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한당 명랑쾌활

Indonesia/서식기 V

[회사의 부득이한 사정] 외전 4. 그 때 그 사람

명랑쾌활 2020. 7. 20. 10:20


강찬승 부장은 '안되면 되게 하라'는 식의 전형적인 한국식 공장 관리자였다.

베트남 근무 당시, 다른 직원들을 규합해 반항하던 깡패 출신의 직원을 공장 외부로 불러 맞짱 떠서 굴복 시켜 자신의 심복으로 삼았다는 일화를 자랑스레 얘기하곤 했다. 실제로 그랬는지 아니면 그런 사람으로 보여지길 바랐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성격의 사람이 새로 부임한 공장에서 적당한 대상 하나 잡아 본보기로 박살을 내는 방식으로 자신의 권위를 세우고 기강을 잡으려고 했을 건 뻔하다. 일반 직원 잡아 봐야 웃음거리만 된다. 짱을 먹으려면 그 지역 짱이나 최소한 그에 버금가는 애를 박살내야 한다... 뭐 그런 생각이었을 거다.

그는 공장 내 배후 권력자들 중 생산 총괄을 타겟으로 잡았다. 생산 총괄은 오랜 한국 봉제 업체 경력을 인정 받아 그 자리에 오른 40대 후반 여성이었다. 하지만, 학력이 낮고 가벼운 성격이라 진중함이 부족했다. 작은 체구에 이른 노화로 인해 영락없는 시골의 수다스럽고 드센 할머니 같은 외양이었으니, 만만해 보일 만도 했다. 하지만, 수다쟁이 시골 할머니가 단순히 직급 만으로 몇 천 명의 생산직 근로자들을 휘어잡을 수 있을 리가 없다는 점은 간과한 모양이었다.

벼르고 벼르던 어느 날 드디어 적당한 꼬투리를 잡은 강찬승 부장은 생산 총괄을 박살냈다. 몇 백명의 직원이 다 보는 앞에서 주변 자재를 집어 내팽겨치며, 축구장 넓이의 현장이 쩌렁쩌렁 울리도록 생산 총괄을 질책했다. 생산 총괄은 얼굴이 사색이 되었고, 얼마 후 조퇴를 했다.

그 날 오후 퇴근 시간에 맞춰 동네 깡패들 20여 명이 낫과 몽둥이 등을 들고 몰려 왔다. 그들은 타고 온 차와 트럭으로 공장 출입문을 봉쇄하여 직원들의 퇴근을 막았다. 깡패들의 두목은 생산 총괄의 남편이었다. 그는 강승찬 부장이 자신의 아내를 모욕했다며, 마을법에 따라 처벌할테니 신병을 내놓을 것을 요구했다.

외국인의 부녀자 모욕, 눈 돌아간 주민들, 마을법, 명예 보복 등이 얽힌 문제는 경찰들도 간섭하기 어렵다. 섣불리 통제하려다가 경찰에까지 폭력을 행사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설사 경찰이 출동하여 해산시킨다 하더라도, 나중에 다시 보복할 수 있는 방법은 많았다. 국순 수방 공장은 넓은 논 한 가운데 섬처럼 있었기 때문에 진출입 도로만 틀어 막으면 몰래 도망칠 길이 없었다.

군 간부 출신인 경비 대장의 중재로 깡패 두목과 강찬승 부장은 회사 사무실에서 대면했다. 강찬승 부장은 깡패 두목에게 사과하고, 다시는 모욕적 언사와 폭언을 하지 않겠다고 했다. 깡패 두목은 자기 부인이 정신적으로 큰 충격을 받아 쉬어야 한다며 일주일간 유급휴가를 요구했고, 강찬승 부장은 받아 들였다.

일주일 후 출근한 생산 총괄은 기세등등했다. 강찬승 부장은 여전히 사나웠지만, 생산 총괄과는 가급적 말을 섞지 않고 지시도 다른 직원을 통해 내렸. 생산 총괄 역시 강찬승 부장과 가급적 대면하지 않았고, 혹시 대면하더라도 자극할 수 있는 태도는 보이지 않았다. 더 건드렸다간 한국인 눈 돌아가는 꼴 볼 수도 있다는 걸 알 정도의 눈치는 있었다. 어차피 강찬승 부장은 인니어를 못했고, 생산 총괄은 영어를 못했기 때문에 이전에도 영어를 할 줄 아는 현지 직원을 통해 의사소통을 했었으니, 딱히 직접 대면하지 않아도 큰 문제는 없었다. 대신 강찬승 부장의 히스테리는 영어를 할 줄 아는 직원들에게 쏟아졌다.

이 일화는 오래도록 현지인 직원들 사이에 심심하면 회자되었다. 이야기 속에서 강찬승 부장은 멋모르고 깝족거리다 현지의 무서운 가르침을 받고 꼬리를 만 멍청한 한국인으로 등장한다.



