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한당 명랑쾌활

Indonesia/서식기 I

BIPA 졸업 ~좋은 시절은 다 갔다~

명랑쾌활 2010. 12. 19. 20:21
인니에 온지도 얼추 1년 반, 어느새 졸업입니다.
여기저기서 축하한다고 하는데, 글쎄요...
무사히(?) 졸업했다는 의미라면 축하가 맞겠지만, 좀 우울하기도 합니다.
지구상 3만8천 가지 직업 중 가장 좋은 직업인 학생 시절이 끝났거든요.
(신분 확실하지, 호의적이지, 자잘한 잘못은 단지 학생 신분이라는 이유로 너그럽게 넘어가지...)
하하, 좋은 시절 다 갔네요.
다시 이렇게 학생 생활을 누릴 기회가 내 인생에 또 올 지 모르겠습니다.

초,중급 때는 몰랐는데 전날 예행연습이 있더군요.
이번에 알게 된 사실입니다만, 초,중급반에서 사회나 축사 등으로 발탁되는 사람들은 다 성적이 좋은 사람들인 줄 알았는데 (거의 맞습니다만), 활달하고 적극적이고, 비주얼이 좋은(!) 사람들도 뽑히더군요.

무대 한 켠에 설치된 가믈란 Gamelan (인니 전통 악기 합주단) 세트.
무대 떨림 중증 체질이라 공연은 고사할까 했는데, 학기 내내 모두 같이 연습했던 시간들이 붙잡더군요.

가믈란 멤버들.
가운데 두 남자분 중 좌측이 강사였던 쁘라스 Pras씨, 우측은 보조강사분 (이름은 모름).
면면을 보다시피 대부분의 멤버가 일본 여성들로 구성되었고, 다른 나라 사람은 나와 러시아 아가씨 둘입니다.
(와우, 그러고 보니 꽃밭에서 놀았군요. 음하하하~)
일전의 초,중급 졸업식 때 언급했듯, 일본 여성들이 정통 전통음악인 가믈란에 관심이 많은 편인데, 사뭇 배우는 태도가 매우 진지했습니다.
반면에 모던한 아룸바 Arumba는 한국인이 강세입니다.
(가믈란은 5음계, 아룸바는 5음계였다가 지금은 7음계 신체계가 대세입니다. 레퍼토리도 가요나 팝 등이 많습니다.)
뭔가 성향이 다르기 때문일텐데 정확히 무엇 때문에 그런건지 감이 잘 잡히질 않네요.
곰곰히 생각해 볼 일입니다.
실마리가 있다면, 한국에서 전통적인 것은 고리타분하고 촌스럽다는 취급을 받는데, 일본인의 인식은 그렇지 않다는 것 정도일까요?
(예 - 일본의 젊은 아가씨들은 그래야 할 때가 있다면 기모노를 입는 것에 거부감이 없습니다만, 한국 아가씨들의 인식은?)
그러고 보면 저도 한국 사람치고는 참 별종이네요. ㅋㅋ

제가 맡은 파트는 끈당 Kendhang이라고 하는 북입니다.
사물놀이의 상쇠처럼 가믈란의 중심이며, 박자를 느리게하거나 빠르게, 혹은 끝내는 것은 끈당이 결정할 정도로 중요한 역할입니다.
하지만, 제가 끈당을 맡게 된 것은 그런 거창한 이유 때문이 아니라 제일 쉬워 보여서 자청했고, 치다보면 손이 무지 아프기 때문에 다른 여성분들이 양보한 덕분입니다. 하하...
당연한 사실입니다만, 절대 만만하진 않더군요.
때리는 방법이나 부위에 따라 다채로운 소리가 나는데다, 박자에도 복잡한 규칙성이 있었습니다.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제대로 배우고 싶은 악기가 되었습니다.
전통음악도 직접 해보니 처음에 접근하기가 어렵지, 나름 재미있고 심오한 맛이 있었습니다. :)

각자의 포지션에 위치하여 한 컷.

