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한당 명랑쾌활

단상 205

곤란한 부탁을 받았을 때

"생각할 시간을 달라." 사정은 잘 알겠는데... 무슨 얘긴지 알겠는데... 구구절절 어색하게 이런 저런 말 주워섬길 필요 없다. 그냥 일단,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하면 된다. 그러고서 거절할 방법을 찾든, 들어줄 방법을 찾든, 다른 방법을 찾는다. 상대도 당신이 곤란해할 부탁이란 거 안다. 고민을 거듭하다 부탁했을 거다. (그게 아니라면 들어줄 필요도 없다.) 그렇다면, 부탁 받는 당신도 들어줄지 고민할 시간을 갖는 게 당연하다. 보신하라는 게 아니라. 그저 당신 입장이 그렇다. 한쪽만 희생을 감수해야 하는 부탁은 부탁이 아니다. 상대의 부탁을 그대로 들어주는 것보다, 서로를 위해 더 나은 길이 있을 수도 있다. 당신도 사정이 있어서 전부 들어줄 수 없을 수도 있다. 그 게 당신 입장이다. 상대가 즉답..

단상 2024.01.26

삶의 의미고 나발이고

당신이 어떤 목적에 의해 태어났다면, 기쁜 감정이 들까, 불쾌한 감정이 들까. 당신이 의도에 의해 태어났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거의 대부분의 인간은 별다른 목적 없이 태어났다. 어디 써먹으려고 나온 게 아니다. 거대한 참사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인생을 허무하게 느낀다고 한다. 희생자 중엔 평소 늘 타인을 배려하고 양보하던 사람도 있었을 거다. 생존자 중에 나쁜 사람, 타인에게 해를 끼치는 사람도 있을테고. 생사를 가른 이유가 체력이나 기민한 판단력이 아닌, 그저 운이다. 내가 살아 남은 건 착한 일을 많이 해서가 아니라, 그저 마침 이 곳에 있어서다. 의도가 없는 죽음이란 건 그래서 무자비하다. '무슨 짓을 했기 때문에' 당하는 죽음이 차라리 인간적이다. 인간이 목적 없이 태어났다는 사실..

단상 2024.01.19

우린 서로 당연히 다르다

우리는 흑도 아니고 백도 아닌, 그 사이에 어딘가에 있으면서 흑이나 백 쪽으로 약간 치우쳤을 뿐이다. 성격이 소심한 사람이라고 해서 모두 똑같은 게 아니다. 소심한 정도는 모두 다르다. 이기적인지, 성급한지, 폭력적인지, 교활한지, 비겁한지, 성향 각각은 모두 정도가 다르다. 그리고 그 각자 무수히 다른 지표들이 모여서 한 사람의 성격을 형성한다. 우린 서로 당연히 다르다. 사람을 무언가를 하려고 움직이는 동인은 세 가지다. 하고 싶어서거나, 하기는 싫지만 한 후의 보상 때문이거나, 하기는 싫지만 안했을 경우 겪을 대가가 더 싫거나. 그런데, 하고 싶다거나 싫다는 감정도 사람마다 각자 그 정도가 당연히 다르다. 우리 애는 왜 공부를 안할까. 옆집 애처럼 진득하게 하지 못할까. 감각하는 바가 달라서 그렇다..

단상 2024.01.12

소유보다 일상

잠을 청하려 눈을 감은 상태에서 생각해본다. 이대로로 잠들고, 다시는 깨지 않는다고. 내 책상이 어떤 모습이었는지, 통징 잔고도 생각해보고, 박스에 보관하지만 몇 년 간 거의 열어보지도 않은 물건들은 뭐였는지, 내 옷들은 어떻게 될지, 하던 일은 어떻게 될지. 처음엔 생각을 오래 이어가기 괴롭다. 시람은 본능적으로 죽음을 현실적으로 인지하는 걸 외면한다. 괜찮다. 정말 오늘일리는 없다. 내일이라면 혹시 몰라도. 어느 정도 익숙해져서 제법 오래 생각하다 문득 깨닫는다. 내가 소유했다고 생각한 것들, 소중하다고 생각한 것들 거의 대부분이 별 거 아니, 그보다는 그냥 흔하디 흔한 내일의 평범한 일상이 경이롭다는 사실을. 내가 사회에서 맡았던 역할들 중 나 아니면 안되는 일 따위는 없고, 그보다는 누군가의 자식..

단상 2024.01.05

착하면 사랑 받을 거라는 착각

개와 고양이를 보세요. 개가 수준 높은 훈련이 가능한 건 스스로의 욕망을 참는 성향이기 때문입니다. 개라고 하고 싶은대로 하고, 하기 싫으면 안하며 살고 싶지 않을까요? 그래도 하는 겁니다. 반면에 하고 싶은대로 하고 사는 동물하면 바로 고양이입니다. 손 올리면 간식 주는 정도의 아주 기본적인 훈련 이상은 안됩니다. 그마저도 보상을 기반으로 하지 않는다면 따르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고양이가 개보다 사랑을 덜 받느냐 하면 그렇지도 않습니다. 놀아달라면 놀아주고, 똥 치워주고, 음식 잘 안먹으면 노심초사 신경 써줍니다. 개도 물론 사랑을 받습니다. 다만, 개는 통제를 받습니다. 개를 좋아하는 사람이든 고양이를 좋아하는 사람이든 그냥 자기 취향일 뿐입니다. 참을성이 있어서 좋아하고, 배려심이 없어서 싫어하는 ..

