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한당 명랑쾌활

Indonesia/서식기 II

언어가 숙련될수록 사고방식도 그나라 문화의 영향을 받게 된다.

명랑쾌활 2012. 10. 15. 22:32

전생에 금발미녀를 처참하게 버린 적이라도 있었던지, 10년간 친해보려고 해도 영어와는 당최 친해질 수 없었다.
그리고 전생에 말레이족 우렁이라도 한 마리 구해줬었던지, 2년 만에 인니어와는 꽤 친한 사이가 되었다.
(뭐 대단히 친한건 아니다.)
인니인들 틈바구니에서 일하면서 그리 공부해뒀던 어휘는 점점 줄어들지만, 생각없이 듣고 무의식적으로 대답이 튀어나오게 되는 일이 점점 늘게된 어느 땐가, 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 사고방식이 변하게 된 것은 꼭 이곳에서 살다보니 젖어들어서만이 아닌거 같다는 그런 생각이다.

1. 이들의 사고방식을 이해하지 못하면 오해하게 되는 표현들을 이해한다. (습득)
2. 그리고 좀더 익숙해지면 그 언어를 내가 필요한 경우에 적절히 사용하게 된다. (숙련)
3. 그런데 그 '필요한 경우'라는 것은, 내가 한국적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다면 전혀 필요할 일이 없다.
난 보통 맞으면 맞고 아니면 아니라고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해 왔다.
(덕분에 아군보다 적이 많았지만 그게 오히려 흡족했다.)
그러나 지금은 나도 아무 의식 없이 '다음에요'라는 표현을 쓴다.
그게 인니의 에티켓이기 때문에 배웠고, 쓰려고 노력했고, 이제는 쓰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그 표현의 본질이 변형된 것은 아니다.
즉, 나는 어느 때부터인가 내 자신 스스로 비겁한(?) 표현이라고 생각했던 그 표현을 아무렇지도 않게 사용하게 된 것이다.
난 그저 에티켓으로 그 표현을 쓰는 것일까?
아니다. 이전의 내 관점으로 지금의 그런 나를 본다면, 난 분명히 인니스러운 사람이 된 것으로 보일 수 밖에 없다.

영어 유창하게 잘하는, 특히 외국 유학파나 살았던 적이 있는 사람들이 왠지 재수 없어 깍쟁이 처럼 보였던 것이 내 영어에 대한 자격지심만은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좀 후련해진다.
한국인의 관점으로 보기에 그들은, 정말로 사고방식의 일부분이 재수 없어진 서양식이 되었던 것이다.
(내 성급화 일반화의 가설일 뿐이고, 당연히 모든 영어 유창자가 그럴리는 없다. 내가 아직 못만났을 뿐이겠지.)

언어를 배운다는 것은 곧 문화를 배운다는 것이다.
에스키모어에는 눈에 대한 표현이 수십가지라고 한다. (함박눈, 싸레기눈, 약간 녹은 눈, 얼은 눈, 빨간 눈, 파란 눈, 찢어진...)
인니에도 낙엽이라는 말은 있지만, 한국어의 낙엽이 주는 그런 심상과 이미지는 전혀 없다.
결국 그 나라 말을 배운다는 것은 그 나라의 풍토, 생활, 정서를 바탕으로 형성되는 문화를 배운다는 것이다.
그리고 언어가 유창해진다는 것은 곧 문화에 익숙해진다는 것이다.
유창하다는 것은 굳이 떠올리지 않고 자연스럽게 표현한다는 것인데, 그러기 위해선 익숙해져야 한다.
그리고 그러다 보면 어느새 점점 동화되어 간다.

한국(에 사는) 사람과 업무적으로 의사소통 하다보면 요즘 부쩍 인니사람 다 됐다는 소리를 듣는다.
문제는 부정적인 의미로 쓴다는 것.
이 나라와 한국이 다른 부분을 설명하면, 적대적인 거부감을 갖는 모양이다.
뭐 자꾸 안된다는게 많으니 엿같기도 하겠지만, 한국인 특유의 '하면 된다'를 우길게 있고 아닌게 있다.
월급 몇푼 주면 현지인의 가치관과 문화마저도 한국식을 강요할 수 있다는 오만한 착각이 우려스럽다.
그런 발언 안에 한국 문화가 더 낫다는 근거없는 우월감이 역겹다.
자식들 포경하는데 부모가 하루 쉬어야 하는게 뜻밖일 수는 있겠지만, 왜 기가막히다고 욕을 하는는 건지.
(이것도 웃긴다. 이건 뭐 종교적인 이유도 아닌데 어지간한 남자는 다 깠고, 안까면 놀림 받는 나라는 한국 밖에 없다.)
서양인이 설날 2,3일 쉬는거 보고 뭐라 욕하면 뭐라고 할 것인지.
이들 관점에서 보는 한국인의 삶은 끝없는 과중한 업무에 치여, 회사보다 더 중요한 가족과의 시간도 제대로 가지지 못하는 불쌍한 삶이라는걸 알까?
회사일이 바쁘면 자녀 졸업식도 못가는게 근면하고 성실하다고 칭송을 받는 사회가 정상인지, 이제는 의문이 든다.
그런 '당연한' 것에 의문을 갖는게 이상한 거라면, 쿨하게 인정한다.
난 인니사람 다 됐나보다.
그런걸 당연하게 생각함으로 한국사람으로 인정받느니, 인니사람 다 됐다는 소리가 오히려 칭찬이다.
저녁이 있는 삶...
한국보다 못살긴 해도, 인니에는 늘 저녁이 있었고, 지금도 당연히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