맨 뒤 쪽 흰 옷을 입은 러시아 아가씨, 참 골때리는 4차원이었습니다.
연습을 가장 자주 빠지면서도, 나오면 자기에게 가장 쉬운(= 지루한) 파트를 준다고 불평을 하더군요.
다른 파트를 배울 만큼 열심히 나오지도 않고, 나와서도 건성건성 하면서 말이죠.
음악에 대한 감각도 좋지 않아서 가장 쉬운 악기 마저도 엉망으로 치는 바람에 합주를 망치기도 하고, 심지어 합주 도중에 멀거니 앉아 있다가 여기저기 기웃기웃 다니기도 하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성격의 소유자였습니다. ㅎ...
졸업식이 가까워져서 모두들 나와 총연습 하던 때도 안나오길레 공연에는 안나오나 보다 했는데, 떡하니 나오는 바람에 강사를 무지 난감하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공연 전날 무대에 배치된 악기들 중 자신이 맡은 보낭 바룽 Bonang Barung 파트의 배치가 자신의 얼굴이 관객들에게 잘 보이지 않는다며 낑낑거리고 옮겨 배치를 완전히 반대로 놓기도 하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하구요. -_-;
반대로 놓지 말고 방향을 틀면 되지 않겠냐고 하는데, 도대체가 말을 듣지를 않더군요.
하도 말을 안듣길레 직접 옮겨서 보여줬더니, 미안하다, 고맙다 이런 말 따위는 없고, 오케이 딱 한 마디만 할 때는 때려주고 싶을 정도로 울컥했습니다. -_-;;;

러시아인들은 원래 다들 그렇게 고집이 센 걸까요?
한 두 사람 보고 그 나라 사람 전체를 판단해서는 안되겠습니다만, 제가 BIPA에서 만난 세 명의 러시아 아가씨들은 다들 짜기라도 한 것 처럼 엄청나게 고집이 셌습니다.
10명이던 20명이던 반대를 해도 소용 없습니다.
똑같은 얘기만 반복하면서 끝까지 우겨서 자기 뜻을 관철시키더군요.
(졸업생 노래를 계획했던 러시아 아가씨는 나머지 졸업생들 20여 명의 의견을 모조리 묵살하고 끝끝내 자신의 생각을 관철시켰습니다. 단 하나, 유일하게 관철시키지 못한 것이 노래를 하며 율동을 하자는 것이었는데, 나머지 졸업생들이 모두 꿋꿋이 보이콧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들 팔다리까지 맘대로 할 수는 없었겠죠. ㅋ...)
그렇게 해서 벌린 일이 다들 반대했던 대로의 결과가 나와서 망치게 되도 민망해하거나 미안한 기색도 하나도 없구요.
러시아인들 만나본 경험이 있으신 분이 있다면, 제 생각이 맞는지 좀 가르쳐 주셨으면 합니다.

졸업식 행사를 여는 가믈란 오프닝 공연이 끝나고, 술라웨시 전통 부채춤 공연을 보여준 전통무용팀.
저 세 명의 여성들 역시 모두 일본인입니다.

멋진 소프라노 공연을 보여준 네모토 상.
일본 주부입니다.

초급 우수상 시상식.
1등은 일본 남학생(아마도 미쯔비시 소속일듯)
2등과 3등은 각각, 한국 남학생, 여학생입니다.
1등과 2등은 총평균 0.4점의 근소한 차이였는데, 2등을 한 한국 남학생이 배탈로 며칠 결석한 적이 있어서 더욱 아쉬웠습니다.

중급반 1등과 2등은 중국 여학생, 3등은 한국 여학생이 차지했습니다.
1등을 한 중국 여학생은 외국인 인니어 웅변 대회에서 쟁쟁한 고급반 학생들을 제치고 우승한 실력자입니다.
그나저나 두 중국 여학생의 치파오 복장이 참 곱더군요. :)

고급반 1등은 중국(홍콩)인 존 John씨가 수상했습니다.
2등은 중급 때 1등을 했었던 한국인 한슨 Hansen씨, 3등은 역시 중급 때 1등을 했었던 일본인 치히로 Chihiro 양입니다.
(둘은 중급을 들었던 학기가 다릅니다.)

아룸바 본 공연. (가믈란 공연이 그 전에 있었으나 제가 참가했으므로 당연히 사진이 없습니다.)
역대 공연 전통에 따라 아룸바 반주에 맞춰 노래를 부르는 공연이 있었는데, 이 일본 아가씨 실력이 많이 떨어지더군요.
멤버들이 다들 느린 노래 하면 분위기 쳐지니까 빠른 거 하자고 했는데, 굳이 느린 노래를 선택했다는 후일담이 있었습니다.
결국 분위기는요?
다수가 말하는 것이 늘 맞는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은 맞는 법이지요. 하하

의상을 갈아 입고 이번엔 손수건 춤을 보여준 전통무용팀.

