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한당 명랑쾌활

Indonesia/서식기 V

초자연적 현상을 경험했던 썰

명랑쾌활 2020. 5. 27. 08:46


제가 근무하던 공장은 주변에 인가가 전혀 없는 곳이었습니다.

뭐 인니 대부분의 한국 업체들이 그렇습니다만, 그보다 더 심했습니다.

부도로 폐쇄된 공단 구역 내 한 켠을 임대해서 들어왔기 때문에, 용무가 있어서 찾아 오는 사람 말고는 아예 인적이 없었지요.

낮엔 그나마 괜찮았지만, 밤이면 분위기가 제법 음산했습니다.

폐쇄된 공단이니 전등 시설을 가동할 리도 없으니 컴컴했지요.

몇 년간 방치된 빈 공장 건물이 옆에 있었는데, 밤이면 유난히 시커먼 유리창 너머 뭐가 있을지 상상력을 자극하는 호젓한 분위기였습니다. (두 번째 사진 참조)


2011년도 초중순 즈음이었을 겁니다.

공장 초기 세팅 때문에 거의 매일 밤 9시가 넘어서야 퇴근하던 시절이었습니다. 저 혼자만요.

한국에서 보낸 기계는 아직 도착 전이었기 때문에 직원들은 일이 없어 정시 퇴근했고, 같은 한국인이었던 본사 파견 전무는 그보다 더 일찍 퇴근하고 있었습니다.
매일 상황 보고와 본사가 요구하는 자료를 취합해서 보내는 업무였기 때문에 퇴근해서 할 수도 있었지만, 그냥 사무실에서 야근을 했습니다.
전무와 같이 기숙사 생활을 했는데, 갖가지 잡다한 수발을 들어야 해서 업무를 제대로 제대로 볼 수 없었거든요.

퇴근길이 밀리면 2시간도 걸리기 때문에 보통은 미리 방광을 비우고 출발하곤 했습니다.

사무실은 공장 건물에 붙여 확장한 곳이었고, 화장실은 공장 건물 안에 있었습니다. (첫 번째 사진 참조)

공장은 모든 전등이 꺼져 캄캄했고, 화장실 안 형광등은 침침해서 근처만 겨우 흐릿하게 비추는 정도였습니다.

꽤 무서운 분위기지만, 당시의 저는 주변 모든 사람들이 다 저를 깔보고 방해한다는 피해의식에 절대 얕보이면 안된다며 악에 바친 상태라 딱히 무서움을 느끼진 않았습니다.


어느 날, 보고서 작성이 늦어져서 10시가 다 되어서야 업무를 마쳤습니다.

그날 따라 배가 싸르르 아팠습니다.

별 생각 없이 변기에 앉아 볼일을 거의 마칠 때 쯤 불현듯 뒷덜미가 선뜻하더군요.

딱히 무서운 생각을 한 적도 없고, 그 며칠 사이 공포를 유발할 매체를 접한 적도 없었습니다.

그야말로 정말 불현듯 그런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 순간 몸이 딱 굳으면서, 머리 위에 뭔가가 있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고개를 확 쳐들어 볼까 생각도 했지만, 고개를 들면 안보는 편이 나을 것을 보게 될 것 같았습니다.

그래도, 악에 바친 심리 상태가 그나마 용기를 줬던 모양입니다.

변기에 앉아 고개를 숙인채 몸이 굳은 상태로 "나는 무섭지 않다. 나는 무섭지 않다. 나는 무섭지 않다..."라며, 처음엔 아주 작게, 그리고 점점 크게 되뇌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가장 큰 목소리로 "나는 무섭지 않다!"라고 외치는 순간에 딱 맞춰서, 갑자기 화장실 형광등이 툭 꺼졌습니다.

제 손도 안보일 정도로 새까만 어둠과 정적.

들숨도 안나오고, 날숨도 안나오고, 진짜 숨이 딱 멈추더만요. ㅋㅋ


그 상태로 굳어 있은지 10초 (어쩌면 5초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쯤 후, 형광등이 빠르게 깜빡 거리다가 다시 불이 들어왔습니다.

그러자 몸이 풀리면서 숨이 쉬어지더군요. 들어마시기부터 한 걸로 보아, 들숨 중에 불이 꺼졌었나 봅니다.

어쨌든, 전 조심조심 뒤처리를 하고, 바지를 올렸습니다.

그러는 중에 고개는 계속 수그린 상태였고요.

화장실 문을 열고 나서면서 저는 조용히, "실례했습니다. 실례했습니다. 실례했습니다..."라고 되뇌였습니다. ㅋㅋㅋㅋ

그래도 존심에 '죄송합니다'라고 하고 싶진 않았던 모양입니다. 실제로 잘못한 것도 없고요.


그 후로도 야근은 계속 했고, 퇴근 전 화장실에 가는 것도 여전했습니다.

무섭다고 피해서야 회사 생활 못버티니까요.

다만, 화장실에 들어가기 전에 반드시, "실례하겠습니다."라고 조그맣게 말했습니다. 낮에도요.



뭘 본 것도 아니고, 그냥 혼자 벌벌 떤 시시한 얘기입니다. ㅎㅎ

하지만, 이 이야기에는 단 1%도 과장한 부분이 없습니다.

당시 느꼈던 공포심은 제 평생 가장 강렬했고, 아직도 기억이 생생합니다.

참고로 전 인적 드문 곳에 있다면, 귀신보다 사람 마주치는 게 더 무섭겠다고 느끼는 쪽입니다.

뭐 그냥 그렇다고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