단상 2023.09.22

라면은 화력? 물은 100도 이상 안올라가는데?

자칭 라면 전문가라는 사람들 사이에 라면 끓일 적에 면발을 들었다 놨다 바람을 쐬줘야 면이 쫄깃하다는 얘기가 있었다. 백종원씨도 방송 초기에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들었다 놨다 자꾸 괴롭혀야 면발이 맛있다. 그러다 각 라면회사 대표로 연구원들(진짜 라면 전문가)이 출연한 방송에서 어느 연구원이 정말 심플하게 딱 한 마디로 논란을 종식시킨 일이 있었다. "그건 덜익어서 그래요." ㅋㅋㅋㅋ 그 방송 이후로도 얼마간 백종원씨는 면발 들었다 놨다를 계속했지만, 어느 때부턴가 가만히 끓이다 70%만 익히고 건져내서 따로 그릇에 담아두는 조리법을 알리기 시작했다. (우기지 않고 받아들이는 태도 좋다.) 그 훌륭한 라면 전문가 연구원은 분식집 라면이 맛있는 이유에 대해서도 이런 말을 했다. "라면 제품을 테스트..

단상 2023.08.26

한국어 만랩 외국인은 구분이 가능할까?

한국어는 가히 조사의 언어다. 괜히 '아 다르고 어 다르다'라는 말이 있을까. 밥을 먹고 싶다 / 밥은 먹고 싶다 지워지지 않은 상처 / 지워지지 않는 상처 너가 내 사랑이야 / 너는 내 사랑이야 꽃이 갖고 싶은 너 / 꽃을 갖고 싶은 너 원빈이 갖고 싶은 너 / 원빈을 갖고 싶은 너 집에 가야지 / 집으로 가야지 소위 한국어 만랩이라는 외국인은 차이 구분이 가능할까?

단상 2023.07.25

방역 최우수 국가의 역설

코로나 치사율이 2%라 치자. 누가 죽는지는 모르지만, 100명 중 2명이 죽는 건 거의 확실하다는 뜻이다. 프랑스 1일 확진자 수가 20만을 넘어갔다느니, 미국은 50만명이라느니 하는데 신뢰할 수 없는 데이터다. 감염 경로 추적이 불가능하고, 무증상자, 경증자 파악이 불가능한데, 어떻게 믿을 수 있나. 한국과 몇몇 방역 선진국을 제외한 나머지 국가들은 이미 코로나, 델타, 오미크론이 전국민을 휩쓸고 지나갔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 그래서 사망자가 많이 나왔다. 묻을 묘지가 부족할 정도로 사망자도 많이 나왔던 게 불과 2년 전 일이다. 100명 중 2명이 죽었으니까. 바꿔 말해, 누가 죽을지 모른다는 100명 중 2명을 확실하게 알게 됐다는 뜻이다. 그들이 이미 죽었으므로. 한국은 '정말로' 코로나에 한 ..

단상 2022.02.17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종종 보는 멍청한 질문들

인도웹이라는 인니 커뮤니티 사이트에 자주 간다. 사이트 자유게시판이나 Q&A 게시판엔 멍청한 질문들이 종종 올라온다. 1. 인니 생활비는 얼마나 들까요? - 어떤 생활을 하고 싶은데? 2. 인니에 어학 배우러 가는데, 집세는 어느 정도 할까요? - 어디 살고 싶은데? 니 아부지가 이재용이면 월 천만원 짜리가 별 거겠냐. 3. 인니에서 취업하려면 뭘 준비해야 할까요? - 어디 취직할 건데? 4. 취업할 수 있을 정도로 인니어 배우는데 얼마나 걸릴까요? - 어디서 어떤 방식으로 배울 건데? 5. 인니 여자친구 사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 한국 여자친구 사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답해보렴. 일전에 업무상 의사소통 할 때 마주치는 멍청한 질문에 관해 끄적였었다. https://choon666.tistor..

단상 2021.09.20

역지사지의 폭력

당신이 그럴 수 있기 때문에 타인에게 그렇게 하라 강요하는 건 폭력입니다. 당신이 괜찮은 것이 남도 괜찮을 거라 생각하지 마세요. 당신이 축구를 보며 느끼는 재미를 상대는 절대 이해할 수 없고, 상대가 피규어를 보며 느끼는 즐거움 역시 당신은 역시 절대 이해할 수 없습니다. 다름을 먼저 인정하세요. 상대가 좋아하는 것은 존중하든 말든 당신 자유지만, 상대가 싫어하는 것은 그냥 존중하세요. 역지사지는 그 다음입니다.

단상 2021.08.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