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주 일요일, 사장은 고문을 만나 수집한 관련 자료를 넘기고, 자초지종을 전부 말했다고 한다.
월요일 오전, 케빈은 고문과 면담하고 본사를 나섰다. 그날 주간회의는 서면으로 대체했다.
그날 오후, 본사로 다시 돌아온 케빈은 나를 불러냈다.
내일까지 회사가 지급한 물품들과 차량 반납하라고 통보 받았고, 이제 집에 가려는 길에 잠깐 들렀다고 했다.
- 다른 말 할 것 없고... 여기까지만 합시다.
- 여기까지만 하자는 니 말을 왜 나한테 하는지 이해가 안간다. 내가 뭘 하기나 했어야 그걸 관두던가 하지.
내 말에 케빈은 말없이, 가증스럽다는 눈빛으로 나를 지긋이 쳐다봤다.
나는 다시 말했다.
- 니가 믿든 말든 나는..... 아니다. 네가 믿고 말고는 의미가 없지. 이렇게 된 마당에 구구절절 뭘 설명하는 것도 웃기는 일이고. 그래, 여기까지만 하자.
- 믿고 말고가 뭔 의미가 있겠어요. 제가 여기까지 다 받아들였고, 여기까지 다 내 잘못이라고 그냥 아무 소리 안했잖아요. 여기까지만 하시죠. 더 하지 마시구요.
말없이 그를 쳐다보았다. 시선을 밑으로 내린 그의 눈동자가 끊임없이 흔들리는 게 보였다.
- ...그래, 내가 뭘 그렇게 했는지 모르겠다만, 그만 하자. 딱 여기까지만 하자. 더 말 할 것도 없다.
그는 다시 눈을 들어 내 눈을 응시했다.
- ...앞으로 볼 일 없겠죠?
- ...보지 말자. 예전에 너한테 말했던 대로 나도 회사 나간다. 니가 나한테 그랬던 것처럼 나도 너 쫓아내고 자리보전할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는데, 애초에 난 니 소개로 들어온 사람이야. 너랑 한패라는 의심이 없어질 거 같냐? 지금 당장 안나가는 것도 역시나 너랑 한패였구나 하고 사실로 굳어질까봐 마무리 하고 나가려는 거야. 그렇게 하고 나가도 의심은 계속 남을테고. 너 덕분에 이 회사 들어왔으니까, 너 때문에 나가기 싫어도 나갈 수 밖에 없는 상황이야. 나도 나가고 나면 너나 나나 접점 없어질테니까, 각자 자기 삶의 방식대로 알아서 잘 살고, 그냥 보지 말자. 또 봐서 뭐 할래. 혹시나 접점 생길 거 같으면 서로 피하자.
- 회사 몇 번 오긴 할 거예요. 인수인계 해줄 것도 있고, (변제 각서) 공증에 서명도 해야하고. ...여기까지만 해요. 서로 다신 볼 일 없게.
뭘 자꾸 여기까지만 소리를 되풀이 하는지. 여기서 더하면 다시 볼 일 생긴다고 협박하는 건지. 뜻도 모를 소리로 혼자 소설 쓰고 있는 게 지겨웠다.
- 그래, 그러자.
케빈은 고문과 했던 얘기라며 주절거렸다.
고문이 지사에 들인 설비의 오더를 가져 오면 커미션은 주겠다고 케빈에게 제안했단다. 물론 커미션 중 일부는 회사에 갚아야 할 빚에서 제하겠지만. 단, 담보를 먼저 넣어야 하는 조건을 걸었다고 한다.
"오더는 이미 확보됐는데, 담보가 없어요. 집이든 차든 받아 준다는데 제가 뭐 가진 게 있어야죠. 다 와이프 명의지."
설마 이 상황에도 낚싯줄 던지는 건가.
그러게 퇴사하기 전에 그 오더는 꼭 넣어야 한다고 예전에 내가 말하지 않았냐고, 넣어 놓고 뒤로 커미션 먹었으면 지금쯤 따박따박 들어왔을 거 아니냐고 했다.
