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한당 명랑쾌활

Indonesia/서식기 V

한국과 다른 소매업 상품 가격 개념

명랑쾌활 2020. 3. 11. 10:29

인니 고급 마트 '파머스 마켓 Farmer's Market'의 신라면 가격은 13,900 루피아입니다. (고급 마트란 게 다른 뜻은 아니고, 외국인이나 상류층 대상의 제품들이 구비되었고, 동일 제품의 가격대도 좀 높게 형성된 곳입니다.)

현재 환율로 1,159원이니, 대략 한국 시세의 두 배 좀 안되네요.


한인 마트 가격은 13,500 루피아입니다. (사진은 깜빡 했네요.)

그래도 한인 마트가 좀 싸구나 싶겠지만, 사실은 그렇지도 않습니다.


인니에서 가장 매장 수가 많은 대형 마트체인인 '하이퍼 마트 Hyper Mart'의 신라면 가격은 11,990 루피아입니다.


그에 그치지 않고, 다른 날 가봤더니 프로모션으로 10,785 루피아로 떨어졌네요.

판매 촉진을 위한 행사라기 보다는 유통 기한이 임박해서 재고 떨구려고 하는 건데, 이런 경우가 심심찮게 있습니다.

현지 업체 뿐 만 아니라 한인 마트에서도 비일비재합니다.


인니는 물류 및 재고 관리 수준이 전반적으로 떨어지기 때문인데, 할인을 한다고 좋아하기만 할 일은 아닙니다.

재고 관리를 제대로 못하기 때문에, 유통 기한이 임박한 제품이라는 걸 '미처 관리하지 못해서' 프로모션 없이 제 가격에 파는 경우가 더 흔합니다.

유통 기한 임박 제품이 대량일 때나 눈에 뜨이는 것이지, 남은 수량이 자잘한 경우엔 그냥 넘어가는 거지요.

애초에 유통 기한 임박 제품을 일일이 챙길 정도 일처리가 꼼꼼했다면 재고 관리 수준이 그렇게 낮을 리가 없습니다.


재미있는 건 한국의 편의점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는 인니 최대의 소매 유통 체인인 '인도 마렛 Indo Maret'의 제품 가격입니다.
대형 마트나 한인 마트에 비해 오히려 쌉니다.


가끔 프로모션을 하곤 하는데, 가격이 무려 9,900 루피아입니다.

유통 기한도 반 년 정도 남아 널널한 것으로 보아, 판촉 프로모션인 거 같습니다.


파머스 마켓의 열라면 가격은 14,300 루피아입니다.

신라면 보다 비싸다니 생소하지요.

주류 상품이 아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대량 유통 -> 가격 하락)

점유율 경쟁을 하는 게 아니니까요.


한인 마트의 열라면 가격은 12,000 루피아입니다.

그래도 한인 마트라 싸구나 싶겠지만...


하이퍼 마트에서는 11,500 루피아로 더 쌉니다.


파머스 마켓 진라면 가격은 14,300 루피아입니다.

한국에서 진라면은 가격 착하기로 유명한데 말이죠.

이 걸로 보아, 인니 마트에서는 판매가가 반드시 수입 원가와 연동되는 것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참고로, 하이퍼 마트에서는 11,500 루피아, 한인 마트에서는 11,000 루피아로 가장 쌉니다.

한인 마트의 주고객인 한국인들이 진라면 원래 가격을 알기 때문에, 업체 측에서 차마 신라면에 비해 비싸게 책정하지는 못하고, 가능한 한 가장 높게 책정하지 않았을까 추측해 봅니다.


한인 마트의 오뚜기 부대찌개 라면 가격이 4개에 무려 104,000 루피아입니다.

개당 26,000 루피아, 원화로 2,170원입니다.

한국에선 개당 1,000~1,200원 가량이니 거의 두 배입니다.


한인 마트의 가격 책정 방침이 '개당 얼마'의 이윤을 붙이는 게 아니라, 원가에 비례해서 퍼센트로 붙이는 걸로 보입니다.

원가 500원 짜리나 1,000원 짜리나 똑같이 이문 500원 붙이는 게 아니라, 비싸면 이문을 더 붙여 파는 셈인거죠.

물론 수입 관세가 수입가 대비 퍼센트로 매겨지기 때문에 어느 정도 이해는 합니다.

하지만, 그 외 유통이나 보관 비용 등은 동일할텐데, 기계적으로 이문 역시 비례해서 붙이는 건 좀 거시기 하네요.

저 부대찌개 라면은 거의 팔리지 않고 그대로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계속 안팔려 유통 기한이 임박하면 또 세일을 하겠죠.

그러면서, '이렇게 안팔리기 때문에 리스크 비용으로 이문을 높게 책정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할테고요.

글쎄요, 애초에 비정상적으로 비쌌기 때문에 소비자가 외면한 것일 수도 있다고 봅니다만... 뭐 장사 경험 30년이 넘는 업체이니 일반인인 제가 모르는 뭔가가 있을 수도 있겠죠.



인니 생활 초기엔, 대형 마트는 싸고, 편의점은 비쌀 거라고 막연히 생각했었습니다.

'대량 유통 -> 가격 하락'이라는 개념을 너무나 당연하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한국과 같을 거라 생각한 거죠.

