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한당 명랑쾌활

소오~설

[그 회사 이야기] 1. 가족이 위계 조직이라던 그 전무

명랑쾌활 2023. 11. 29. 11:06

입사 당시 그 회사는 한국에 본사와 공장이 있었고, 이제 막 인니에 법인 설립을 진행 중이었다.

회사 오너의 매제가 인니에서 사업체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그의 권유에 따라 인니에 생산 공장을 지으려는 상황이었다.

현지 사전 준비는 오너 매제가, 본사에서는 원청 대기업에서 낙하산으로 들어온 상무가 컨트롤했다.

 

입사하고 나서 초기에 한국 본사의 상무에게서 가장 자주 닥달을 받았던 건 '수입 허가가 언제 되느냐'였다.

설립 허가 프로세스를 시작한 3개월 정도 경과한 시점이었다.

인니 관청 행정 업무가 한국에 비해 얼마나 엉망인지, 언제까지 되는지는 아무도 특정할 수 없고 특정해주지도 않는다는 걸

아무리 설명해도 상무는 이해를 못했다. 아니, 이해하려 하지 않았다.

"아니, 언제 되는지도 알 수 없다니, 그런 나라가 세상에 어딨어?"

국내 최고이자 세계 유수의 글로벌 대기업 출신인 상무의 말이다.

그는 민원은 처리 시한이 반드시 있어야 하고, 공무원은 시한 내에 민원을 처리하거나 늦어지면 합당한 사유를 설명해야 하는 한국의 행정 시스템이 세계 표준이었고, 모든 나라가 그래야 당연한 거였다.

 

닥달을 해도 정확한 답을 받지 못한지 3개월이 지나자, 상무는 본사에서 대기하고 있던 설비와 초기 생산용 자재들을 인니로 보내 버렸다.

수입허가 나오고 나면 보내라고, 그렇지 않으면 받을 수 없다고 그렇게 신신당부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언제 허가가 나오는지 알 수 조차도 없다는 답변을 감정적으로 받아들인 모양이다.

오너 매제가 자기를 우습게 봤고, 새로 들어온 과장놈도 게을러서 질질 끌리는 걸 방치하고 있다고 생각했을 거 같다.

그래서 일단 보내 버리면, 게으름 피우고 질질 끌던 걸 부랴부랴 끝내든, 뇌물을 쓰든 어떻게든 처리할 거라고 봤나 보다.


컨테이너가 이미 자카르타 항구에 도착했지만 수입허가는 아직 나오지 않았다.

아무리 인니가 되는 것도 없고 안되는 것도 없는 나라라지만, 수입 허가도 안나온 업체의 화물을 내줄리 없다.

수입 허가 번호가 있어야 등록을 하고, 그래야 중간 과정을 후려치든 넘어가든 빼낼 수 있다.

컨테이너는 국영 적재소에서 3일간 계류됐다가, 보관료가 몇 십 배 비싼 민영 보관소로 옮겨 갔다.

돈 냄새 기가막히게 잘 맞는 세관 측이 무슨 수라도 썼는지, 공교롭게도 마무리 될듯 싶었던 수입 허가도 진척이 더뎌지기 시작했다.


수입 허가는 컨테이너가 도착한지 5개월이 지난 후에야 나왔다. 적당한 기름칠이 들어간 건 물론이다.

민영 보관소의 보관료는 6만 달러가 나왔다. 내용물인 설비와 자재 값에 육박했다.

문제는 그 뿐 만 아니었다.

반출 전 세관 검사에서 설비가 중고라는 사실이 적발됐다.

중고 기계는 수입 절차가 까다로우니 가급적 새 것을 보내고, 정 안되면 최소한 중고 티 나지 않게 싹 닦고 페인트라도 새로 칠해서 보내야한다는 건 본사에 특별히 강조한 사항이었다.

통관 대행사 직원이 사진을 찍어 보내왔다. 설비에는 여기저기 한국어가 수기로 적힌 라벨과 작업 표준서가 그대로 붙어 있었다. 초등학생이 봐도 쓰던 거라는 걸 알 정도로 노골적인 중고 설비였다.

인니 쪽으로 보내려고 새로 제작했는데, 그걸 본사 공장에서 낼름 갖다 쓰고, 자기들이 기존에 쓰던 설비를 보냈다고 한다.

한국 지방 촌구석 공장 사람들이 동남아 후진국이라며 너무 심하게 만만하게 본 모양이다.

덕분에 해결하느라 세관에 뇌물로 1만 달러가 또 들어갔다.

이 일로 상무가 사장에게 쪼인트를 까였는지 어쨌는지는 모르겠다. 상무가 지 성질에 못이겨 회삿돈 7만 달러를 날린 전설의 뻘짓은 누구나 알고 있지만 누구나 쉬쉬하는 야사로 남았다.

