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한당 명랑쾌활

단상

악역을 맡겠다 = 나쁜 짓을 하겠다

명랑쾌활 2020. 1. 3. 10:47


"난 지금 악역을 맡고 있는 거야."

군대 똘아이 선임이 입버릇 처럼 하는 말이잖아.

회사 악질 상사가 하는 소리기도 하고.

최근엔 윤 머시기 검찰총장도 그런 소리 했지.


'악역'이라고 하니까 '원래는 악하지 않은데 좋은 의도를 가지고 부득이하게' 그 역할을 맡는다는다는듯한 느낌이 들지?

근데 말야, 우리가 사회적 문제에 대해 언제부터 의도를 가지고 행위를 판단했지?

군대 똘아이 선임이 군기를 잡겠다는 좋은 의도를 가지고 후임들 기합 주고 패면 용납했던가?

회사 악질 상사가 회사를 위한다는 좋은 의도를 가지고 부당한 지시와 폭언을 하면 괜찮은 건가?


우리가 의도를 참작해서 이해해 줄 수 있는 건 모두가 인정하는 '순수한 사적 관계' 뿐이야.

가령, 엄마가 애 버릇 고친다고 종아리를 때리는 건 폭력 자체는 나쁘더라도 참작은 할 수 있어.

나쁜 길로 엇나가는 친구 정신 차리라고 욕하고 주먹질 좀 하는 것 역시 명백한 폭력 사건이지만 참작은 할 수 있는 거라고.


영화 속 악역이란, 스토리 갈등 구조의 긴장감을 높여 재미를 주기 위해 나쁜 짓을 벌이는 역할이잖아.

영화에선 그래도 돼. 허구니까.

사기를 치든, 연쇄살인 범죄를 저지르든, 나라를 팔아 먹든 괜찮아.

영화 속에서 천하의 나쁜 놈 역할을 맡았던 배우라도, 영화 밖 현실에서는 '연기'라고 이해 받는 게 당연하지.

그런데, 사회에서 악역을 맡겠다는 건 얘기가 다르지 않나?

공적 영역에서 악역을 맡아 나쁜 짓을 저지른 걸, 사적 개인으로서는 면죄부 주고 그러나?

이완용도 나라 팔아먹으면서, "조선 백성들을 위해 악역을 맡았다"라고 얼마든지 갖다 붙일 수 있어.


현실 사회에서 악역을 맡겠다는 건 그냥 나쁜 짓 하겠다는 소리야.

그나마도 타인의 비난에 맞서 자신이 옳다는 신념을 당당히 내세우는 것도 아닌, 자신의 행위를 순교자의 선함으로 포장하여 면죄 받으려는 비겁한 합리화일 뿐이야.

당하는 사람 입장에선 악역인지 진짜 나쁜 놈인지가 뭔 상관이람.

그냥 나쁜 짓 하는 놈일 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