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한당 명랑쾌활

여행기?/인도네시아

[발리 누사 쁘니다 Nusa Penida Bali] 10/16. 고아 기리 뿌뜨리 Goa Giri Putri

명랑쾌활 2019. 4. 17. 10:25

여기서 사룽 Sarung 을 빌려 입고 입장한다.

사룽을 두르지 않으면 입장할 수 없으니, 사룽 대여료 1만 루피아가 곧 입장료라 할 수 있겠다.

10년 전만 해도 발목 아래 길이의 바지나 치마를 입었다면 사룽을 두르지 않아도 입장 가능했는데, 요즘 발리의 새로운 비즈니스 트랜드다.

종교의 편리한 점 중 하나는 '우리의 규칙에 너의 납득 따위는 필요 없다'는 점이다.


생리 중, 출산 직후, 죽기 직전인 사람은 출입 금지


종교적 규칙의 주요 근거 중 하나는 옛날부터 이어 내려온 전통이다.

옛날엔 여성에 대한 차별이 보편적이었다.

그래서 대부분의 종교적 규칙은 여성에 대한 차별 성향이 내포되어 있다.

현재의 양성평등 가치와 충돌한다.

하지만, 종교에서 신자의 가장 큰 덕목은 무조건적인 믿음, 즉 신앙이며, 의심은 가장 큰 죄악이다. (불교 제외)

오늘날, 종교의 딜레마다.


계단을 보니 나도 모르게 저절로 성스러운 주문이 입에서 튀어 나온다.

와, ㅆㅂ...


계단 중턱에서 내려다 본 풍경


사원 구역 입구

100 계단은 안되었고, 대략 70~80 계단 정도 된 거 같다.


다 올라가니, 사원 관리원으로 보이는 사람이 활짝 웃으며 다가와 돈통을 가리키며 기부를 권한다.

찬양하라~ 종교의 비즈니스적 발전이여~

어떤 종교도 온 세상을 정복하지 못했지만, 돈은 모든 종교를 정복했다.

종교와 마찬가지로 돈 역시 믿음을 전제로 존재한다.

상호 간의 믿음이 없으면 돈은 그저 숫자가 적힌 종이 쪼가리일 뿐이다.

하지만, 돈은 종교가 가지지 못한 덕목을 가지고 있다.

당신이 원하는 것을 실현해 준다.

애둘러 표현하는 일 없이, 즉각적으로, 적나라하게.


예의바르게 미소 지으며 1만 루피아를 기부함에 넣으며 생각했다.

'이 돈이 당신의 신에게 보탬이 되면 좋겠네요. 아, 보답 따위는 필요없습니다. 기부는 보답을 바라고 하는 행위가 아니잖아요.'

사원 관리원이 내 생각을 안다면 어떤 기분이 들지 모르겠다.

재미있는 건, 이런 생각을 거지에게 적선할 때도 똑같이 적용할 수 있다는 거다.

내 생각 따위는 알 리가 없는 사원 관리원은 그 정도면 무난한 액수라는 표정을 지으며, 나를 동굴 입구로 안내했다.

하긴, 이교도의 불경한 생각 따위는 신이 알아서 할 일이고, 그가 할 일은 돈 관리다.

사람은 불경할 수 있지만, 돈은 그냥 돈이다.


동굴 내부 약도


여긴 입구를 찾으려면 정말 안내가 필요하다.


이게 입구다!

체구가 심하게 큰 사람은 들어가지 못할 정도다.


입구를 통과하고 다시 무릎으로 기어야 지날 수 있을 정도로 천정이 낮은 구멍을 통과해야 한다.

위 사진은 통과한 후 찍었다.


그러면 넓은 공간이 펼쳐진다.


천정도 높다.

백 명 이상이 거주할 수 있을 정도의 공간이다.

원시시대나 전쟁 통에 이런 곳에서 숨어서 살았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하지만 동굴 생활이 그리 쾌적하진 않았을 것 같다.

축축하고 무거운 공기가 가득해서, 몸이 뭔가에 눌린듯 답답했다.

정전이 되어 군데군데 있는 전등이 다 꺼지면 꽤 특별한 경험이 되겠다 싶다.


큰 행사가 있으면 여기 모이나 보다.


저멀리 바깥에서 들어오는 빛이 보인다.

동굴 반대편 끝이 바깥과 통하나 보다.



뭔가 종교 의식이 진행되고 있었다.


숨이 확 트인다.

좁은 틈을 통과하여, 점점 무거워지는 몸을 끌고 아무 것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 어둠을 지나, 밝은 세상에 나온다.

태어나서, 점점 늙어 가는 몸으로 미혹의 삶을 지나, 벗어난다.


종교 의식을 마친 현지인 주민과 그와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눴다.

주민들은 보통 뒷문으로 출입하고, 큰 종교행사 때문에 복잡할 경우에만 앞문으로 들어와서 뒷문으로 나간다고 한다.

관광객들도 왔던 길을 되돌아가서 나갈 수도 있고, 이대로 뒷문으로 나갈 수도 있다고 한다.

어두컴컴한 동굴에서 나오자 다시 되돌아 되집어 갈 마음이 들지 않는다.

벗어나면 그 안에서 아등바등 했던 모든 것들이 부질없는 미혹이었다는 걸 깨닫는다.

하지만, 그 미혹의 바다에 빠져 아등바등 하지 않았다면, 해방감 역시 느낄 수 없다.

미혹에 사로 잡혀 부질없는 것을 욕망하며 스스로 고통 받는 어리석은 삶도 의미가 있다.


누가 인니 아니랄까봐, 출구 쪽에 어김없이 관광 기념품을 파는 가게가 있다.


답답한 동굴을 지나 왔기 때문인지, 숲길이 더 신선하게 느껴진다.


큰 길에 나와서 찍은 뒷길 입구


오토바이로 지나쳤던 큰 길을 되짚어 입구로 다시 간다.


노란색 : 동굴 내부 길

하늘색 : 뒷길


아차, 일행이 동굴 입구에 기다리고 있다.

폐소공포증이 좀 있어서 동굴에 들어가지 않았다.

휴대폰 전파도 잡히지 않는다.

계단을 또 올라야 하나... =_=

전파가 안잡히는 지역이니, 위쪽에 있는 사람에게 연락할 방법이 따로 있을 것 같았다.

사룽 빌려주는 가게 주인 아저씨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더니, 씨익 웃으며 걱정 말랜다.

가게 건너편 오두막 같은 곳에 누워 있던 사람에게 발리어로 뭐라뭐라 하니, 인터폰으로 사원 위쪽에 연락했고, 좀 지나서 일행이 내려왔다.

외지인이 봐도 필요하겠다 싶은 것들 대부분은 주민들도 다 나름 방법이 있게 마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