 건 매우 이례적인 세상입니다.

원래 지 맘대로 부리며 무시할 수 없는 직원은 불편할 수 밖에 없습니다.

뭔가가 필요한 사람은 그에 대한 불편을 감수하지만, 필요가 없다면 감수할 이유도 없겠지요.

오래 다니고 싶다는 욕망도 휘두를 약점이 될 수 있기 때문에 갖지 않습니다.


소처럼 일하는 사람보다, 헛된 기대 안갖고 적당히 일하는 사람이 오히려 회사에서 무시 안당합니다.

채찍질 강제해도 되는 노예제 시절도 아니고, 최소한의 인권은 법으로 보호 받을 수 있다지만, 법도 스스로 노예로 살겠다는 사람을 보호해주진 않습니다.

적당히, 잘리지 않을 정도로, 욕 좀 먹으면 '이것도 월급값인가 보다'하고 넘기면서 대충 그렇게 넘기면 최소한의 주체적 삶은 사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