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한당 명랑쾌활

Indonesia/서식기 II

[37시간 만의 귀환] 02. 침수의 공포

명랑쾌활 2014. 1. 24. 08:35

 

 

오후 여섯시가 넘어서야 조금씩 차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이때까지도 몰랐다, 차가 움직이기 시작한 이유는 앞에 길이 트여 차가 빠져서가 아니라는걸.

 

18:27 처음 정체 시작한 지점에서 고작 1km 정도 떨어진 다리

여기까지 오는데 7시간이 걸린 거다.

강은 이미 넘쳐, 강변 집들은 지붕 밑까지 잠겨 있었다.

 

16:37 침수된 도로

 

사람 걷는 속도 정도로 서행하는데, 도로의 침수 높이가 점점 올라간다.

이때까지도 얼마든지 차를 돌릴 수 있었다.

돌렸어야 했다.

극도의 긴장으로 판단력이 흐려져서, 그저 '앞차'만 보고 따라간다.

'앞차'는 화물차다.

일반 승용차보다 차고가 높다!

아차 싶었을 때는 이미 앞뒤로 화물차에 끼이고 옆은 중앙분리대에 막혀 오도가도 못하고 갇혀 버렸다.

 

20:09 불빛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이 깜깜하다.

홍수 지역은 전기를 끊는다.

화물차들도 시동을 끈다.

시동이 켜져 있으면 기름이 소모되고, 기름은 곧 돈이다.

근방에서 유일하게 빛이 있는 곳은 내 차다.

아무 소리도 안들리는 적막 가운데, 배 타고 강물에 나가면 들릴법한 물소리만 사방에서 들린다. 

두려운 마음에 불을 끌 수가 없다.

마을 주민들도 대피했는지 집안에 인기척도 없다.

시커먼 어둠 속에서 딱 봐도 행색이 건전해 보이지 않는 청년 둘이 나타났다.

빈 집 창문에 얼굴을 바싹 들이대 안을 살피는데 아는 사람 집을 보는 행동 같지 않다.

자기 딴에는 티나지 않게, 동료에게 말을 거는척 내 차 쪽을 흘끔 살피기도 한다.

그러다 창문에 방뇨를 한다.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다 다시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어둠 속의 빛은 마음을 안정시키는 동시에 표적이기도 하다.

한국도 안그렇다고 할 수는 없지만, 인니인들은 준법정신이 더 희박하다.

1997년 폭동 때, 살인방화약탈강간 등 많은 범죄가 인니 전역을 휩쓸었다.

사건 관련해서 구글 검색하다가 본 사진 중, 어느 시골 마을 입구 길 복판에 드럼통를 세워 놓고, 그 위에 쪼그리고 앉아 해맑게 웃고 있던 10대 초중반으로 보이는 소년 발치에 사람 머리통 세 개가 놓여져 있는 사진을 잊지 못한다.

아니, 한국 인니를 떠나, 사회 구조와 치안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지역에서 가장 위험한 존재는 인간이다.

나도 시동을 껐다.

 

한 5분 정도 깜빡 졸았을까, 누군가 차문을 두드린다.

순찰 도는 마을 청년 같다.

반대편 차선이 수위가 낮으니 그리로 가랜다.

조금만 앞에 가면 유턴하는 곳 있는데 거기까지는 수위가 그리 높지 않다고 한다.

나쁜 사람이 있으면 좋은 사람도 있다.

 

유턴하는 곳까지 가는데 다행히 차에 물이 들어올 수위까지는 아니다.

차를 돌려 왔던 길로 돌아갈까, 아니면 반대편 차선으로 계속 전진할까.

때마침 오토바이들 대여섯대가 자카르타 방향으로 가고 있다.

길이 열릴 거라는 소식이라도 들은걸까?

그래서 계속 전진하는 바보같은 선택을 또 하고 말았다.

 

23:50 더이상 가지 못하고 서있는 오토바이들

200여m를 더 전진했는데 오토바이들이 서있다.

반대편에서 오토바이 한 대가 온다.

못간댄다. 저 앞에 가면 물이 허리까지 온다고 한다.

망했다. 지금 있는 곳도 위험하다.

오른쪽으로 갈 수록 점점 낮아지는 지형이라 차 돌리기도 위험하다.

저 앞쪽이 그나마 수위가 낮아 보인다.

일단 거기까지 가서 상황을 보기로 했다.

이미 더이상 앞으로 전진할 마음은 사라졌다.

 

다음날 04:19

중앙분리대 유턴하는 곳이 물길이 됐다.

그 바로 뒤는 중앙분리대가 둑 역할을 해서 그나마 수위가 좀 낮다.

물살 때문에 들리는 물소리가 크지만, 그렇게 흘러지나 오른편의 마을로 꾸준히 흘러 들어가고 있어 수위가 높아지진 않는다.

참으로 바보 같고 또 바보 같다.

지금이라도 차를 돌렸어야 했다.

하지만 두려움에 마비된 판단력이 작동을 하지 않는다.

 

그나마 나은 곳에 왔다고 갑자기 피로가 엄습한다.

그럴만 하다.

