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취업비자 받으러 싱가폴에 당일치기로 갔을 때 만난 분이 있었습니다.
비자는 대행사에 맡기고 비는 시간에 식물원에 갈 계획이었는데, 그 분도 따라 붙더군요.
식물원 같이 다니면서 꽤 괜찮은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나이는 60세가 넘어 보였지만, 시종일관 예의를 지키고 소탈한 느낌이었습니다.
비자를 받고 헤어지는데, 그 분이 자카르타 나올 일 있으면 연락하라고 합니다.
의례하듯 그러는 게 아니라 몇 차례 강조하며 얘기하는 모습에서 진심이 느껴졌습니다.
한 달 쯤 후 자카르타에 나갈 일이 생겼습니다.
자카르타 가기 사흘 전, 그 분께 연락을 했습니다.
그 분은 스케줄이 확실하진 않지만, 오면 연락하라고 하더군요.
것참... 당일 되어서 다른 스케줄 있으면 어쩌려고 그러시는지...
그래서 굳이 무리하지 마시고, 다음 기회에 뵈어도 괜찮다고 답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분은 그예 꼭 연락하라고 다시 답신이 보내왔습니다.
난감한 일입니다.
자카르타에 가는 건 한두 달에 한 번 정도인데, 그 참에 만날 지인들 제법있습니다.
사람 깊고 좁게 사귀는 성격이다 보니 몇 안되는 좋은 사람들이지요.
갈 때마다 번갈아 만나다 보면, 각각 1년에 한두 번 보는 셈이라 귀한 시간입니다.
제가 뭐 대단한 사람이라 제 시간이 귀하다는 게 아니라, 제게 있어 그 시간이 귀하다는 뜻입니다.
뭐 어쨌든 한 번 믿어 보기로 했습니다.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는 기회이니 감수할만 합니다.
그렇게 해서 좋은 사람 사귈 수 있으면 좋고, 아니면 아닌대로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어 좋습니다.
자카르타에 간 당일, 오후 3시 쯤 카톡을 보냈습니다.
제 메시지는 확인을 했지만 답이 없다가, 6시가 다 되어서야 연락이 왔습니다.
역시나 시간을 내지 못하게 됐다는 내용이더군요.
덕분에 호텔 방에서 맥주와 피자로 저녁 때우는 신세 확정입니다.
정말 죄송하다고 사과는 해왔지만, 기껍지는 않았습니다.
사과로 넘어갈만한 신뢰를 쌓은적 없는 사이니까요.
그 분에게 다시 연락할 일은 없을 겁니다.
이해는 합니다.
나이 예순이 넘고, 학식 깊은 점잖은 사람이라고 해서 반드시 사려 깊으란 법은 없지요.
자신에게 저번 주에도 있었고 다음 주에도 있을 토요일 오후라는 때가, 타인에게는 귀한 시간일 수도 있다는 이치를 인식하는 건 나이를 먹는다고 저절로 알게 되는 것도, 많이 배운다고 깨닫게 되는 것도 아닙니다.
성격이 나빠서 그런 것도 아닐 겁니다.
호인이 좋은 마음에 그런 거라도, 생각 없이 하는 행동은 얼마든지 타인에게 민폐를 끼칠 수 있습니다.
수많은 장점을 가진 좋은 사람인데, 하필 '사려 깊음'이라는 덕목이 부족할 수도 있겠지요.
그냥 그런 분이고, 하필 그 부분이 저와 안맞은 것 뿐입니다.
자기 상황에 따라 바뀔 수도 있는 불확실한 약속을 하는 것은 상대방에게 무례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뭐 상대가 아무래도 좋으니 만나달라고 한다면야 어쩔 수 없겠습니다만, 그게 아니라면 애초에 약속을 잡지 않는 게 옳습니다.
자신의 불확실성은 자신이 감당하는 게 합당한 처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