이번 졸업식에는 새로운 상이 제정되었습니다.
베스트 드레서 상, 학기 과정 중 가장 예의바르게 옷을 입고 다닌 학생에게 수여되는 상입니다.
아무리 짧은 치마나 반바지, 민소매를 입지 말라고 해도 꾸역꾸역 입고 다니는 학생들에 대한 대책으로 생긴 당근인듯 합니다.
(한국 여학생은 거의 받을 가망이 없는 상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ㅋㅋㅋ)
제 생각으로는 우수상 만큼이나 의미있고 받기 어려운 상일 것 같습니다.
그냥 복장으로 대표되는 상이지만, 실상은 품행이 방정한 학생에게 주는 모범상일테니까요.
남자 상을 수상한 중국인 구빈 Gu Bin 군은 같은 반이었는데, 학기 내내 신사복 바지에 구두, 와이셔츠나 바띡 차림으로 다닌 정말 모범적인 학생이었습니다.
여자 상도 쌰오 Xiao라는 중국 아가씨가 받았습니다. (중급 2등을 수상한 아가씨군요.)
베스트 드레서 여자 상은 아무래도 중국 아가씨가 앞으로도 계속 강세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중국 아가씨들도 모두들 옷차림이 얌전합니다. (남자들도요.)
아무래도 모국의 분위기와 연관이 있겠지요.

미니 스커트나 민소매는 흡연자가 담배 못 참듯, 여자의 본능인가 봅니다.
선생님들이 언짢은 기색을 보이며 눈치를 줘도 (몇 번이나 봤습니다. 상당히 불쾌한데 참는다는 기색이 역력하더군요.), 모르는 건지 무시하는 건지 끝끝내 입고 다니는 아가씨들 참 많더군요.
특히나 거의 한국 아가씨들입니다.
그나마 일본 아가씨들은 타이즈나 짙은 검정 스타킹이라도 입더군요.
타이즈나 짙은 검정 스타킹은 인니에서는 허용범위입니다. 요컨데 살이 보이느냐 마느냐의 문제입니다.
인니에서 신체 노출은 패션의 범주가 아니라, 도덕의 범주인 듯 합니다.
개성이나, 자기 표출, 미추의 영역으로 이해는 것이 아니라, 인격과 예의, 도덕성의 영역으로 평가하는 거죠.
미개하다, 뒤떨어졌다 할 수도 있겠지만, 뭐 어쩌겠습니까.
비 맞기 싫으면 피해야지, 오지 말라고 할 수는 없는 일이죠.
뭐 남자인 저로서는 도저히 이해 불가능의 영역입니다.
아, 부디 꼰대의 고리타분한 소리라고 하진 말아주시길.
한국에 대해 안좋아질 인식 문제를 접어 둔다면, 저야 고마운 일입니다. 까까라도 사주고 싶어요. 하핫!

행사 마지막으로 젊은 강사들이 나와 뽀초뽀초 Poco-Poco 춤 공연을 했습니다.
(한국의 꼭지점 댄스랑 비슷.)
이것도 전에는 없던 행사였는데, 재미있더군요.

나날이 업그레이드 되는 점심 식사.
가짓수는 네 개 밖에 없었지만, 비싸고 맛있는 소고기 요리라 대만족이었습니다.
후식으로 제공하는 쌀 아이스크림도 너무 맛있어서 두 개나 먹었네요.

이제 늘 심상하게 보던 인문학부 광장도 보기 힘들겠군요.
마침 토요일이라 한산한 광장을 보고 있자니 섭섭한 마음이 물씬물씬 합니다.
참 좋았던 시절이었습니다.
언젠가 다시 이렇게 학생을 누릴 수 있게 된다면 참 행복할 것 같습니다.