회사 생활이란 게 원래 뒷말이나 구설수에 오를 꼬투리 안남기려 조심해야 하는 법이지만, 강찬승 부장은 그 정도가 심했다. 업무 미팅 내용을 문서화한 보고서에 자신의 발언이 나오는 것조차 극도로 싫어했다. 미팅을 시작하기 전, 외주 업체 직원에게 자신이 하는 말들을 상부에 보고하지 말라는 요구를 한 적도 있었는데, 업무 상 미팅 내용을 보고 하지 않으면 어떻게 하느냐는 외주 업체 직원의 말에 강찬승 부장은 그럼 미팅할 거 없다며 자리를 박차고 나가기도 했다.


언젠가 이런 일이 있었다. 강찬승 부장은 불순한 노조 활동을 하는 창고 직원들이 있다며 외주 업체 직원에게 징계를 하라는 요구를 메일을 통해 보냈다. 외주 업체 직원은 창고 직원들의 소속이 국순이기 때문에 외주 업체는 권한이 없으며, 국순의 관리부서장이 징계 조치를 할 수 있다는 답메일을 보내며, 국순의 관리부서장인 김욱종 차장을 참조로 집어 넣었다. 강찬승 부장은 즉시 외주 업체 직원을 자기 사무실로 호출했다. 사무실로 온 외주 업체 직원을 노려보며 강찬승 부장은 이렇게 말했다.

"내가 최차장님에게 창고 직원 징계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뭐라고 답장 하셨죠?"

"창고 직원이 저희 회사 소속이 아니라서 징계를 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국순 소속이니 국순 관리부서가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저더러 내 일 아니니까 관리부서장에게 얘기하라고 지시하신 겁니까? 본인 위치가 어딘지 생각 못하세요? 회사 업무 그딴 식으로 하세요?"

"징계할 권한이 없어서 못한다고 했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김욱종 차장님 건너 뛰고 국순 총무에게 징계해라 마라 지시할 수도 없잖습니까. 부장님은 지시하실 수 있고요."

강찬승 부장은 테이블을 내려치며 소리쳤다.

"권한이고 뭐고 이상한 소리 하지 마시고, 징계하라면 하세요! 저는 이 공장에서 직급이 가장 높은 부장이고요, 최차장님은 차장입니다! 내가 지시하면, 따르세요!"

외주 업체 직원은 벙찐 표정으로 강찬승 부장을 쳐다 봤다.

"아니, 회사가 엄연히 다른데 무슨 지시를 따릅니까?"

"최차장님 지금 여기서 일하시죠? 그럼 여기 최고 상급자인 내 말을 따르세요. 아니면 협조고 뭐고 일절 없습니다."

외주 업체 직원은 하도 어이가 없어서 그냥 쳐다보기만 했다.

강성찬 부장은 자리를 뜨며 한 마디 남겼다.

"그리고, 업무 메일 보낼 때 생각 좀 하고 보내세요! 제가 분명히 최차장님한테만 보냈는데, 김욱종 차장을 뭣 때문에 넣습니까? 소유통운 사람들 참 음흉하게, 이메일 갖고 수작 좀 부리지 마세요!"


강찬승 부장이 외주 업체 직원을 불러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한 건 결국, 메일에 김욱종 차장을 참조로 넣은 것 때문이었다. 자신이 보낸 메일 내용이 김욱종 차장을 통해 본사에 알려질까봐 극도로 예민한 반응을 한 것이었다. 

이유야 어쨌든, 외주 업체 직원으로서는 평생 기억에 남을 무식한 갑질이었다.



처음엔 외주 업체 직원과 사이가 그리 나쁘지 않았다. 당시 강찬승 부장은 외주 업체 직원과 담배를 피우며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전 사실 돈은 충분히 모아 놨어요. 계집질을 하는 것도 아니고, 딱히 돈 많이 드는 취미가 있는 것도 아니고요. 예전에 이 회사 상사였던 사람이 찾아와서 이 공장 한 번 맡아 달라고 사정을 해서 왔는데, 지금 얼마나 후회하고 있는지 몰라요. 솔직히 지금은 잘라줬으면 해요. 저 추천한 사람 체면도 있고, 제 자존심도 있고 해서 내 발로는 못나가겠는데, 잘라주면 차라리 고맙죠. 여기 잘린다고 해서 일할 곳 없는 것도 아니고, 돈 쪼들리는 것도 아니고."

외주 업체 직원도 전적으로 동감하는 얘기였고, 그래서 자기도 그렇다고 맞장구를 쳤다.

6개월 쯤 후, 외주 업체 직원은 결국 그 곳을 벗어날 수 있게 됐다. 외주 업체 직원이 바라는대로 될 수 있도록 강찬승 부장은 도움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남았다.


하루 빨리 잘리길 바란다는 게 강찬승 부장의 진심인지는 모를 일이다. 하지만, 그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언젠가 반드시 그리 되리라는 건 필연적이다. 영원히 회사에 남을 수 있는 월급쟁이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회사가 자기 것이고, 자신이 회사에 영원히 있을 것처럼 몰두하는 월급쟁이들은 어딜 가나 흔하다.

주인 정신? 애초에 자기 것이 아닌 것을 자기 것처럼 생각하는 건 허망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