" 그 땐 형님이 지사 빼앗아 가려는 줄 알았죠 뭐. 자꾸만 오더 넣으라고 넣으라고 하시니까요."
끝까지 구라다. 자기가 오더 넣으면 자기 자리만 굳건해지지, 내가 뭘 어떻게 뺏나. 애초부터 오더 따위는 없었을 거다.
케빈은 떠났다.
그 날 저녁 주간회식 분위기는 어두웠다. 이 판국에도 회식을 하는 게 대단했다.
평소 소주 딱 한 병만 마신다며 절제력을 자랑하던 고문은 평소보다 빠른 속도로 두 병을 비웠다. 어지간히 속상했었던지, 취한 목소리로 케빈과 단독 면담을 하면서 있었던 일을 얘기했다.
고문이 70만 개 오더 사업이 실패한 것을 지적하자, 케빈은 나와 전직장 총무와의 관계를 공개하며 내 탓인 것처럼 변명을 했다고 한다.
그럼 그렇지, 이 새끼 ㅋㅋ. 케빈은 애석겠지만, 같이 죽자고 터뜨릴 내 약점이랄 게 그 정도라는 건 예상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미 난 전 직장 총무와의 관계를 모두 다 사장에게 밝혔을 뿐 아니라, 미수금이 터졌을 때 전 직장 총무와 고문을 대면하게 해서 사실 관계를 직접 설명하게 했었다.
고문은 오히려 케빈에게 전 직장 총무가 10만개만 발주를 하겠다는 걸 30만 개, 40만 개 발주하도록 강요해서 미수 채권을 만든 이유를 추궁했고, 케빈은 아무 대답 못했다고 한다.
재스민이 나와 사귄다는 얘기는 재스민이 이미 퇴사해서 안했나 보다. 그 사실도 이미 사장과 고문에게 밝혔는데 아쉽다.
고문은 변제 금액을 깎으려고 한 케빈의 뻔뻔함이 가장 실망스러웠다고 했다.
물증이 확실한 횡령 금액만 집계해서 케빈에게 책임을 물었고, 케빈도 순순히 인정했다고 한다. 하지만, 면담이 끝나고 고문의 방을 나갔던 케빈이 다시 들어오더니 금액이 너무 크다며, 그 중 몇 가지는 개인적으로 유용하지 않았으니 수정해달라고 했다고 한다.
다시는 얼굴도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케빈이 변제각서 공증에 서명하기 위해 회사를 왔을 때도 마주치지 않으려고 되도록 사무실에만 있었는데, 담배 한 대 피우러 나갔다가 딱 마주쳐 버렸다. 역시 담배는 해악이다.
케빈은 공증에 서명하고 집에 가는 길이라며 말을 붙였다. 우리 다시는 보지 말자고 하지 않았나...
케빈은 자기가 빠지면서 회사 매출이 크게 줄어들 게 걱정이라고 말했다. 적어도 내게 그런 말을 하는 동안에는 '진심으로' 그리 걱정하고 있을 거다.
케빈은 내게, 자기는 회사 그만 둬야 하지만, 자기 운전기사는 잘못 없으니 회사에서 계속 고용해 달라고 했다. 그 말을 하려고 내게 말을 붙였나 보다. 이 마당에도 그런 부탁을 할 수 있는 뻔뻔함이 영업 능력의 원천이었나 감탄스러웠다.
나는 안된다고 잘라 말했다.
케빈은 이유가 뭐냐고 물었다. 그 태연한 얼굴을 보니 문득, 나와는 종이 다른 무언가를 보는 것 같아서 소름이 쭉 끼쳤다.
너와 친척 관계인 사람들은 모두 정리할 거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노동청에 부당 해고로 신고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래 운전 기사는 자기 담당한 사람 퇴사하면 같이 나가지 않느냐, 인원 감축하겠다고 하다가 파업까지 당한 회사가 없는 자리 만들어서 고용하겠냐고 했다.
케빈은 '넌 진짜 냉정한 새끼야'라고 눈으로 지긋이 욕을 하다가, 알았다며 자기 부인 명의로 된 차를 타고 회사를 떠났다.
