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한당 명랑쾌활

여행기?/인도네시아

Go East. 28. 닫는 글. 가까이 다가가려 했지만 더 멀어져 버린...

명랑쾌활 2010. 12. 31. 12:55
시간 순으로...

족자에서 만났던 호쾌한 여행사 직원 이르완과 그가 사준 점심.

비양심적 사기의 원흉, 프로볼링고 시나르자야 여행사와

평생 잊기 힘들 쩨모로라왕의 악몽의 숙소.

뭐 사는게 다 그런 거겠지만, 왠지 타인의 불행을 먹고 사는 거 같아 얄미웠던 브로모 화산 전망대 부근의 오토바이 기사들.

그 말도 안되는 일들을 겪고도 다시 활짝 웃을 수 있는, 강한 웨스턴 배낭여행자들.

불행은 행운과 함께 온다.
그 딱한 상황의 내게 선뜻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 준 발리 느가라 경찰, 이다바구스 씨와 그의 가족.

덴파사르에서 우붓까지, 시간 두 배 걸릴 정도로 빙 돌아서 오느라 수고 많았을 택시기사.

내 기억 속의 우붓을 좀더 푸근하고 아름답게 만들어준 청년들.

이런게 여유롭고 잔잔한 황혼의 즐거움이라는 걸 보여준 재즈까페의 멋쟁이 할머니.

띠르타 음뿔 사원 뒷산 고아원 아이들.
그 아이들이 그런 행동을 하게 된 건 누구 탓일까?

오지랍 넓고 유쾌한 로까 하우스 주인 아주머니.
떠나는 내게 차에서 먹으라며 싸준 발리 오렌지는 한국 귤보다는 맛이 없었지만, 따듯한 맛이 났다.

불행을 조장해 놓고 선행으로 포장해 먹고 사는 울루와뚜 사원의 강탈물 회수꾼들과 그들의 훌륭한 파트너, 원숭이 일당.

물건을 팔기 위해 호의를 얻는 것은 좋지만, 그 호의를 얻기 위한 방법에 진정성이 없어서 나를 실망시켰던 승기기의 액세서리 행상 청년 아르띠.

개떡 같은 싸가지의 리나 호텔 지배인.

2천 루피아에도 얼마든지 양심 팔아 먹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 승기기 해변 입구 문지기.

그래도 변함 없이 아름답게 빛나던 롬복 밤하늘의 은하수.


원래는 친구와 차를 랜트해서 대도시 자카르타의 몰개성한 문화를 벗어나, 자와섬 바닷가를 따라 일주하며 시골마을들에 들러  날것의 진짜 인니 문화를 보고 느끼고 체험하는 여행을 계획했었는데, 어찌어찌 사정이 생겨 친구가 못가게 되어 취소되었습니다.
혼자서는 비용도 비용이지만 아직도 위험요소가 많은 것이 시골마을 여행이기 때문입니다.
대신 혼자서도 안전한 유명 관광지 위주의 루트를 계획하고 실행하게 되었습니다.

결과적으로 말한다면, 이렇게 무사히 돌아와서 여행기를 쓰는 것 보면 꽤 성공적인 여행이었다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보다 인니에 대해 생생하게 느끼고 가까워지려고 했던 근본 목적에 비추어 보자면, 실패한 여행이라고도 할 수 있겠네요.
물론, 관광지라는 곳이 어디든 다 장삿속에 밝고 약삭빠르게 마련이지만, 그 정도나 기본 인식이 너무 달라서 많이 실망했습니다.
시골이나 관광지가 아닌 곳은 순박하고 선량한 사람들이 많을 거라고 저도 믿고 싶은데, 워낙 마음의 상처가 많아서 마음이 멀어집니다.

어디든 사람 사는 건 다 똑같다 라고 하는데, 아직은 모르겠습니다.
어디까지나 한국 정서, 한국인으로 살면서 형성된 가치관에 비추어 봤을 때,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집니다.
좀더 이해하고 다가가고자 했지만 오히려 제가 느낀 것은, 그나마 이해했다고 했던 인니인들의 정서도 그저 내 가치관 안에서 억지로 앞뒤를 맞춘 것일 뿐, 사실은 나는 아무 것도 모르고 있었구나 하는 것이었습니다.
선악의 기준이나, 양심, 신뢰, 자존심 등의 개념 자체가 아예 다르다고나 할까요?
(실제로 인니어에는 양심이나 자존심과 정확히 일치하는 단어가 없습니다. 그나마 뜻이 비슷한 단어도 의미가 많이 다릅니다.)
이런 생각을 이 곳에 20년 넘게 사신 어떤 어르신께 말씀 드렸더니, 빙그레 웃으시면서 ' 네가 아직 1년 정도 밖에 안살아 봐서 그러는 거야. 여기 사람들도 다 똑같아.' 라고 하시더군요.
평소에도 과묵하시고, 확실한 것도 어지간하면 말을 아끼시는 분이시니, 그 분 말씀이 맞을 겁니다.
하지만 이런 생각도 해봅니다.
이 곳에 오래 살면서 이곳 정서에 익숙해지면, 자연스럽게 이곳 정서에 맞춰 사람들을 보게 되고, 비로소 똑같아 보이는 게 아닐까.

