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한당 명랑쾌활

소오~설

[그 회사 이야기] 2. 든든한 한국인 뒷배를 둔 그 현지인 총무

명랑쾌활 2023. 12. 6. 11:22

법인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법인장이지만, 외국 법인의 외국인 법인장이라면 이야기가 좀 다르다.

인니에서는 외국 법인이더라도 인사 총무는 반드시 자국민이 맡아야 한다고 법으로 정해져 있고, 외국 법인에 대해 모든 현지인들은 그 현지인 총무를 실질적인 대표자로 간주한다.

관공서 공무원, 회사 주변 주민, 하청 현지 업체, 사내 직원 등 모든 현지인은 총무를 상대한다.

법인장은 회사의 최종 사인을 하는, 즉 뭔 일 터졌을 때 책임지는 사람일 뿐이다.

 

그 회사 총무는 오너 매제가 박아넣은 사람이었다.

오너 매제 회사 경리장의 남편으로 이전엔 카센터 사무실에서 일했다고 한다.

관련 경력이 없으니 총무 업무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는데, 문제는 나도 초짜였다는 것이다.

좆도 모르는데 존심만 센 놈 둘이 붙어 있으니 늘 사사건건 부딪히는 게 당연하다.

그 때마다 오너 매제는 그깟 현지인 하나 휘어잡지도 못하냐며 내 관리 능력이 부족한 탓으로 돌렸다.

나로선 억울했다. 업무 상 잘못이 명백한 상황에도 오너 매제는 총무 편을 들며 싸고 돌았기 때문이다.

면전에 대들어도 아무 일 없으니 총무가 나를 만만하게 대하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같은 한국인인 내 편을 들어주지 않는 게 섭섭했지만, 그걸 섭섭해 한 것 자체가 순진하고 멍청한 생각이었다.

오너 매제 입장에선 총무가 일 못해서 손해가 나든 말든 자기 회사 일이 아니다.

총무는 자기가 얼마든지 통제할 수 있었고, 막후에서 회사를 계속 장악할 목적으로 그 자리에 박아 넣었던 거다.

같은 한국인인게 뭔 의미가 있을까.

자기 사람이 아닌 한국인 보다 자기 사람인 현지인이 더 중요한 존재다.

 

한 번은 동네 깡패 두목이 패거리를 데리고 회사에 찾아 온 일이 있었다.

총무는 그들을 사무실 안에 이미 들여놓고는 내게 와서, 저들이 나와 면담을 하고 싶어 한다고 말했다.

이미 들여 놓았는데 쫓아 내라고 할 건가. 선택지가 없다.

알았다고 하니 총무는 회의 테이블에 의자를 깔아놓고는 휑하니 사무실 밖으로 나가 버렸다.

눈자위에 번들번들 노란빛이 감도는 검붉고 험상 궂은 얼굴, 어깨며 팔뚝에 덕지덕지 문신이 깔려있는 깡패들 5명과 나 혼자 사무실 회의 탁자에 둘러 앉았던 광경은 아직도 생생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두목은 살인 전과만 해도 두 번인, 경찰들도 피하는 나름 거물이었다.

내가 인도네시아까지 와서 지금 이게 뭔 꼴이지?

겁이 나지 않았다. 용감해서가 아니라, 마음의 준비도 없이 급작스럽게 처한 상황이 너무 현실감이 없었다.

내 몸이 뭐라 말하고 행동하긴 하는데, 유체이탈해서 남 움직이는 거 구경하는 것 같이 느껴졌다.

깡패 두목은 '자기 구역'에 새로 회사가 들어왔는데 자기한테 인사 한 번 하러 오지도 않은 게 마음 상했다고 했다.
나는, 외국인이라 그런 문화를 잘 몰라서 그랬고, 앞으로는 조심할테니 이해해 달라고 최대한 공손하게(ㅋㅋ) 말했다.

내 태도가 마음에 들었는지 두목 표정이 조금 부드러워진다. 죽일 거 같은 표정에서 죽이진 않을 표정 정도.

이런 저런 얘기를 하는 중에 총무 얘기도 나왔다.

두목은 '총무가 이 동네 사람이 아니라서 그런지, 이 동네 규칙에 대한 존중이 부족한 거 같다. 인사나 나누자고 집으로 초대했는데, 집이 공장 바로 옆인데도 통 오질 않아서 자기가 이렇게 찾아 온 거다'라고 말했다.

체면이 어느 정도 충족됐는지 깡패 두목은 부하들과 물러갔다.

악수를 하자고 내민 두목의 손에 내 손이 쏙 담겼다. 내 손보다 반 배는 큰 거친 손에는 흉터가 여기저기 있었다.

