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한당 명랑쾌활

인정 3

[회사의 부득이한 사정] 외전. 황송하신 갑의 사과

"인도장에 있는 자재들 빨리 치우세요." 국순 본사 소속 전성만 차장은 창고 사무실에 들어오자 마자 인사도 없이 최준영에게 잔뜩 인상을 쓰며 다짜고짜 그렇게 말했다. "네? 뭔 자재를요?" 뜬금 없는 말에 최준영은 되물었다. "인도장에 있는 자재들이요. 언제까지 저렇게 방치해 둘 건데요?" 창고 관리자가 자재들 파악도 안했냐는듯, 전성만 차장의 목소리에는 짜증이 듬뿍 배여있었다. 비로소 뭔 소리인지 이해한 최준영은 대답했다. "그 자재들은 저희가 관리하는 자재들이 아닌데요?" 인도장은 창고의 자재들을 생산 쪽에 넘길 때 제품 종류와 수량이 맞는지 상호 검수하는 공간이다. 생산 부서와 창고 부서의 중립적인 공간이지만, 창고 부서 입장에서는 생산 부서가 요청한 자재들을 인도장까지 갖다 놓고 검수 확인 하면 ..

소오~설 2020.09.21

자식은 나와 다른 삶을 살게 하고 싶다면

자식은 나와 다른 삶을 살게 하고 싶다면 자식의 옳음을 존중해야 한다.자식이 나와 다르길 바라면서, 내 옳음을 강요하는 건 앞뒤가 맞지 않는다.내가 옳다는 건 내 삶의 관점에서 옳은 거다.내가 살아온 삶은 내가 옳다고 믿어온 선택들의 결과다. (혹은 내 옳음과 사회의 요구 사이에 타협한 결과다.) 길고양이는 새끼에게 사람 피해 숨는 법과 쓰레기통 뒤지는 법을 가르친다.집고양이는 사람에게 애교 부리는 법을 가르친다.둘 다 사람과 더불어 사는 법을 가르치지만 옳음은 정반대다. 자식이 나와 다른 삶을 살기를 바란다면, 자식이 나와 다르길 바라야 하지 않을까.그리고, 자식의 다름을 받아 들여야 하지 않을까.

단상 2018.11.14

자신이 별 거 아닌 사람임을 인정한다고 해서

어디서 일을 하든 일 잘한다는 칭찬을 듣고, 다음에 다시 오라는 소리 듣는 게 '제대로 일한 것'이라는 자부심이라고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다.그 소리 듣고자 좀더 열심히 했다.그런 소리 못들으면 부끄러움을 느꼈었다.일을 잘한다는 평판이 곧 바람직한 인간이고, 열심히 일하는 게 삶의 의의라고, 국가와 사회가 내게 주입시킨 노동윤리 때문이었을까?아니면 내 빈약한 자존감 때문이었을까?그들에게 내 존재를 인식시킴으로서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싶었던 걸까. 지금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못한다는소리도, 잘한다는 소리도 듣지 않고, '딱히 별 문제 없는' 정도만 한다.오늘부터 내가 직장에 보이지 않아도 별 감흥 없고, 나에 대해 별 기억도 없는 정도가 딱 좋다.그런 건 의미가 없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그들의..

단상 2017.09.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