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한당 명랑쾌활

Indonesia/서식기 III

갑의 무책임한 결제 업무 분장

명랑쾌활 2017. 12. 14. 11:31

인니에 진출한 한국업체 중에는 봉제업체가 아무래도 가장 많습니다.

저임금인 봉제 산업으로 경제 부흥에 성공한 국가 중 가장 끝물이 한국이라서, 저임금 기반의 공장 운영에 관한 가장 발전된 노하우를 갖고 있기 때문이고, 인니는 저임금 산업에 적합한 나라이기 때문이지요.


저개발 국가가 산업을 발전시키려면 봉제가 적합합니다.

워낙 흔하고 저렴해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별 생각을 하지 않지만, 옷은 복잡한 과정과 품이 드는 생산품이거든요.

실을 만들고, 염색을 하고, 천을 짜고, 자르고, 꼬매고, 자수나 프린트를 하는 건 기본이고, 단추나 지퍼, 똑딱 버튼, 상품텍도 달아야 하고, 세척해서, 포장까지 해야 합니다.

그러다 보니, 봉제업체에서 파생되는 하청업체들이 많은데, 대부분 복잡한 첨단 기술이 필요없는 분야입니다.

기술력이 부족한 국가가 초기 산업을 발전시키는데 딱 적합한 분야, 이른바 경공업이지요.


현제 인니의 한국 봉제업체 중 가장 큰 업체는 3곳입니다.

중소기업이 대기업 1차 하청이 되려고 애를 쓰는 가장 큰 이유가 결제가 깔끔하기 때문이듯, 큰 봉제업체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유독 결제가 지저분하기로 유명한 곳이 하나있죠.

자금이 없어서 그런 건 아니고, 한국 본사의 시스템 탓입니다.

각 브랜드별로 독립적인 담당자가 생산 계획과 발주, 결제를 관리하는 시스템인데, 담당자가 대부분 30세 전후의 어린 것들(?)이라는 게 문제지요.

브랜드 담당자는 주임급이고, 대리급만 돼도 이미 과장급 관리 업무를 보고 있습니다.

(워낙 빡세다 보니 이직율이 높고, 인건비 문제로 중간 관리자로의 진급은 인색해서 그럴 거라 생각합니다. 제 전직장이 그랬거든요. ㅋㅋ)

이제 신입 딱지 막 뗀, 서른도 안된 사원에게 주임이라는 딱지를 붙여주고 '독립적인' 담당자 직무를 떠넘기니 사고가 안나는 게 이상한 거죠.


신입 딱지를 뗀다는 건, 시키는 일은 그럭저럭 할 수 있게 됐다는 뜻입니다.

신입은 시킨 일도 엉망으로 하거나, 아예 손도 못대기 때문에, 기존에 있던 직원의 일을 더 보태는 존재거든요.

진급 속도가 회사마다 달라서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대리 밑 주임이면 보통 일을 망치거나 하진 않지만 아직은 일머리가 부족한 수준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회사 일이 너무 많아서 업무 시간 내에 처리를 못하는 상태를 보통 '일에 치인다'라고 표현합니다.

정말로 회사 일이 많을 수도 있겠지만 그런 경우는 드물고, 보통 대리급 미만이 일에 치이는 경우는 일을 요령있게 해치우질 못해서 그렇습니다.

사소한 거 같아도 지금 꼭 해야 하는 일, 지금 잠깐 해두면 나중에 큰 시간 들지 않는 일, 굳이 지금 할 필요 없는 일, 나중에 한꺼번에 모아서 하는 편이 효과적인 일 등등을 구분해서 그때 그때 처리하면 업무량이 크게 줄어듭니다.

거기에 회사마다 주단위, 월단위, 분기단위로 반복되는 패턴을 알고 있다면, 보다 효율적으로 미리 대비할 수 있게 됩니다.

거기에,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같은 회사, 혹은 고객사나 거래처의 다른 사람과 어떤 연관이 있고, 어떤 의미가 있는지까지 이해하게 되면, 일의 선후가 일목요연해지는데, 이런 것을 보통 일머리를 안다고들 그러죠.

엄마가 1시간 내에 밥, 국, 반찬 서너가지 새로 요리해서 내면서, 간단한 청소나 빨래 널기 등등도 같이 처리하는데, 별로 서두르지도 않는 게 바로 일머리지요.

일머리는 숙달과 관련이 있기 때문에 빨리 배울 수는 있지만, 건너뛸 수는 없습니다.

익숙해지기까지 일정 이상의 시간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 '독립적인' 담당자가 하청업체 결제 처리를 못하고 계속 미루는 일이 터진 겁니다.

우선 일에 치여서 시간이 없어서 미뤘을테지요.
거기에 하청업체 결제 미룬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를 몰랐을 겁니다.
크게는 몇십만불 단위의 금액을 컴퓨터 클릭 몇 번으로 왔다갔다 관리를 하다보니, '고작 몇천불'도 안되는 하청업체 결제 금액은 소소하게 보였을 수도 있겠지요.
그 금액이 결제되지 않아서 직원들 월급 줄 돈 융통하느라 이리 뛰고 저리 뛰어야 한다는 사실에는 생각이 미치지도 않았을 겁니다.
고작 몇천불인데요 뭐.
그러니, 몇 달 째 지저분하게 미뤄서 미결제 금액을 1만5천불을 만들어 놓고는 팽개치고 퇴사를 한 거겠지요. ㅋㅋ


담당부서 과장이 그 담당자가 퇴사를 했다며, '미결제 금액의 자세한 청구 내역을 다시 보내달라'고 결제 독촉 메일을 통해 답신을 보내 왔습니다.

이미 몇 차례나 반복해서 보냈던 자료인데도요.

퇴사하면서 인수인계도 제대로 하지 않은 건지, 인수인계 자료를 찾아 볼 생각이 없는 건지, 하여간 참 개판인 회사입니다.

서른 살 전후의 주임급 직원 한 명에게 직원 몇백명 규모 하청을 휘청휘청하게 만들 수 있는 업무를 맡기고도, 일처리가 제대로 되어 가는지 검증하는 시스템도 없는 연매출 1천만불이 넘는 중견기업이라...

이게 한국의 현실이지요.

그래도 괜찮으니까 그러는 걸 겁니다.

갑이잖아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