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한당 명랑쾌활

Indonesia/서식기 II

1차 하청사 직원 관점에서 본 대기업 직원

명랑쾌활 2020. 4. 22. 09:07


인니 첫 직장은 한국 1위 대기업의 1차 하청사였습니다.

어쩌다 보니 회사 전체 총괄 업무를 맡으면서 이런 저런 것들을 봤습니다.

근무하면서 인상 깊었던 것 중 하나가 실사 방문 온 원청 대기업 직원들이었습니다.


흔히 (특히 사회 초년생) 대기업 직원이라고 하면 차원이 아예 다른 세계 사람인 것처럼 우러러(?) 봅니다.

하청 점검을 나온 대기업 직원을 제가 직접 옆에서 지켜본 바로도 업무 처리 속도도 엄청 빠르고 스마트한 건 사실

이더군요.

저 같으면 30분은 걸렸을 점검 보고서를 사진 자료까지 삽입해가며 5분 만에 뚝딱 만들어서 전송합니다.

그런데 그 게 머리 회전이 빨라서 그런 건 아니었습니다.

머리가 아니라 손이 숙달되었다고나 할까요?
회사의 업무 매뉴얼이 매우 정교하게 잘 짜여 있고, 판단하는데 불필요한 시간을 낭비하지 않아도 되도록 보고서 폼이나 판정 기준이 명확하게 짜여져 있더군요.
49.9점과 50.0점으로 0.1점 단위까지 점수를 매기는 기준과 그에 따른 판정이 명확하다면, 판단하느라 골머리 썩을 필요가 없겠지요.

중소기업 직원이 상대적으로 일처리가 느릿느릿하고 무능해 보이는 건 업무 기준이 불분명하기도 하지만, 결정 권한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 아닐까 생각합니다.
주어진 업무는 한두 직급 위의 일인데 책임권한이 그렇지 못하니 결정해야 할 사항을 하지 못하고, '자기 선에서 결정해도 되는 다른 해결책'을 모색하려고 무능해 보이는 겁니다.
상대 입장에선 맞다 아니다, 된다 안된다 탁탁 답해야 시원할텐데 어물어물하는 태도가 답답해 보입니다.

그렇다고, 그 결정을 할 수 있는 상사에게 전화해서 물어보기라도 한다면, 상대 업체로부터 '그럴 거면 뭐하러 니가 왔냐?'며 무시 당하기 십상이니 그러지도 못할테고요.


대기업 직원은 대리 직급이라도 결정 권한의 대부분을 갖고 있습니다. (결정을 뒤집고 무마할 힘도 있는 슈퍼갑이니까요.)

게다가 기본적으로 갑 입장이기 때문에 하청사 사장에게라도 위축되지 않습니다.

중소기업 직원이 자기 회사의 손발로서 처신한다면, 대기업 직원은 자기 회사의 후광을 뒤에 업고 대표로서 처신한다고나 할까요.

그래서 결정해야 할 일은 즉시 판단해서 결정하니, 시원시원하고 유능해 보일 수 밖에 없습니다.


뭐 전적으로 제 주관적 생각입니다만, 어지간한 취준생은 그 대기업 들어가서 1년만 관리 당하는 거 버티면 다 그 정도는 할 수 있겠다 싶습니다.

물론 1~3년 내로 빨아 먹히고 떨려 나가던가, 때려치던가 하겠지만요.

톡톡 튀는 인재? 다 개소리예요.

어떤 톡톡 튀는 인재가 들어가도 그 대기업의 관리 시스템 안에 들어가면 딱 그 '대기업맨'이 됩니다.

그냥 공부를 잘 하고, 취업을 위해 유리하다고 알려진 '정형화'된 요소들을 입맛에 맞게 준비 잘 한 인재를 뽑는 겁니다.

어떤 체제에 순응하는 인간이라면, 학교 시스템 안에서는 공부 잘 하고 사고 안치고 선생님 말 잘 들을테고, 회사 취업 응시를 한다면 회사가 원하는 모범 답안을 찾아 회사 마음에 들게끔 준비를 할 겁니다.

괜히 성적 좋은 사람 뽑는 게 아니예요.

애초에 체제에 반항할 생각만 없다면, 어떤 인간이라도 그 대기업에 들어가서 매뉴얼대로만 몸으로 익히면 그 정도 몫은 할 수 있을 겁니다.


아주 튀었던 인재를 보긴 했습니다.

나이 30대 중후반 대리였는데, 원래 담당인 직원이 다른 일정이 있어서 대타로 온 직원이었습니다.

능구렁이도 그런 능구렁이는 처음 봤어요.

하는 짓만 봐서는 50대처럼 보일 정도로 닳고 닳았더군요.

인니 여자들은 어떠냐느니, 여기도 가라오케 같은 게 있냐느니 하면서 아주 노골적으로 접대를 바라더군요.

회사에 방문헀던 대기업 직원들 중 그렇게 티를 내는 사람은 그 대리가 유일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일절 그 비슷한 얘기도 꺼내지 않고, 저녁 식사 끝나고 2차 데리고 가면 '못이기는 척' 끌려 가거나 거절하거나 했습니다.

더 웃기는 건, 그 능구렁이 직원이 그렇게 거하게 접대를 받아 놓고는 정작 실사 평가 점수는 개판으로 줬다는 겁니다. ㅋㅋ

어떻게 보면 영리한 처신입니다.

접대 받고 점수를 잘 주면 향응 비리가 되지만, 점수를 나쁘게 주면 비리 성립이 안되겠지요.

어차피 땜빵으로 온 거고, 지속적으로 얼굴 맞댈 하청사도 아니니 그닥 불편할 거 없고요.

뭣보다도 갑과 을 관계인데 뭘 어쩌겠어요.

하청도 징계 감점 당해서 거래 중단될 수도 있는데, 그깟 접대비 몇 푼 나간 거 터뜨릴 일도 없고요.



대기업 직원도 그냥 사람이더군요.

잘 짜여진 매뉴얼을 뇌에 입력한, 회사의 부품 역할이 몸에 잘 배인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