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한당 명랑쾌활

소오~설

[그 회사 이야기] 3. 처세의 달인, 그 부장

명랑쾌활 2023. 12. 13. 13:30

사택 제공이 입사 조건 중 하나였지만, 일 시작한 두 달 간은 임시로 남의 회사 기숙사에 얹혀 살았다.

전무가 한국에서 발령 온 후에야 그 기숙사를 나와 주택에서 살게 됐지만, 전무를 모시고 살아야 했다. 전무 가족이 따로 나올 때까지 임시로.

전무는 직장 상사인 자신을 아버지처럼 여기라고 했지만, 정작 그는 부하직원을 머슴처럼 대했다.

오너는 아직은 시험 운영 기간이니 일단 그대로 지내고, 공장 새로 짓기로 결정하면 그 때 사택을 따로 지원해주겠다고 했다.


입사 1년 후, 회사는 공장을 짓기로 결정했다.

처음 공장 건축 설계도에는 없던 기숙사가 수정된 설계도엔 들어가 있었다.

오너 매제의 입김이 작용했을 거다.

그는 '직원들 퇴근해봐야 헛짓거리나 하고, 출퇴근 오고가는 게 시간낭비 돈낭비이며, 평일 일 끝나면 숙소에 가서 푹 쉬는게 직원들에게 좋은 혜택이라는 말을 평소 자주 했었다.

한국으로 돌아갈 전무 후임으로 발령 온 부장은 가족이 있는 사람도 평일에는 무조건 공장 내 기숙사에서 살아야 한다는 회사 방침이 내려왔다고 통보했다.

입사 당시에 사택 지원을 약속했다고 했지만 소용없었다. 부장은 '그럼 계약서에 명시를 했어야지'라며 능글능글 웃으며 남일처럼 말했다.

자비로 집 얻어서 나가 살겠다고 하니, 그럼 차량 지원도 취소하겠단다. (내게 지급된 차량이 따로 있었다.)

부장은 수출입 담당으로 새로 입사한 차장은 가족이 있어서 따로 지원 받던 주거비를 삭감했다.

기숙사를 제공하는데 주거비도 지급하면 2중 지원이 되므로 다른 직원들과 형평에 맞지 않고, 부양가족은 개인 문제라는 명분이었다.

부장인 자신도 기숙사에 살지만 한국에 살고 있는 자기 가족들은 주거비 지원 받지 않는다는 논리를 내세웠다.

어쩔 때는 인니는 이게 보통이지 않냐, 어쩔 때는 한국은 이러지 않는다... 회사 유불리에 따라 회사 방침의 근거는 인니와 한국을 수시로 오갔다.

한국 본사에서 내려왔다기엔 너무 사소한 것들 마저도 회사 방침이라는 것으로 봐선 부장 개인 판단이었을 것이다.

로열 패밀리나 원청 낙하산이 아니면 깰 수 없는 부장의 벽을 깬 비결이 바로 그런 부장의 충정이었다.

 

공장 기숙사 운영을 오래 해본 회사는 - 오너 매제 같은 - 업무 끝난 후 기숙사에서는 마주쳐도 마치 없는 사람인 것처럼 가급적 서로 간섭하지 않는다는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는 게 보통이다.

직급 떼고 편하게 대한다 해도 그게 실제로 가능한 인격자는 적어도 한국 회사 조직에서는 극히 드물다.

어쩌다 별뜻 없이 던지는 말은 사생활 간섭 꼰대질로 서로 감정만 상하게 되기 십상이니 아예 말을 나누지 않는 편이 차라리 낫다.

하지만, 부장은 기숙사 경험도 없었고, 2년 있다 다시 한국에 갈 사람이라 깊게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퇴근 후 기숙사에서도 한국식 꼰대 마인드로 거침없이 이것저것 간섭하고, 식사를 하며 인생에 대한 훈계를 했다.

공장 내 기숙사 생활은 정신적으로 매우 힘든 시간이었다.

 

부장은 처세를 아주 잘했다.

전무가 있던 시절엔 오너가 인니에 와서 골프 라운딩이나 관광을 할 때면 인니어를 할 줄 알고 현지 사정을 아는 내가 수행했었다.

부장이 발령 온지 얼마 안되어 오너가 방문하자, 부장은 자기가 당연히 모셔야한다며 인니어도 전혀 못하면서도 쫓아 다녔다. 절대 남에게 양보해서는 안되는 동앗줄인 걸 잘 알고 있었던 거다.

그때문에 업무를 보다가도 시시때때로 걸려오는 전화를 받아 어떤 상황인지 알지도 못해 현지인에게 상황 설명을 한참 들어가며 통역을 해야 했고, 업무 끝나고 기숙사에 들어가서도 가라오케 여성들 긴밤 짧은밤이 되니 안되니 뭔 소리를 하는지 통역해줘야 했다.

 

오너에게 바닷가재를 대접하고 싶었던 부장이 방문 일정에 맞춰 바닷가재를 준비했던 적이 있었다.

물론 자기가 직접 한 게 아니라 차장을 시켜 수까부미에서 조달해온 거였다.

