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한당 명랑쾌활

여행기?/인도네시아

[빵안다란 바뚜까라스 Batukaras Pangandaran] 6/10. 르곡 자와 등대 Mercusuar Legok Jawa

명랑쾌활 2018. 10. 8. 11:44

르곡 자와 등대는 관광지가 아니라 실제로 운영하는 등대다.

하지만, 구글링을 통해 몇몇 여행객이 등대에 올라 찍은 사진을 봤기 때문에, 가능할 거라고 봤다.

마침 문 앞에 관리인으로 보이는 사람이 있길레 올라갈 수 있냐고 물어봤더니, 흔쾌히 올라가도 된다며 입장료 1만 루피아를 내란다.

당연히 영수증 따위는 없다. ㅋㅋㅋ


평소에는 등대 출입문을 쇠사슬로 잠가 놨다.


이런 회전계단을 8세트 올라가야 한다.


쇠로 된 발판을 딛고 체중을 싣자, 으지직 소리를 내며 살짝 움푹 내려앉는다. =_=

관리인 말로는 2012년에 세워진 등대라고 한다.

그 말은 다시 말해, 지난 5년간 전혀 보수 관리가 안되었다는 뜻이다.

인니는 새로 공사하는 것도 각종 승인 절차와 비리, 공사기한을 늘리려 느릿느릿 일하는 주민들 관행 등 때문에 엄청 더디지만, 지어놓은 것 보수에 들어가는 예산의 거의 없다시피 하다.
그래서 정상적 이용이 거의 불가능해 질 정도로 심각해져야 비로소 거의 새로 공사하는 수준으로 보수 작업을 한다.

계단 내려 앉을까 체중을 제대로 못실으니, 양팔로 각기 기둥과 난간에 매달리듯 잡아 체중을 분산시켜가며 계단을 올라야 했다.
이런 사서고생을 할 때마다 쓰는 마법의 주문을 중얼거리면서 꾸역꾸역 올라갔다.
"내가 미쳤지, 씨발~ 맨날 그러고도 또 이 지랄을 하네, 씨부랄~"
이 마법의 주문을 외우면 신기하게도 힘들지 않고 힘이 펄펄 솟구치는 일은 있을 턱이 없지만, 그냥 실실 웃음이 나오는 효과 정도는 있다.


회전계단 2세트를 올라 2층에서 찍은 사진

여기까지만 올라도 충분히 경치가 좋다.


8세트를 오르니 사다리가 짜잔~

다행히 사다리는 튼튼했다.


단, 벽에 고정한 나사 이음부가 약간 헐거워서 흔들린다.


등대빛 전력은 소박하게 자동차 빳데리로~


경치를 보려 나서다가 식겁했다.

출입문 정면에 보이는 난간의 가로봉 하나가 녹슬어 떨어졌다.

순간 소름이 쫙 끼쳤다.

이거 아무 생각없이 기댔다가 난간 무너지는 거 아냐? @_@;

여기는 인니고, 이 등대는 5년 여 전에 지어졌다.


등대 벽에 붙어서 걷고, 사진을 찍을 때도 엉덩이를 뒤로 쭉 빼 벽에 밀듯이 붙이고 서서 팔만 뻗어서 사진을 찍는다.

하반신이 아주 그냥 저릿저릿했다.


뭐... 그래도 경치는 좋았다.

바다도 좋았지만, 이렇게 초록이 무성한 열대숲을 내려다 보는 것도 드문 경험이다. 


'아, 이제 한 바퀴 돌았으니 내려가야지...' 라고 생각했다가, 이렇게 가로막힌 걸 봤을 때의 기분이란... @_@;

그나저나 저 사다리를 밟고 올라가서 뭔 작업을 한다는 건가? @_@;;


등대 안으로 들어가기 전, 마지막으로 찍은 사진

이 사진 찍을 즈음에는 공포가 드디어 손까지 올라왔는지, 휴대폰 꽉 움켜 쥔 손가락이 말을 듣지 않아 촬영버튼도 누르기 힘들었다. ㅋㅋㅋ


내려갈 때는 올라갈 때보다 배는 더 힘들었다.

계단에 체중을 싣지 못하고 거의 팔로 난간을 지탱해가며 내려가야 했다.

다 내려와 땅을 밟고 나서야 아드레날린 분비가 멈췄는지, 다리힘이 풀려 나무 그늘 밑에 털썩 주저앉아 한참을 있었다.

심장이 미친듯이 뛰고 어질어질 했다.

고소공포증의 느낌이 이런 걸까?

높은 곳을 그다지 무서워하지 않는 편인데, 내 스스로 만들어 낸 불신의 공포에 사로잡혔던 것 같다.


르곡 자와 등대에 오른 건 이런 저런 의미에서 신기한 경험이었다.

다음에 오면 다시 올라갈까?

딱히 꺼려지지는 않는다.

다만, 튼튼한 시멘트 난간이 있는 3층까지만 올라가서 느긋하게 경치를 감상할 거다.


반드시 산 정상에 깃발을 꽂아야 의미가 있는 건 등산이 아니라 등정이다.

적당한 곳까지 가다가 적당히 즐기고 적당히 내려오는 등산도 충분히 의미가 있다.

산에 오르면 반드시 정상을 찍어야 하고, 회사에 들어가면 반드시 사장은 해야 하고, 사업을 하면 무조건 대성공을 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도 있지만, '꼭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드는 사람도 있게 마련이다.

자신이 하고자 하는 바가 등산인지 등정인지, 왜 하는 것인지를 잊지 않으면, 타성에 따라 무리하는 일은 많이 줄어들 거다.

누군가 "기왕 그 거 했는데, 고작 거기까지 하고 마는 거야?"라고 한다면, "남 일에 신경 끄시고, 정 심심하면 조시나 까시지요."라고 정중히 답변하면 그만이고.

'내가 미쳤지~' 하면서 사서 고생하고 느낀 점이 있다면, 뭐 그런 정도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