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한당 명랑쾌활

단상

언어가 서툴러서 의사소통을 더 잘 하게 되다.

명랑쾌활 2018. 8. 16. 10:08


모국어는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바가 '별 생각 없이' 튀어 나오는 언어다.

또한 머릿속에서 생각할 때 사용하는 언어다.

언어로 의사 표현을 하는데 따로 생각할 필요가 없다.

또한, 교과로 배우기는 하지만, 사전으로 단어 하나 하나의 정확한 뜻을 찾아 익히지는 않는다.

살면서 접하는 모든 곳에서 맥락으로, 또는 타인의 전달로 새로운 단어가 저절로 익혀진다.

그렇다 보니 의사소통의 측면에서 보자면 심각한 결점이 있다.

전달하고자 하는 사람도 정확한 어휘가 아닌, '자기식대로의 표현'으로 전달하고, 전달 받는 사람도 '자기식대로의 이해'로 받아 들인다.

하지만, 모국어는 '별 생각 없이' 표현하고 이해할 수 있는 언어이기 때문에 전달자나 피전달자나 서로 간 이해의 간극을 잘 인식하지 못한다.

그리고 오해가 발생한다.

(네가 그랬잖아? 내가 언제 그랬어? 말 바꾸는 거냐? 생사람 잡네 등등)

이런 사실은 말하기 전에 생각을 해야 하는 외국에서 일상을 살아가면서 새삼 깨닫게 됐다.


나보다 인니에 더 오래 살았고, 현지인과 비즈니스 협상을 진행할 정도로 인니어를 잘 하는 한국인 A씨가 있다.

그런데 그 사람은 부하직원 B에게 업무를 지시했는데, 엉뚱한 일을 하고 있는 경우를 종종 겪는다.

B에게 내가 업무를 지시하는 경우엔 그런 일이 없었다.

A씨의 하소연에 주의깊게 지켜본 결과 이유를 알게 됐다.

A씨는 워낙 유능하고 머리 회전도 빠르지만, 반면에 자기확신과 권위주의적 독선이 강했다.

그 스스로가 일을 알아서 배웠기 때문에 부하직원에게 차근차근 천천히 가르치는데 서툴렀고, 부하직원의 확인을 귀찮아했다.

그런 건 좀 알아서 배우고,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들으라는 식이다.

업무상 지시나 보고도 복종을 원했고, 직원의 해명을 변명으로 치부하는 경향이 강했다. (이해 안가도 그냥 좀 따르고, 네가 하는 업무를 내가 뻔히 아는데 시답잖은 핑계 대지도 마라.)

요컨데, 지극히 전형적인 한국 꼰대 스타일이었다.

그러다보니, 직원들은 A의 지시 중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 있어도 아주 중요한 부분 아니면 그냥 침묵하고 넘어갔고, 이해가 안된 채로 자기 딴에는 꾸역꾸역 지시에 따르다 보니 엉뚱한 업무결과를 내게 됐다.

그 사실이 드러나 질책을 받는 상황에서 부하직원이 해명해 봐야 A에게서 돌아오는 반응은 뻔하다.

"내가 언제 그랬어? 내가 분명히 이러이러하게 말했던 거 똑똑히 기억하고 있는데?" (그렇게 말한 건 맞는데 그런 식으로는 말 안했음)

"이해가 제대로 안가면 물어봤어야 할 거 아냐! 물어봤다고 내가 화 내냐?" (화는 안내지만 한숨을 푹 쉬면서 억지로 짓는 게 뻔히 보이는 미소를 보이며 다시 설명해줌)

"시키면 시키는대로 할 것이지, 그걸 왜 니 멋대로 해?(이해는 못했지만 어떻게든 해야 하니까)

"게을러서 못한 거 갖고, 어디서 되도 않는 핑계를 대?" (넌 높은 사람이라 네가 시키면 직원들이 재깍 따르니까 빠른 거고, 내가 요청하면 직원들이 지들 할 일 하고 나서 해주거나 씹으니까 늦는 건데, 그냥 네 입장에서만 그렇게 단정하는군)

해명해봐야 10분 깨질 거 20~30분 깨지고 마음가짐이 불량하다면 보너스로 또 깨질테니, 부하직원이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차라리 묵묵히 깨지고 무능한 인간 취급 받고 마는 거고, A도 근본원인은 모른채 똑같은 일 반복하게 되는 거다.


앞서 말했듯이 내 경우는 그런 일이 거의 없다.

인니에 10년 가까이 살았지만 아직도 내가 의사소통에 아무 문제 없다는 자기확신이 없다.

취직해서 초반에 어긋난 의사소통으로 심한 일들을 워낙 많이 겪어서 그렇지 않나 싶다.

아직도 모르는 단어가 많고 뉘앙스도 이해 못한다고 스스로 생각하기 때문에, 집중해서 듣고, 이해하지 못하면 되물어 확인하고, 내 의사를 전달할 때도 몇 번 더 생각하고, 내 의사가 정확히 전달됐는지 재확인하는 게 습관이 됐다.

그러다 보니 모국어인 한국어에 대해서도 돌아보게 됐다.

한국에 살던 시절에는 언변이 좋았고 나름 똑똑하다고 자만심이 강했었기 때문에, 독선적이고 말도 배려없이 한다는 소리도 많이 들었다.

친구를 좁고 깊게 사귀는 편이었고, 아군보다는 적군이 많았다.

성격 문제도 있었겠지만, 보다 직접적으로는 불통이 문제가 아니었을까 생각하게 됐다.