케빈이 회사를 나간 이후로도, 한동안 그의 존재감은 회사에 여전했다.
글로벌 업체 납품 위탁 생산 업체에 파견하기 위해 채용했던 직원 2명이 케빈 부인의 친척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들은 해당 프로젝트가 날라가고 나서 직무가 붕 떠버렸고, 본사 생산 현장에 딱히 필요 없는 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사장은 케빈의 운전기사를 정리하면서, 그들도 정리하라 총무에게 지시했다.
총무가 둘을 불러 출근하지 말라고 했지만, 둘은 어찌된 일인지 여전히 회사에 나왔다. 총무가 불러 이유를 묻자, 그들은 케빈이 자기가 알아서 할테니 일단 계속 출근하라고 했단다.
총무는 케빈이 정리하겠다고 이미 사장과 약조했으니, 케빈에게 확인하라며 돌려 보냈다.
다음 날도 그들은 출근해서, 케빈에게 물어봤는데 계속 다니라고 했다고 말했다.
총무는, '여긴 케빈 회사가 아니라 사장 회사이니, 케빈이 시켜서 출근했다는 소리 그만하고, 케빈더러 사장에게 직접 연락하고 전하라'고 통보하고 돌려 보냈다. 그들은 다시 오지 않았다.
프락치질과는 별개로 일은 그럭저럭 했던 에이프릴은 근로 계약 만료 시까지 일하고 연장 없이 나가는 것으로 했다.
회사 직원들 사이에 내가 속임수를 써서 케빈을 함정에 빠뜨려서 그만두게 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누가 퍼뜨렸을지 뻔했지만, 무시했다. 어차피 이 회사 직원들에겐 아무 개연성 없이 그냥 씹고 뜯고 즐기는 가십일 뿐이다.
소문은 얼마 지나지 않아 잠잠해졌다.
케빈이, 자기가 입사에 관여했던 직원들 중에서 그나마 제 몫을 하던 이들에게 따로 연락해서 퇴사를 강요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해당 직원들과 개별 면담을 했다. 직원들은 별 비밀도 아니라는듯 순순히 털어놨다.
다른 회사 일자리 소개시켜 주면서 옮기라는 것도 아니었다. 케빈 자신과의 의리를 강조하고, 계속 다녀봐야 자기와 비슷하게 당할 거라는 엄포를 섞어가며, 회사를 그만 두라고 했다고 한다.
영업직원 메이가 영업해서 거의 성사 직전이었던 업체 5곳이 있었는데, 4곳이 돌연 거래를 취소하겠다는 통보를 해왔다. 메이는 다른 업체에서 로마이(중고 설비 매입을 지사에 연결했던 에이전트)와 마주쳤다.
그 업체 직원들을 캐봤더니, 로마이가 '우리 회사에 오더를 넣었었는데 거의 다 불량이었고, 납기도 제대로 지키지 못해서 피해를 봤다'는 얘기를 했다고 한다.
현지인 업체 몇 군데에서 우리 회사에 확인 전화가 왔다. 케빈의 전화가 왔는데, 우리 회사가 자신에게 줘야 할 돈이 있다면서 결제할 대금 있으면 자기 개인 계좌로 송금하라고 했다고 한다.
케빈이 해고 당한지 3개월 후, 나도 회사를 그만 두고 이직했다.
내가 관여한 일들은 마무리 할 건 하고 인수인계할 건 정리해서 깔끔하게 넘겼다.
내심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사장과 고문과도 좋은 얼굴로 인사 나눴다.
회사 사람들과는 이직 후로도 종종 연락했고, 아주 가끔 술도 한 잔 한다.
정말 다행히도 그 후로 케빈과 마주친 적 없고, 연락도 온 적 없다.
하지만, 내가 정말로 회사를 그만 두는지 아닌지, 케빈이 집요하게 지켜보고 있었을 거라는 건 알 수 있다.
억만장자가 되든, 길거리에 나자빠져 뒈지든 관심 없으니, 제발 이제 내게 신경 끊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