고마웠습니다, BIPA.
ABCD도 모르고 인니에 와서 이렇게까지 할 수 있게 된 건 당신들 덕분입니다. :)


* BIPA 총 재학생 국적분포
한국 115명, 일본 30명, 중국 16명, 터키 6명, 대만 4명, 팔레스타인 3명
러시아, 필리핀 각각 2명
카자흐스탄, 네덜란드, 아일랜드, 영국, 미국, 폴란드, 태국 각각 1명

** 중국의 약진
이번 학기에는 이전과는 뚜렷이 다른 변화가 있었습니다.
중국 학생들의 수가 급격히 늘었습니다.
저는 그걸 '중국의 약진'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로 인해 수업은 가히 한중일 삼국지라는 표현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최근 중국의 국제적 위상을 보여주는 듯 합니다.
지난 두 번의 졸업식을 나름 평가할 때는 한국과 일본의 경쟁이었다면, 이번 졸업식은 중국이 가세한 삼파전이 되었습니다.
우수상 총 수상자 9명 중 한국인의 수는 4명, 중국인 3명, 일본인 2명으로 수적으로는 한국이 앞섭니다만,
1등 수상자는 중국이 2명, 그것도 진정한 실력 평가인 중급과 상급을 수상했기 때문에 중국의 우승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초급은 중급 수준임에도 수강하는 사람들도 있기 때문에 실력 편차가 심해서, 공정한 평가는 아닙니다.)
그리고, 수상자 숫자가 많은 한국과 초급 1등을 배출한 일본이 고만고만하다고 할 수 있겠구요.
하지만 총 재학생 국적 비율이라는 수치를 대입하면, 사실 상 한국이 가장 뒤쳐진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일본 재학생 수의 약 4배, 중국 재학생 수의 약 8배의 숫자임에도 불구하고 나온 결과니까요.
(한국 축구 수준이 중국보다 훨씬 높은 걸 갖고, 한국인들이 중국 축구 무시하는 걸 생각해 보세요. 그리고 한국 축구가 일본과 대등한 것에 대해 외국인들이 얼마나 대단하게 생각하는지도요.)

뭐, 모티베이션이 틀리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확실한 목적성을 가지고 오는 타국 학생들에 비해, 한국인 재학생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20대 초중반들은 한국의 사회문화상 아직 부모의 부양을 받는 사실상 미성년이니까요.
대충 시험이나 적당히 보고 통과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학생들이 많습니다.
(컨닝하는 학생들도 있는데 전부 한국 학생들입니다. 지적 받거나 0점 처리 받는 경우도 있는데 국제 개망신이 아닐 수 없습니다. -_-;)
심지어 일부러 진급을 미룬다는 학생들도 있습니다.
진심인지 핑계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자기돈으로 공부한다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겠지요.
빨리 졸업하고 다른 공부를 하던가, 부족한 부분을 보충한다던가 하는 편이 훨씬 유익할 텐데요.
BIPA가 무슨 대학교인양 졸업장 따면 대우 받는 곳이라 착각하는 모양입니다.
어학에서 중요한 건 실제 실력일텐데요...

그렇기 때문에 삼국의 학생들 성향도 각기 다릅니다.
한국 학생들은 그냥 학교만 왔다갔다 하고 개인적으로 마음 맞는 친구들끼리 놀러 다니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일부만 그런 걸 수도 있겠죠. 제 눈에 뜨이는게 그렇습니다.)
절대다수 주류로서 위상이 가장 높은 것도 한국이지만, 자잘한 꼴불견으로 한국에 대한 인식은 계속 나빠지는 추세입니다.
일본 학생들은 공부도 열심히 하지만, 전통문화에 관련한 특별활동에도 관심이 많습니다.
특별활동에 참가하는 학생은 대부분 일본인입니다.
씀씀이도 매우 검소한 편이고, 미혼의 경우 대부분 자신이 일해서 모은 돈에 부모의 약간의 보조를 합해 생활합니다.
중국 학생들은 죽어라 공부만 팝니다.
특별활동이나 여행 따위에도 관심이 거의 없습니다.
끼리끼리 어울려서 노닥거리거나 어디 가는 일도 거의 없고, 학교가 끝나면 대부분 곧바로 집에 가서 공부만 합니다.
그리고 다들 신문이나 책을 꼬박꼬박 챙겨서 보더군요.
(같은 반이었던 어떤 중국 학생은 학기 내내 단 한 차례도 자카르타에 나간 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실생활에 관련된 분야에 관해서는 어두운 편이지만, 사회나 역사, 문화 등에 관한 지식은 상당히 높습니다.
대신 한국 학생들은 자카르타에 술집 위치나 지리는 빠삭하지요. ㅋㅋ... 웃을 일이 아니다... -_-;

향후 인니에서의 한중일 구도가 어떻게 될지 흥미롭습니다.
모쪼록 현재 BIPA 내에서의 상황 변화가 인니 전체의 상황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