사무실 바깥까지 배웅을 나가(ㅋㅋ), 그들이 회사구역 바깥으로 나갈 때까지 쳐다보며 서있었다.

깡패 패거리가 회사 정문을 나가서 보이지 않을 즈음 돌아서자, 회사 건물 뒤편에서 총무가 나오는 게 눈에 뜨였다.

 

또 기억나는 일이 있다.

원래 퇴근 시간은 오후 5시였지만, 총무는 늘 4시 쯤이면 퇴근했다.

부인인 오너 매제 회사 경리장을 차에 태워 같이 퇴근해야 한다는 명분이었다

물론 나는 허락한 적 없었다. 오너 매제와 그러기로 약속했다고 한다.

그럼 난 할 말 없다. 오너 매제는 사장이 아니지만 사장이나 다름 없었던 시절이었다.

회사 세팅하던 초기에는  업무적으로는 큰 문제는 없었다.

서류 작업해야 하는 나만 바빴을 뿐이었고, 총무는 어차피 하는 일도 없는 인간이었다.

한국에서 보낸 드디어 현장에 설비자재가 들어오고 나서, 거의 매일 7~8시까지 연장근무를 하면서 문제가 터졌다.

 

근무시간이 6시를 넘기면 저녁식사를 제공해야 했다.

오너 매제가 책정한 도시락 단가가 너무 낮아서 기존 캐터링 업체들은 다들 거절했다. 결국 캐터링을 처음 해보는 식당과 계약했다.

당일 연장근무 여부는 중식 후 오후 근무가 어느 정도 진행되고 결정한다. 보통 오후 2시쯤이다.

2시 전까지 캐터링 업체에 수량을 주문하면 5시 반까지 배달하기로 되어 있다. 저녁 도시락 주문은 총무의 일이었다.

총무는 연장 근무가 계속되는 중에도 여전히 4시쯤이면 퇴근했다. 배알이 뒤틀렸지만 뭐라 할 명분이 부족했다.

저녁 도시락은 2시에 주문해두면 되고, 특이 사항만 벌어지지 않는다면 연장 근무 중에 총무가 딱히 자리를 지킬 필요는 없다.

특이 사항만 벌어지지 않는다면,

처음 하는 캐터링 사업이라 배달이 늦는 일이 종종 있었지만, 가장 늦은 적이 6시 10분이라 그럭저럭 넘어갔다. 어차피 인근에서 가장 싼 단가로 계약해서 세게 나갈 수도 없었다.

어느 날, 급기야 6시가 훌쩍 넘어서도 배달이 오지 않는 사고가 터졌다.

총무는 퇴근해버렸고 연락도 받지 않았다.

직원들은 다들 웅성웅성. 무슨 일인지 파악도 되지 않는다.

7시가 다되어서야 배달이 도착했다. 오다가 배달 차량이 퍼져서 다른 차량 대체해서 오느라 늦었다고 한다.

다음 날 총무를 질책했다. 벼르고 별렸던 일이다.

도시락이 제 시간이 도착하는지 확인하고 퇴근하라고 했다. 자기 책임이 명백하니 총무도 반박하지 못했다.

그날 이후로 총무는 도시락이 도착하고 나면 퇴근했다.

대신 도시락 배달이 4시, 가끔 늦으면 5시 도착으로 앞당겨졌다.

4시는 너무 이른 거 아니냐 물으니, 총무는 혹시 늦을까봐 아예 일찍 출발하도록 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2주쯤 지나서 캐터링 업체 사장이 빈 도시락통을 회수하는 길에 내게 면담을 청했다. 총무는 당연히 이미 퇴근해서 자리에 없었다.

도시락 업체 사장은 오후 4시까지 배달하는게 너무 힘들다고 하소연을 했다.

최소 4시간 전에는 준비해야 하는데, 12시에는 식당 장사도 바쁘고 시간이 너무 촉박하다고 했다.

이게 뭔 소리인가 했더니, 총무가 도시락 업체에게 저녁식사를 오후 4시까지 배달하라고 했단다.
몇 번인가 배달이 늦어서 5시 쯤 도착하는 날이면, 총무가 전화해서 도시락 대금을 하루치 제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고 한다.

원래 계약은 5시 반까지 배달 조건인데 총무가 지 빨리 퇴근하고 싶어서 그 지랄을 한 거다.

캐터링 업체 사장 얼굴 보기가 너무 창피했다. 최대한 빨리 조치하겠다며 일단 돌려 보냈다.