전날 8시에 일어나서 지금까지 20시간 동안, 두어 번 정도 5분 가량 깜빡 졸은걸 빼고 내리 운전대를 잡고 긴장 속에 있었다.

여기서 더 나빠질게 뭐 있겠나.

두어 시간만 지나면, 최소한 어둠이라도 가신다.

좌석 시트를 재끼고 눈을 감으니, 좌석에 파고들기라도 할듯 몸이 푹 가라앉는다.

 

05:52 날이 밝아 온다.

언뜻언뜻 사람들 말소리가 들려 선뜻 깼다.

두시간 전과는 달리, 물 흐르는 소리가 약하다.

대신... 차 바닥과 물이 부딪히는 소리가 들린다.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나 창문을 열고 차 밖을 살폈다.

일대 지역이 전체적으로 수위가 올라갔다!

오른편 마을 지역이 더 이상의 물을 포용할 없을 정도로 차오른 거다.

수위가 차오르니 자연히 물 흐르는 소리가 잦아든 거다.

얕을수록 소리가 요란한게 물이다.

 

밟는 곳마다 지뢰라도 되는듯, 계속 그릇된 판단만 했다.

이대로 있어도 어차피 차에 물이 들어와 엔진이 멈춘다.

이제, 더 높은 지대라고 피할 곳도 없다.

이 일대 전체가 수위가 올라가고 있다.

이제 더 이상의 선택은 없다.

 

06:20경 전후진을 반복해서 차를 돌렸다.

낮은 쪽인 도로 오른편에 들이 밀어지는 차 앞부분은 바퀴가 거의 잠겼다 나온다.

다행히 시동은 꺼지지 않았고, 아슬아슬하게 차 안으로 물도 들어오지 않았다.

수위가 더 오른 지금도 문제 없었다면, 몇 시간 전에 돌렸다면 더 여유있었을 거라는 후회보다는, 아무튼 성공했다는 기쁨이 더 크다.

 

06:36 어느 정도 나오니 육지(!)가 보인다. ㅠ_ㅠ

마을 사람들이 다 쏟아져 나왔다.

역시나 일반 승용차라고는 나 밖에 없었다.

서있는 차들은 다 화물차다.

 

하천은 이미 찰랑찰랑 약간 넘쳤다.

그나마도 저거라도 있었으니 피해가 덜했을 거다.

다리에서 낚시하는 사람도, 구경하는 사람도 다 이재민이다.

팔자 좋다고 욕할 사람 없다.

 

플라스틱 통 들고 있는 사람들이 보인다.

물고기 담을 통이다.

범람한 물살에 도로 위로 떠내려 오는 고기들을 줍고 있다.

 

06:40

어제 저녁 6시 반 쯤에 넘었던 다리를 12시간 만에 다시 지난다.

강은 이미 범람했다.

그나마 다리라도 멀쩡하니 다행이다.

 

멈춰서 있는 차량의 행렬이 계속 이어진다.

 

반대편 차선도 이미 점령했다.

 

그나마 차 한 대 지나갈 공간은 남겨둬서 다행이다.

당연한게 아니다.

너무 밀려 있으면, 마지막으로 남은 차선마저 역주행 해서 앞으로 가려는 차가 그리 드물지도 않다.

그러다 반대편 차량과 만나면? 어떻게든 되겠지다.

 

남쪽 높은 지역은 호수로 변한 논을 넘어서 도로까지 넘쳤고,

 

그 물들이 중앙분리대 중간 중간에 터진 곳을 따라 흘러,

 

북쪽 낮은 지역을 채우고 있다.

 

07:11 동쪽으로 갈 수록 상황이 나아진다.

화물 트럭들은 끝이 안보이게 줄줄이 늘어서 있다.

 

무턱대고 중앙분리대를 타넘어 차를 돌리는 버스

탁월한 선택이다.

나도 저런 과감한 결단을 했어야 했다.

 

07:17 차량 행렬이 드디어 끝났다.

 

앞쪽은 모르겠고, 내가 본 것만 30km 가량 차들이 서있었다.

 

화물차들 늘어선 줄이 안보이는 지역에 들어와서야 이제 정상적인 곳에 왔다는 안도감이 든다.

해안 지역은 지겹다.

산길로 돌아 반둥을 지나 고속도로 타고 갈 생각이다.

다시 기름 만땅 채우고 편의점에 들렀다.

전날은 차 안에 굴러다니던 생라면 한 개로 종일을 버텼다.

다시 먼길 떠나기 전에 든든히 먹어둘 만도 하지만, 초코바와 이온음료만 샀다.

두 시간 밖에 못잔 상태에서 언제 도착할지 모른다.

잘 먹으면 졸립다.

생리현상도, 작은 것도 곤란하지만, 큰건 아주 곤란하다.

긴장으로 생리현상을 통제할 수 있다.

미리 마음 먹으면 작은건 10시간 정도는 별 무리 없다.

큰건 이틀 정도도 가능하다.

하지만, 몸에 들어가는게 많으면 장사 없다.

 

7시 반 쯤, 이제 반둥 쪽으로 출발한다.

어쩌면 오늘 중으로 도착 못할 수도 있다고 각오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