그래서 이번 여행으로 저는 인니와 더 멀어졌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나마, ' 내가 알고 있다고 생각한 것은 사실 잘못 알고 있었던 것이고, 난 지금 내가 모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정도가 내가 얻은 수확이라고나 할까요.
그에 대한 댓가로 실망을 치뤘지만, 그것도 내 멋대로 기대하고 실망한 것일 뿐, 인니는 원래 여기 이렇게 계속 있어왔으니, 탓할 일도 아니겠군요.

이번 여행에서 느낀 것들을 적어 봅니다.
다음에 적는 내용은 전적으로 제 생각일 뿐, 맞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알고 있었다고 착각했던 생각들을 무너뜨리고 새롭게 궁구하는 중인 것들입니다.
또 다른 착각일 수도 있는, 아직 덜 여문 생각들입니다.
고작 1년 여 산 주제에 다른 문화권의 양식에 대해 논하는 것 자체가 웃기는 일임을 인정합니다.
그냥 이런 것 같더라 정도로 봐주시고, 저 역시 틀릴 수도 있다는 사실을 항상 염두하겠습니다.

1. 돈은 매우 좋은 것이며, 돈을 밝히는 것이 천한 행동이 아니다.
  돈 앞에서는 존심이고 뭐고 없다.
  따라서, 팁 적게 받았다면 아쉽거나 기분 상하기는 하지만 (글쎄...), 그래도 안받는 것 보다는 좋은 거다.
  이걸 팁이라고 주다니, 내가 거지냐? 안받고 만다! 라고 화를 내는 한국 정서와는 다르다.

2. 거절에 겸연쩍어 하지 않는다.
  그래서 일단 무조건 찔러나 본다.
  그래서 상대가 걸려들면 좋고, 아니면 말고.
  척 봐도 안살 사람에게도 눈만 마주쳤다 하면 호객하는 이유가 그래서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제의나 부탁이 거절되면 무안하기 때문에 일단 상대방을 재보고 하는 한국 정서로 보자면, 참 뻔뻔하고 그악스럽게 느껴 질 수도 있겠습니다.
  위 1번 항목과 결합하여, 팁 좀 달라고 참 뻔뻔하게 찔러나 보는 것도 이런 이유가 아닌가 합니다.
  공무원들 뇌물 달라는 것도, 안주면 안해준다 뭐 이런게 아니라, 그냥 지나가듯이 실실 웃으며 달라고 찔러 보는 식입니다.
  거기에 순진하게 반응하면 뜯기는 거지요.

3. 자존심의 개념이 다르다.
  가령 떳떳하지 못한 행동을 하다 걸려서 비난 받았을 때,
  자존심이 무지 상하지만 그 분노는 떳떳하지 못한 행동을 한 자신에게 향하는 게 한국 정서라면,
  그런 떳떳하지 못한 행동을 남들 앞에서 들추고 비난하여 부끄럽게 한 그 사람에게 분노가 향하는 것이 인니 정서 같습니다. (아, 생각해 보니 한국 사람 중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군요. 자기가 잘못하고 남에게 화를 내는...)
  즉, 자신이 자신으로서 존재함을 지키는 마음이 한국의 자존심이라면, 자신이 타인들에게 옳게 존재함을 지키는 마음이 인니의 자존심이 아닌가 합니다.
  그래서 자존심에 가장 가까운 단어인 kebanggaan의 정확한 의미는 '남들에게 자랑스러움' 입니다.

4. 장사에서의 거짓말은 거짓말이 아니다.
  그 거짓말에 속아 거래했다면, 속은 사람이 잘못이다.
  이건 한국도 마찬가지지만, 한국 같으면 개날강도 사기꾼 수준일 거짓말도 허용 범위에 들어가는 모양입니다.