부장은 여느때처럼 오너와 친구들 일행을 수행해서 골프 라운딩을 갔고, 4시쯤 내게 전화해왔다. 라운딩이 막 끝났으니 공장 도착시간 맞춰 바로 먹을 수 있도록 바닷가재를 준비해놓으랜다.
그 날은 평일이었고, 오후 5시까지 연장근무였다.
나와 차장은 근무하다 말고 기숙사로 갔다. 음식하는 가정부가 바닷가재를 다뤄 본 적 없어서 같이 손질했다.

기숙사 앞 마당에서 드럼통 반 갈라 만든 바베큐 그릴에 장작을 피웠다.

연기가 좀 가시고 굽기 시작할 즈음, 퇴근 시간이 되어 직원들이 쏟아져 나왔다.

기숙사에서 회사 정문까지는 탁 트여있었고, 이 나라 사람들은 예의상 못본척 하는 문화가 없다.

퇴근하던 직원들 수백명은 나와 차장이 바닷가재를 굽는 광경을 대놓고 보면서 수근거리며 지나쳤다.
오너와 친구들이 기숙사에 도착하여 술판을 벌였다.

나와 차장은 저녁 먹을 틈도 없이 바깥에서 바닷가재를 구워 날랐다. 고기도 아니라서 구워가며 몇 점 주워 먹을 수도 없었다.
8시 거의 다 되어서 모두 구워냈다. 마지막 바닷가재 구이를 가정부 시켜서 기숙사 안으로 들여보냈다.

따라 들어가서 웃음 팔기엔 기분이 너무 좆같았다. 들어가봐야 술 잔뜩 취한 사람들 수발이나 들어야 한다.

내버려 두면 내일 아침에 청소 직원이 치울테지만, 기숙사 들어가지 않는 구실로 바베큐 흔적들 느릿느릿 치우며 차장과 담배를 피웠다.

이신전심. 뭐라 말해 봐야 비참한 기분만 더 든다. 서로 얼굴 보며 피식 웃으며 "에휴, 씨발~" 이러고 만다.

부장이 술에 취해 벌개진 얼굴로 나왔다. 여태껏 자기 혼자서 술시중 드느라 힘들어 죽겠는데 여기서 뭐하고 있냐는 신소리를 한다.

기숙사에 들어가니 술판은 거의 막바지였다.
오너와 친구들이 수고했다면서 금일봉 대신 술을 권했다. 저녁 굶어서 배고팠는데 술로 배 채우라고 챙겨주나 보다.
바닷가재는 이미 다 먹어서 없었다. 쟁반엔 살 발라내다 떨어진 부스러기만 남아 있었다.
오너가 안주라며 부스러기를 숟가락에 모아 내 입에 들이 밀었다.

불콰한 얼굴로 활짝 웃는 표정엔 악의가 없어 보였고, 생각도 없어 보였다. 하지만 이제 와서 돌이켜 보면 노예 근성이 바닥이 어디까지인지 시험해 본 것 같다.

황송한 척 웃으며 넙죽 받아 먹었다. 토할 것 같았지만 참았다.

10시 쯤, 오너와 친구들이 각자 방으로 올라 갔다.

차장과 나는 라면을 끓여 먹었다. 가정부가 밥 해줄까 묻길레 그러지 말라고 했다.

피곤에 지친 가정부 얼굴에는 차장과 나에 대한 측은함도 섞여 있었다.

동지애는 그렇게 형성되는 거다.

 

 

부장은 부모님이 연로하시고, 자기가 고혈압이 있어서 안된다며, 인니 근무를 2년 이상은 절대 하지 않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하고 다녔다.

오너와 술자리 때마다 기분 나쁘지 않을 타이밍을 살펴 자연스럽게 그 말을 했고, 본사에서 파견 오는 직원들마다 그 말을 했으며, 심지어 나와 차장에게도 그 말을 하고 또 했다.

은근슬쩍 눌러 앉힐 게 뻔한 회사의 수작에 대한, 좆소기업에 처신으로 잔뼈가 굵은 부장의 대응이었다.

부장의 대응은 성공했다. 2년까지 4개월 남은 시점에서 부장의 한국 복귀가 결정됐다.

문제는 부장 대신 본사에서 올 적당한 사람이 없다는 거였다.

전형적인 가족 경영 좆소기업이라 일반 직원들은 전부 직급이 과장 이하였다. 직급이 되는 사람은 오너의 친척이거나, 원청 낙하산 뿐인데, 그들이 '후진국'에 와서 고생하는 자리를 앉을리 없었다.

혈연이나 낙하산이 아닌데 부장 이상인 사람은 창업공신인 전무와 처세의 달인 부장 밖에 없었다.

다시 말해, 부장이 들어간다면 전무가 나오는 수 밖에 없다는 얘기다.

 

결국 유배갔던 전무가 다시 인니로 발령되기로 결정됐다.

가족 동반에 주거비, 생활비, 자녀 학비 지원을 해줬던 저번과 달리, 단신 부임 기숙사 생활이 조건이었다.
회사 방침이란 것의 실체를 알아 버린 나는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고, 정무 발령이 결정되자 곧바로 사직서를 제출했다.

월급 1, 2천불을 올려줘도 그 권위주의 화신의 자식 새끼 노릇은 도저히 버틸 자신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