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한당 명랑쾌활

Indonesia/서식기 V

[회사의 부득이한 사정] 외전 3. 권력 싸움이 훑고 지나간 자리

명랑쾌활 2020. 7. 4. 09:50


창업주 회장과 아들인 사장, 그 밑으로 치열하게 견제하는 부사장파와 상무파.

스카웃된 해외파 부사장은 기업 운영의 선진화, 합리화를 지향.

회사에서 잔뼈가 굵은 현장파 상무의 반발.

드라마에나 나올 너무 전형적인 패턴이지만, 바꿔 말해 전형적이기 때문에 실제로도 흔한 법이다.


본사 부사장은 각 해외 공장들의 생산 관리를 현대화 하고자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현행의 주먹구구식 자재 사용을 막아야 했다. 불량이 터져도 차후 생산 자재를 끌어다 써서 덮기 때문에 생산성과 불량률을 정학하게 파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창고 관리를 외주에 맡기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창고 관리 직원이 같은 회사 소속이면 소용없다. 인사권도 없는 외주 업체의 통제를 직원들이 따를리 만무하다. 부사장은 창고 관리 직원까지 외주 업체 소속으로 바꾸고자 했다.

마찬가지의 이유로 상무는 창고 직원 소속을 외주 업체롤 바꾸는 걸 결사적으로 반대했다. 창고의 자재 반출이 완전히 통제된다면, 생산에서 문제가 터지는 걸 덮을 수 없게 된다. 상무를 비롯한 일선 관리자들에게 현대적 생산 관리는 현장을 모르는 헛똑똑이들의 이상론이었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방식이었고, 몇십 년 전부터 이어온 자신들의 방식이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창고 인력 소속을 외주 업체로 이관하라는 부사장의 첫 번째 지시에 대해, 상무파인 법인장은 사내 아웃소싱을 금지하는 인니 노동법을 근거로 들어 할 수 없다고 대응했다. 하지만, 실제 노동법 상에는 '생산에 직접적으로 연관이 있는 작업'을 아웃소싱 하는 것을 금지할 뿐, 딱히 창고 관리를 지정해서 내용은 없었다창고 관리가 생산에 직접적으로 연관이 있는 작업이라는 건 법인장의 자의적 해석일 뿐이었다.

본사 부사장은 관리 부장에게 관할 노동청에 불법 여부를 정식 질의하라고 지시했다. 관할 노동청에서 창고 인력의 외주 고용이 법적으로 문제가 없다는 답신이 왔다. 하지만 법인장은 지방 노동청 소속 일개 공무원의 개인적 판단이라면서 신용할 수 없다고 버텼다. 일개 외국인 법인장인 자신의 자의적 해석은 옳고, 유관 기관 소속 공무원의 판정은 개인적이라 신용할 수 없다는 해괴한 논리를 주장하는 셈이다. 이쯤 되면 대가리 디밀며 대드는 거나 다름 없지만, 본사 부사장 씩이나 되어서 일개 법인장과 논리가 맞네 틀리네 다투는 건 모양 빠지는 일이다.

본사 부사장은 따로 현지 사정을 알아 봤다. 인니에는 이미 창고 외주 관리를 하고 있는 한국 업체인 ZMA가 있었다. ZMA의 창고 관리 파견 직원들은 모두 자기 회사 소속이었다. 본사 부사장은 기존의 창고 관리 외주 업체와의 계약을 종료하고, ZMA로 변경하라고 지시했다. 상관의 지시 사항은 거부하는 건 법적 근거를 들어 할 수 없다고 버티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일이다. 지시 사항을 따르지 않는 건 하극상이고, 한국의 회사 조직은 그런 걸 용납하지 않는다. 깡 좋게 버티던 법인장도 따를 수 밖에 없었다.

ZMA는 실사를 마치고 세부 사항을 협상했다. 비용이나 다른 부분은 별 문제 없었으나, 창고 관리 인력의 소속이 문제였다. 법인장은 인력 소속을 절대로 넘길 수 없다고 버텼다. ZMA가 이미 다른 업체의 창고 외주 관리를 자기 회사 소속의 인원으로 문제 없이 운영하고 있었기 때문에, 법인장은 인니 노동법 상 금지라는 논리를 내세울 수 없었다. 대신 바이어측 요구사항이라 안된다는 새로운 논리를 들었다. 가만히 있던 바이어측이 나섰을 리는 없을테고, 법인장이 바이어측을 끌어 들였을 것이다. 바이어측에 '창고 아웃소싱이 현지 법률에 저촉될 여지가 있는데 진행해도 괜찮을까요?'라는 답이 뻔히 정해진 질의를 했을터였다. 그리고, ZMA측에는 앞뒤 자르고 그저 '바이어가 창고 인력 소속 변경을 원하지 않는다'라고 했을 거다.

ZMA측도 인력 소속 문제는 절대 양보할 수 없었다. 창고 인력을 자기 소속으로 하지 않으면 관리가 절대로 되지 않고 자재 망실 책임만 지게 될거라는 걸 10여 년 경험으로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협상은 결국 결렬됐다.