 

당장 잘라버리고 싶었지만 내 맘대로 못한다. 총무는 오너 매제가 박아 넣은 인간이다.
오너 매제에게 자초지종을 전하고 어떻게 조치할지 물었다.
오너 매제는,

원래 (자기 회사) 경리장 근무 조건이 출퇴근 차량 지원인데 그 차량을 다른 곳에 쓸 일이 있어서 그동안 남편인 총무 차량으로 같이 출퇴근 하도록 했었다,

원래 경리장이 5시 넘어서 퇴근하니까 총무가 미리 와서 대기하겠다고 일찍 오는 모양이다. 그렇게까지 서두를 필요가 없는데,

앞으로는 그러지 않도록 잘 타이르겠다,

하지만 원래 경리장 출퇴근 차량은 아직 1~2주 더 쓸 곳이 있다,

그 때까지는 총무 편의를 봐주도록 해라, 총무가 8시까지 굳이 있어야 할 필요는 없지 않냐

라고 했다.

그냥 덮고 총무 원하는대로 해주란 소리다.

오너 매제는 늘 이런 식이면서 되려 내게 현지인 총무 하나 휘어잡지도 못하냐고 해왔던 거다.

나는 도시락 업체 사장에게 총무가 제하겠다는 대금 건은 정상 지급될 것이고, 앞으로는 원래 계약대로 5시 반까지만 늦지 않게 배달하면 되고, 예전처럼 배달 차량이 퍼진다던가 하는 상황이 터지면 총무 말고 그냥 바로 내게 연락하라고 했다.

총무에게는 도시락 주문만 하고, 배달 도착 기다릴 필요 없이 니 맘대로 퇴근하라고 했다.
총무는 겸연쩍어하는 기색 조금도 없이 예전처럼 4시 좀 넘으면 퇴근을 했다.

 

1~2주 내에 다시 경리장에게 출퇴근 차량 지원 돌리겠다는 오너 매제의 말은 당연히 지켜지지 않았다.

애초에 오너 매제 말을 믿지도 않았다. 그동안 그만큼 당했으면 똥인지 된장인지 자연히 알게 된다.

경력을 대우 한다는 건 업무보다, 업무 외적인 것들에 대한 경험을 더 높이 쳐주는 거다.

경리장에게 출퇴근 차량이 다시 지원된 건, 총무가 회사를 그만두고 나서였다.

 

총무나 나나 둘 다 초짜였다.

둘 다 직급은 높은데 서투르고 어설펐으며 한 명은 외국인, 한 명은 외지인이어서, 모두가 인근 마을 출신인 일반 직원들에게 은근한 방식으로 따돌림과 무시를 당하긴 마찬가지였다.

나는 가장 먼저 출근해서 가장 늦게 퇴근했고, 일반 직원들과 같은 밥을 먹고 틈만 나면 생산 현장을 돌며 함께 굴렀다.

총무는 시간 맞춰 출근해서 업무 끝나기 전에 퇴근했고, 거만한 태도로 일반 직원들과 거리를 뒀다.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차츰 일반 직원들의 존중을 받기 시작했고, 총무는 점차 고립되어 갔다.

나도 총무를 방치했다.

해야 할 일 안하거나 잘못하는 거 지적해봐야 서로 부딪히기만 하고, 오너 매제에게 말해봐야 총무 편만 들어 버리니 나만 징징거리는 병신이 될 뿐이다.

이리저리 물어서 배워가며 총무가 할 일까지 내가 해버리고 (이 때 배운 게 많았다.) , 총무는 자기 하고 싶은대로 내버려뒀다.

일반 직원들에게 따돌림 받는 거나 일 안시키는 것까지 오너 매제가 나설 수는 없는 일이다.

 

첫 르바란, 10여 일 간의 휴가가 끝나고 업무가 시작됐는데 총무는 출근하지 않았다. 연락도 받지 않았다.

총무 컴퓨터에 있는 자료가 필요해서 켰더니 스크린 세이버에 'Good Bye XX(회사 이름)'이라는 글자가 돌아다닌다.

그게 사직서였나 보다.

그의 컴퓨터에 있어야 데이터들도 싸그리 지워진 채였지만, 어차피 하는 일도 별로 없어서 곤란하지도 않았다. 좀 귀찮지만 다시 취합하면 됐다.

오너 매제에게는 이런 저런 말 없이, 새 총무 뽑겠다고만 했다.

오너 매제가 '잘 좀 해주지 그랬냐. 멀쩡히 직장 다니는 애 데려온 건데, 경리장(총무 부인)한테 모양 빠지게 됐잖아.'라길레, 군말 하지 않고 죄송하다고만 답했다.

나도 이제 병신 레벨은 벗어난 거다.

 

 

내가 그 회사를 그만 둔지 2년 쯤 후, 그 총무가 다시 컴백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오너 매제가 기어이 다시 박아넣은 모양이다.

 

고리타 <마이신> 中    [출처 : blog.naver.com/goritagorit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