5. 뜨내기에게 물건을 비싼 값에 파는 것은 당연한 행동이다.
  단골에게는 이문이 덜 남게 싸게 팔기 때문에, 그 만큼을 단골이 아닌 손님에게서 더 받는 것이 옳다.
  특히, 외국인은 뜨내기 중의 뜨내기이므로 기어코 당연히 최대한 비싸게 팔아야 한다.
  인니의 독특한 상거래 문화라고 할 수 있는데, 인니인들에게 있어서 흥정이란 지역사회의 사교활동 중 하나이며 즐거운 놀이입니다. (BIPA의 현지인 강사가 그러더군요.)
  이런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개바가지 쓰고 이런 도동넘들 이라고 분노하는 외국인을 보면, 미안해 하기 보다는 저 등신 뭐냐고 오히려 황당해 하지 않을까 합니다.

6. 책임지는 것을 극도로 싫어한다.
  그래서 잘못했다는 사과를 하는 일은 매우 드물다. (사과를 하는 행동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책임지겠다는 의미가 된다.)
  재량껏 뭔가 편의를 봐주는 일도 책임 소지가 있다면 단호히 거절한다.
  인니인을 접하는 대부분의 한국인들이 인정하는 인니인의 성향입니다.
  무책임한 것이 아니라, 책임 자체를 싫어합니다.
  책임져야 할 경우에는 어떻게든 회피하려고 하고, 심지어는 뻔한 거짓말을 해서라도 벗어나려 하기 때문에 억장 무너지는 일이 많습니다.
  그래서 많은 한국분들이 확실하게 문서로 남기는 습관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베트남인들도 이런 성향이 강하던데, 오랜 식민지 생활 때문에 그런 걸까요?
  식민지 치하의 원주민이 잘못에 책임진다는 것은, 파리목숨처럼 죽는다는 것일테니까요.

7. 스스로 대국이라는 인식이 있다.
  따라서 겸손은 좋지만 너무 낮추면 우습게 본다.
  대부분의 인니인들은 겸손한 태도를 좋아하고, 높게 평가하지만, 가끔 별 뭣도 아닌 것들이 깝작대는 황당한 경우도 당합니다.
  겸손하고 예의 바르지만 당당히 행동할 필요가 있습니다.

8. 이슬람은 관용의 종교다.
  이 관용은 타인에 대한 관용이기도 하지만, 자신의 잘못에 대한 관용이기도 하다.
  그래서 자신의 어지간한 잘못을 스스로 용서한다.
  간혹 맞닥뜨리는 선하게 느껴지지 않는 행동을 이해하려는 실마리 정도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뭐, 한국과는 다른 인니의 문화라고는 할 수 없겠네요.
  한국에도 주 중에는 참 세속스럽게 살다가 주일이 되면, 경건한 처신과 절절한 참회의 기도로 한 주 간 쌓인 잘못을 산뜻하게 용서 받고서, 다시 힘차게 세속의 삶으로 돌아가는 분들 많지요.

9. 외국인 (특히 서양인) 들이 많이 찾는 관광지에서는 영어를 사용하는 편이 인니어를 사용하는 것보다 더 이득이다.
  가장 실망한 부분인데, 인니어 할 줄 알면 더 친절하고 잘해줄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외국인이 영어로 깎아 달라고 하면 어느 정도 깎아 주던 것도, 인니어로 흥정하니 이건 이래서 안되고~ 저건 저래서 비쌀 수 밖에 없고~ 하며 차암 유창하게 주절주절 안깎아 주더군요.
  외국인 보기 드문 시골마을이면 모를까, 외국인이 널리고 널린 관광지에서 인니어 할 줄 안다는 건, 더 수월하게 구워삶는다는 것에 불과한가 봅니다.
  하긴, 인니어 할 줄 알아봐야 외국인은 외국인, 열심히 벗겨 먹어야 할 봉이지 제 이득 깎아 먹어가며 잘 해줘야 필요가 없겠지요.


20여 일간의 여행이라니, 그런 호사를 누릴 나이가 아닌데 운이 좋았습니다.
BIPA (인니어 랭귀지 스쿨 과정) 중급을 마치고 여행을 떠나 고급 과정 시작 전에 돌아온 여행인데, 여행기 쓰다보니 어느덧 고급 과정도 졸업하고 나서 끝마치게 되었습니다.
쓸 데 없이 길게 쓴 이유는 외국 생활 중에 가끔 찾아오는 외로움 때문일 수도 있겠습니다.
이렇게 오랜 기간에 걸쳐 쓰게 된 이유는 느린 인터넷과 무자비하게 쏟아지는 과제물 탓으로 전가해 봅니다.
모쪼록 다시 보잘 것 없는 여행기 쓸 기회가 있기를 바라면서, 이것으로 자카르타에서 동쪽으로, Go East 여행기를 마칩니다.
꾸역꾸역 올해는 넘기지 않아 다행이네요.

그동안 제 여행기를 읽어 주신 여러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여러분들께도 꿈꾸던 곳으로 여행갈 수 있는 날이 어서 오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