결렬로 인해 창고 관리에 공백이 생겼다. 계약 종료를 통보 받고 빠졌던 기존 외주 업체를 다시 불러야 했다. 기존 외주 업체는 예전에 있던 창고장을 이미 해고했기 때문에 대신할 사람을 다시 뽑아야 했다. 새로 채용된 창고장은 원래 회사 총괄을 했었던 사람이라 노동법에 해박했다. 본사 부사장은 외주 업체를 통해 신임 창고장에게 창고 인력 소속 외주 이관 문제의 법적 문제를 다시 검토하게 했다. 이전에 법적 문제를 검토한지 1년 만이었다.

신임 창고장은 법적으로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보고를 올렸다. 보고는 창고장 -> 기존 외주 업체 -> 부사장 경로로 전달됐다. 부사장은 신임 창고장의 보고를 들어 자신에게 반항해왔던 법인장을 깼다. 법인장은 노동법 상 금지 조항을 들어 다시 반박했다. 신임 창고장은 그 문제가 법률 해석의 문제이며, 쟁점은 창고 관리가 생산 활동에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지 여부인데, 노동청에서는 직접적인 연관이 없다고 판정했다고 맞섰다. 법인장은 근거를 요구했고, 신임 창고장은 이미 창고 인력을 외주 소속으로 운영하고 있는 도요타 자동차 공장 및 몇몇 대형 업체를 예로 제시했다. 법인장은 근거로 부족하다며, 인니 노동청 '장관'의 확인서를 요구했다.

외주 업체 상부로부터 신임 창고장에게 1년 전 관할 노동청에서 보낸 정식 답변서 이메일 내역이 왔다. 답변서는 관할 '노동청장' 명의로 온 것이었고 직인과 서명까지 있었다. 법인장은 노동청장 명의의 답변서를 일개 지방 공무원의 개인적 의견이라고 왜곡한 것이었다. 신임 창고장은 답변서가 노동청장 명의라는 걸 보고했고, 외주 업체를 통해 이 사실을 알게 된 부사장은 법인장에게 법적 문제는 없는 것으로 결론 짓고 인력 소속 이관을 진행하라고 지시했다.

법인장은 다시 바이어측 요구 사항이라고 버텼다. 신임 창고장이 알아 본 바, 바이어측의 요구 사항은 창고 인력을 외주 소속으로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었다. 현지 노동법에 어긋나는 조치를 하지 말라는 아주 상식적이고 원론적인 요구였다. 하지만, 여기서부터는 외주 업체 소속인 신임 창고장이 관여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었다. 법인장이 바이어측에 확인해야 할 일이었다. 하지만, 법인장은 끝끝내 바이어측에 확인을 진행하지 않고 버텼다.


부사장도 함부로 자르거나 할 수 없는 상무가 뒷배로 있다면, 차장 직급의 일개 법인장이 부사장의 지시를 버티는 건 가능하다. 대놓고 반항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딱히 질책하기 애매하다. 깨려면 깰 수도 있지만, 부사장의 위신에도 금이 간다. 물론 권력 다툼의 무게추가 한 방향으로 확 쏠린다면 그 즉시 피바람이 불겠지만, 어차피 사내 정치의 라인을 탄 이상 각오해야 할 일이다.

결국 인력 소속 변경 문제는 흐지부지 끝났다. 그 법인은 창고의 외주 관리를 종료하고, 자체 관리를 하게 됐다. 창고는 한 달 만에 다시 엉망이 됐다. 새로 들어온 자재들은 복도에 팔렛째 늘어서 있었고, 심지어 창고 바깥 처마 밑에도 쌓여 있었다. 선두에 서서 부사장에게 뻗대던 법인장은 다른 지사 법인장으로 영전했다. 물론 그 지사는 상무가 쥐고 있는 곳이었다.

상무파가 애초에 주장했던대로 창고를 자체 관리하게 됐지만, 우습게도 상무파 누구도 그 지사로 가는 걸 원하지 않았다. 자체 관리를 한다는 건 그에 관련한 문제의 책임까지 고스란히 진다는 뜻이었고, 다른 지사라면 몰라도 그 지사에서 문제가 터진다면 부사장이 절대 가만 놔둘 리 없었다. 그리고, 그 지사의 창고는 반드시 문제가 터질 거라는 걸 그룹사 간부들 중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상무파는 창고를 자체 관리하는 것이 옳기 때문에 주장한 게 아니었다. 그저 창고 관리 정상화로 인해 자신들의 생산 관리 방식에 존재하는 잘못들이 드러나지 않는 것만 원했을 뿐이다. 그들도 자신들의 생산 관리 방식대로라면 창고에 문제가 터질 것은 뻔히 알고 있었고, 그로 인한 책임까지 지는 것은 사양이었다. 그들이 내심 원했던 건, '예전부터 그래왔던 것처럼' 자신들의 방식대로 하되, 창고 문제는 외주 업체가 책임지는 것이었다.

애초에 상무는 자체 관리고 뭐고 관심 없었을 것이다. 변화니 혁신이니 같잖은 소리나 해대는 부사장에게 한 방 먹였으니 됐다.

그렇게, 원래도 그룹 내 험지였던 법인은 발령 받으면 퇴사를 고민해야 할 정도의 유배지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