생각에 대한 확신은 괜찮지만, 그 생각을 밖으로 표현하는 언어에 대해서는 주의해야 한다.

타인에 대한 이해에 앞서, 타인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정확하게 이해했는지 항상 주의해야 한다.

타인의 표현을 내 식대로 이해한다면, 오해해놓고 이해했다고 헛지랄하는 경우가 되기 십상이다.

소통은 뜻이 통하는 거지, 말이 통하는 것이 아니다.

말이 말이라고 다 말이 아니듯이, 모국어도 외국어처럼 생각하고 의식해가며 사용하는 습관을 들인다면 보다 소통이 원할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별로 궁금해 하지않을 뒷얘기 : A씨의 독선이 부하직원들에게 끼치는 악영향


B의 경우.

10여 년 간의 필드영업을 경력으로 입사한 B는, 초반에는 업무를 지멋대로 한다고 A에게 매일 깨졌다.

오죽하면 A씨가 '쟨 작은 회사에서 일해서 조직으로 움직이는 큰 회사와는 안맞는다'고 했을까.

그런데 요즘엔 왠일인지 '이제 좀 회사 업무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제대로 잡힌 거 같다'라고 A씨가 칭찬을 한다.

B의 심정을 들을 일이 있었는데 (난 직원들에게 소통의 아이콘이다. ㅎㅎ), 그냥 '저는 바보입니다' 하는 자세로 처신하고 있다며 자조적으로 웃는다.

필드영업 하면서 별의별 인간들을 만나본 경험이 있는 B는 A씨의 성향을 금새 파악하고, 마치 고객에게 대하듯 A씨를 대하고 있는 거였다.

부양가족이 있는 B는 급여때문에 버티고 있을 뿐, 회사와 같이 성장한다는 마음은 바보 코스프레를 시작하면서이미 접은듯 보였다.


C의 경우.

이쪽 업계는 처음인 C는 처음에는 A씨의 칭찬을 많이 들었다.

똑똑하고 프라이드가 강한만큼 책임감도 강해서, A씨의 업무 지시에 '아직 부족하지만 기대 이상'의 결과물을 제출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즘에는 '쟨 아무래도 우리 회사와 안맞는 거 같은데, 어쩌면 내보내야 할 거 같다'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가 됐다.

공교롭게도 그 시기가 B가 칭찬을 받기 시작한 때와 겹친다.

C의 얘기로는 A씨가, '그렇게 말하지 않았는데 그랬다고 우기고, 말이 바뀌고, 이유를 설명해도 그냥 자기 생각대로 속단하고 자른다.'고 한다.

처음 입사 당시만 해도 반짝반짝 똘망똘망한 얼굴로 활기차게 일하고, 실수를 지적하면 바로 인정하고 고쳤었는데, 지금은 얼굴빛도 밝지 않고, 실수를 지적하면 자동적으로 방어적 변명을 하는 태도를 보인다.

부하직원이 직장상사 고를수는 없는 일이고, 억울해도 참는 것도 업무의 하나니 참고 버텨보라고 할 수 밖에 없었지만, 생기 넘치는 꿈나무 하나 버려놓는 거 같아 씁쓸했다.


D의 경우.

역시 A씨의 부하직원으로 한국인이었는데 예전에 퇴사하고 귀국했다.

당시 많은 상담을 했었는데, 요즘 B나 C가 털어놓는 고충과 100% 똑같은 얘기를 했었다.

당시에는 요즘 한국 청년들이 다 그런가 하고 속단했었는데, 지금 생각하니 부끄럽기 짝이 없다.

퇴사 몇 개월 전부터는 얼굴빛이 어두웠다가, 자진퇴사를 결정하고 나서 확 밝아졌던 사실이 기억나 두고두고 미안하다.


A씨의 경우.

나와 부서가 다르고, 나보다 어린 게 천만다행이다.

장유유서를 제대로 배워 나이 대접이 깍듯해서 몰랐는데, 가만히 보니 부하직원이 버티기 힘든 유형의 직장상사다.

단, 매우 유능하기 때문에 그런 A를 버틸 수 있는 부하직원은, 버텨냈다는 점 하나 만으로 유능함을 보장 받는다.

불행이라면 유능한 업무 능력과 별개로 조직관리 능력이 부족하다는 점이다.

뭐랄까, 타인의 입장을 고려하는 뇌영역이 거의 없다고 해야 하나, 권위주의의 화신이라고 해야 하나.

직장상사가 부하직원에게 맞춰서 일하는 건 잘못됐지만, 부하직원이 제대로 일하게 하는 것 역시 관리자로서의 중요 업무이기 때문에 필요하다면 부하직원에 맞춰 주기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으면 좋을텐데...

다른 사람 한 두 명이 그러면 그 사람들이 문제일 수도 있지만, 주변 사람 거의 모두가 그렇다면 문제는 자신에게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으면 싶다.

'넌 지금 유능한 부하직원을 원하는 게 아니라, 그냥 니 말이 이치에 맞는지 판단하거나 토달지 말고 그냥 무조건 따르는 따까리를 원하는 거 아니냐. 따르다 보면 유능해질거라고? 이치에 맞는지 스스로의 주관으로 판단하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발전이 있겠니? 기껏해야 니 말이 무조건 옳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유능한 따까리나 되겠지.'라고 충고해주고 싶지만, 이미 적지 않은 나이에 그런 스타일로 지금껏 살아 남았다면 이미 고치긴 어려울테니 부질없는 짓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