대기업 차장 정도면 엄청 똑똑하고 스마트하다는 건 편견이었다. 다 같은 인간이고 어딜 가나 병신은 있다.

회사 설립이 어느 정도 마무리 되고, 취업비자를 발급할 수 있게 되자 본사 전무가 법인장으로 발령되어 왔다.

권위주의를 인격화 시키면 이런 사람이 되겠구나 싶은, 권위가 떨어지면 픽 쓰러져 죽을 거 같은 사람이었다.

그는 직장 상사가 부하직원의 '모든 것'을 간섭할 수 있는 게 당연하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언젠가 이런 말을 했었다.

"가족과 회사는 위계 조직이니까, 부하직원은 직장상사를 회사에서는 상사로서 따르고, 퇴근 후 기숙사에서는 아버지처럼 따라야 하는 거야."

각색이나 과장 없이 정말 저렇게 말했다. 가족에 계급이 있다니, 개소리가 워낙 참신해서 아직까지도 그 때 그 광경까지 포함해서 또렷히 기억에 남아 있다.

직원을 자식처럼 여기는 인간과의 기숙사 생활은 충분히 많은 시간이 흐른 후에도 치가 떨릴 정도로 끔찍했다.

어느 날인가 기숙사에서, 밤 12시에 거실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마시는데, 건너편 방에서 전무가 문을 벌컥 열고 나와 잔뜩 인상을 쓰며 나를 노려봤던 일이 있었다.

전무는 엄청나게 빡쳤지만 꾹꾹 참는다는듯 억누른 말투로, 자신이 예민한 성격에 허리 통증이 심해서 잠에 깊게 들지 못하니 조심하라고 했다.

어렸을 적 단칸방 셋방살이를 전전했던 터라 조용히 걷는 게 버릇인데도 뭐라고 하면 어쩌란 건가.

그 후 전무와의 기숙사 생활 내내 발뒤꿈치를 들고 다녀야 했고, 냉장고 문도 소리 안나도록 양손에 힘을 꽉 줘 조심조심 가만히 여는, 그야말로 숨도 함부로 크게 못쉬는 생활을 해야 했다.
 
전무의 권위주의 관련해서 한국 본사 파견자가 얘기해준 에피소드가 있다.

전무가 인니 발령 후 한국으로 출장 겸 휴가를 갔었는데, 전무에게 지급됐던 차량은 이미 다른 임원에게 배정했기 때문에 본사에서 렌트카를 준비했다.

렌트카 업체에 간 전무는 차량을 보고는 "뭔가 착오가 있는 모양인데, 이 차일 리가 없다." 고 했단다.

전무는 렌트카 업체 직원에게 딱 그 말만 하고는 입을 꾹 다물고 버티고 있었다고 한다. 본사로 전화도 하지 않았다.

결국 렌트카 업체가 본사에 전화를 해 상황을 전했고, 본사 총무는 윗급 차량을 렌트해주라고 했다.

윗급 차량이 나오자 전무는 아무 말 없이 그 차량을 타고 본사로 왔다. 회사에 와서 뭐라 할 만도 한데, 아무 일 없었다는듯 차량 관련해서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전무가 인니로 발령난 일을 두고 본사에서는 좌천이라는 뒷말이 돌았다.

창업 때부터 함께한 전무와 원청인 대기업에서 낙하산으로 온 상무가 사사건건 부딪혔는데, 전무를 인니로 보낸 건 사장이 결국 상무의 손을 들어준 거라는 얘기였다.

인니 진출을 결정한 초기에는 상무가 가는 걸로 얘기가 진행됐었고, 그래서 자재 설비 수출하는 일이나 인니 법인 설립 진행 사항 체크하는 것도 상무가 관리했었다.

그런데 전무가 인니로 발령된 거다.

인니로 온 전무는 본사의 상무와 자잘하게 신경전을 벌였다. 서로 부하 직원 뒤에서 살살 돌려가며 삐딱선을 타는 바람에 직원들만 죽을 맛이었다.

그러다 급기야 둘이 직접 정면으로 부딪히는 일이 터졌다.

양자택일 한쪽 손을 들어줄 수 밖에 없는 일이었는데, 사장은 전무의 주장을 수용했다.

하지만 1주일 뒤, 상무를 부사장으로 승진시킨다는 공지가 사내 전산망에 떴다. 전무의 좌천이 공식화 된 셈이다.

그 후, 전무의 히스테리는 점점 심해졌다.

지사장 업무는 거의 손을 놓았고, 부하직원의 태도나 말투가 거슬린다며 다른 직원들 앞에서 훈계하는 일이 빈번해졌다.

6개월 후, 전무는 다시 한국으로 발령됐다.

그는 회사가 중견기업 규모가 커지지 않기 위해 쪼갠 자회사 중 하나에 전무로 가게 됐다.

좌천에서, 이번엔 유배를 가게 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