뭐 인니 생활 초기엔 회사 기숙사에 감옥살이를 하면서 관리인 역할까지 떠맡았기 때문에, 라면 등 생필품은 가격 따위 확인도 하지 않고 구매했었으니, 뭐가 다른지 의식하지도 못했고요. (어차피 회삿돈 ㅋㅋ)
회사를 옮겨 드디어 감옥살이에서 해방되고서, 제 돈으로 장을 보다 보니 슬슬 가격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수 년 간 지켜 본 결과 알게 된, 한국과는 다른 점 몇 가지 적어봅니다.


1. 인니의 편의점은 편의점이 아니다.

인테리어만 편의점처럼 보일 뿐, 현대식 소규모 소매 유통 체인이다.

한국의 편의점은 기존의 동네 슈퍼와 대형 마트가 차지하고 있는 상권과는 다른 영역을 개척한 것이지만, 인니의 소형 마트는 '기존의 영세한 동네 가게'를 대체하여 잠식한 현대식 가게다.

한국의 동네 슈퍼 같은 개념이기 때문에, 가격이 당연히 비싼 한국의 편의점과는 다르다.


2. 한인 마트라고, 대형 마트라고 해서 반드시 저렴한 건 아니다.

한국은 어떤 형태의 업소인가에 따라 상대적인 가격대 차이가 있을 거라는 인식이 보편적이고 실제로도 거의 그렇지만, 인니는 그렇지 않다.

한인 마트보다 현지 마트에서 파는 한국 제품 가격이 더 저렴할 수도 있고, 소형 마트가 대형 마트보다 저렴할 수도 있다.


3. 판매 가격이 끊임없이 변한다.

각 마트마다 100원에 팔았던 것이 1달 뒤에 90원에 팔기도 하고, 보름 뒤에 110원에 팔기도 한다.

그래서, 어떤 제품이 한인 마트에서 가장 저렴했었다고 해서, 다음에도 당연히 그러리란 법은 없다.

(아마도) 재고 관리 수준이 미비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대체적으로, 제품이 매대에 새로 쫙 깔린 시점이 최고가였다가 점점 시간이 지나면서 가격이 떨어지는 경향이지만, 반드시 그런 것도 아니다.

때로 매대에 새로 쫙 깔린 시점에 프로모션 가격을 때리기도 한다.

한번씩 대량으로 수입 입고 할 때마다 공급 가격이 다르기 때문이 아닐까 추측한다.


4. 청과물 등 신선 식품은 재래 시장이 독보적으로 싸다.

한국은 산지에서 대량 구매를 하는 대형 마트가 재래 시장보다 저렴할 경우도 종종 있지만, 인니는 재래 시장 가격이 비교 불가로 싸다.

이 역시 유통 시스템 수준이 낮아서 그렇지 않을까 싶다.

한국은 재래 시장이라 하더라도 보통 유통 시스템이 두어 단계 이상 거치게끔 되어 있기 때문에 '대량 구매 산지 직송'인 대형 마트에 비해 크게 유리하지 않다.

하지만, 인니 재래 시장은 원래부터 '인근 산지 직송'이라 대형 마트의 '산지 직송'이 큰 이점이 되지 못한다.

게다가, 물류비가 워낙 비싸기 때문에, 대형 마트가 '대량 구매'해서 가격을 낮추더라도 산지에서 거리가 멀면 원가가 크게 낮아지지 않는다.

단, 재래시장은 말도 안되는 저품질 상품을 팔기도 하고, 상황에 따라 상품이 있다가 없다가 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대형 마트라고 해서 상품 품질 보장되는 거 아니고, 상품이 없는 경우가 드문 게 아니라는 게 함정)


아무튼, 한국과는 다르다는 점은 확실합니다.

이렇게 한국과의 차이점을 알게 될 때면, 한국에서 살면서 '너무나 당연해서 생각해 본 적도 없는' 것들 중 많은 것들이 사실은 '그리 당연하진 않다'는 걸 새삼 깨닫게 됩니다.

좀더 확장하자면, 회식, 야근, 상명하복, 회사 지방 발령에 복종하거나 사직, 손님은 왕, 처음 만난 사람끼리 나이부터 묻고 형동생 서열 정하기 등등이 그렇지요.

전 가끔 '한국인으로서의 자기 정체성'이, 한국에서만 살아왔기 때문에 한국 사회의 여러 규칙들이 당연하다고 여기는 한국인들과는 조금 다르게 변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남북 전쟁 시절 미국을 빗대어 보자면, 이미 노예 제도를 폐지한 북부에 살게 되면서 자유 맛을 알아 버린 남부 출신 노예라고나 할까요?

그러니, 아직도 남부의 백인 농장주들(전근대적 사고 방식을 가진 한국 기업의 사장이나 간부들)이 보기엔, 쓸데 없는 물이 든 건방진 노예로 보이겠지요. ㅎㅎ


모쪼록, 여러분들에게도 '너무 당연해서 생각조차 해보지 않았던 것들'을 한 번 쯤 생각해 보시게 되는 계기가 있으시길 바랍니다.

그런다고 사회가 바뀌는 건 그리 없겠지만, 적어도 모르고 당하는 바보는 되지 않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