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한당 명랑쾌활

Indonesia/서식기 V

명절에 돈 될 거리 찾아 다니는 사람들

명랑쾌활 2020. 4. 15. 08:36

평일 새벽 6시 반 쯤, 누군가 초인종을 누릅니다.

나가보니, 왠 남자가 집 앞마당 잔디를 깎지 않겠냐고 합니다.

아닌 게 아니라 풀이 많이 자라긴 했습니다.

그 사람도 주택단지를 돌아다니며 그런 집들을 찾는 거겠지요.

하지만, 새벽부터 남의 집 초인종을 누른 게 짜증나서요.

다른 날 오라며 돌려 보냈습니다.


인니에서는 No라고 딱 잘라 거절하는 건 예의가 아닙니다.

상대방이 상당히 무안해하며 마음 상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보통 쓰는 말이 '라인 깔리 사자 Lain kali saja', 즉 '(지금 말고) 다른 때 합시다'입니다.

그렇게만 말해도 거절로 알아 듣습니다.


이틀 후, 같은 시간에 누군가 초인종을 누릅니다.

전에 찾아왔던 사람 말고 다른 사람입니다.

역시 거절하며 돌려 보냈습니다.


나흘 쯤 후, 또 다른 사람이 찾아왔습니다. 물론 시간은 새벽 6시 반이었고요.

이대로 두면 주택단지 내 풀 깎는 일 찾아다니는 사람들 전부 다 만나게 생겼습니다.

항복해야죠.

얼마냐고 물었습니다.


인니에서는 정해진 가격이 없는 거래는 가격 결정을 반드시 미리 해야 합니다.

다 끝내 놓고 얼마냐고 물어 보면 상대방이 제시한 가격을 고스란히 내야 하기 때문에, 거의 대부분 바가지를 쓰게 됩니다. (가끔 정직한 사람도 있습니다. 아주 가끔요.)

시세를 이미 알고 있다면 굳이 미리 물어볼 필요 없이, 다 끝내 놓고 나서 돈을 내밀어도 됩니다.


그는 10만 루피아(= 8천원)라고 짖었습니다.

개소리 하고 자빠졌네!!! 라고 하지는 않고, 뭐가 그리 비싸냐고 물었습니다.

이제 곧 르바란이고, 풀도 버려야 하기 때문이랩니다.

명절이니 더 달라고 하는 거야 그렇다 치고, 풀 깎는 값 따로 버리는 값 따로라는 개소리는 좀 식상하네요.

풀은 집앞 쓰레기통에 버리면 되니, 5만 루피아 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는 아주 불손한 표정으로 알았다고 합니다.

어쩌겠어요. 싫으면 안하면 그만인데. 5만 루피아도 시세에 비해 꽤 쳐준 겁니다.

제초기 소리 시끄러울테니 10시에 다시 오라고 돌려 보냈습니다.


그 사람은 9시 반에 다시 왔습니다.

인니는 약속시간 30분 정도 늦는 게 일상다반사인데 이례적인 일입니다.

아마 다른 일거리 찾아 다니다가 없으니 자기 시간 편리한대로 왔거나, 다른 사람이 채갈까봐 조바심 쳤겠지요.


제초기도 없이 정원용 큰 가위로 풀을 치는 걸로 보아, 전문적으로 하는 사람이 아닐 겁니다.


작업은 딱 10분만에 끝났습니다.

수고했다며 웃는 얼굴로 5만 루피아 내밀었는데, 그는 입 댓발 내밀고 외면하며 받아서 훽 가버리더군요. ㅋㅋㅋㅋㅋ

10만 루피아를 받지 못한 게 못내 억울했나 봅니다.

받지 못한 5만 루피아를 자기 돈 빼았긴 것처럼 느끼고 있겠지요.


예전에 베트남에서 그런 억지 박탈감 심리를 제법 겪어 봤었습니다.

당시 베트남은 시골 노점상도 내국인과 외국인 가격을 구분해서 받고, 차라리 안팔면 안팔았지 절대 내국인 가격에는 안팔았었지요.

100원 짜리 200원에 팔면서 바가지 씌운다고 생각하지 않고, '응당 받아야 할 정당한' 가격이기 때문에 그보다 낮게 받는 건 손해라는 심리입니다.

후진적 국민성과 피해의식에서 비롯된 자존심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요즘 베트남은 어떨지 모르겠습니다만, 바뀌지 않았을 거라는데 500원 겁니다.

일개 개인 습관도 고치기 힘든데, 국민성 같은 집단 심리가 그렇게 쉽게 바뀔 리 없습니다.

요즘 코로나19 사태 관련해서 베트남이 한국에 하는 행태를 보면 더욱 확신하게 됩니다.

박항서 매직이 어쩌고, 샘숭 경제 이바지가 저쩌고 하면서 형제 나라라느니 간 쓸개 다 빼줄 것처럼 굴더니, 반 미를 빵 쪼가리라고 했다고 원수로 돌변했습니다.

역시 진면목은 어려울 때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좋은 시절에야 하하호호 다 좋겠지요.


어쨌든 이렇게 넘겼으니 내년 르바란 때까지는 새벽에 찾아와서 초인종 누를 일은 없겠네요.


르바란 때가 가까워지면 돈 될 거리를 찾아 돌아다니는 인니인들이 늘어납니다.

대부분 평소에는 부인 등쳐먹고 한량으로 빈둥빈둥 살다가, 명절 때가 되자 고향 갈 여비와 선물 마련하려고 돌아 다니는 사람들입니다.

개인적인 선입견으로 일반화 하는 거 아닙니다.

평소에도 작은 액수라도 벌려고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은 바가지 못씌웠다고 입 내밀고 그러지 않습니다.

표정도 밝고 예의 바르고 겸손해요.

한국인 관점에 너무 적은 액수를 지불하는 게 미안할 정도로요. (그렇다고 시세보다 많이 주는 건 대부분 나쁜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에 삼가해야 합니다.)

대목에 한 탕 치려는 놈팽이 마인드를 가진 인간들이 입을 내밉니다.

하긴, 한 탕 못쳤다고 얼굴에 불만 고스란히 드러내고 그러니, 제대로 된 일자리도 구하지 못하고 놈팽이로 사는 걸테지요.



이사 온 지 얼마 안됐을 때 겪은 일입니다.

지금은 제대로 유니폼 입고 제초기 들고 다니는 사람에게 정기적으로 작업을 맞깁니다.

주택단지 내 공용도로 잔디 정리하는 직원이 스케줄 빌 때 가외로 일하는 겁니다.

가격은 3만5천 루피아고, 바가지 씌우려는 수작 전혀 없습니다.

한국과는 다른, 외국에서의 일상 속 수많은 소소한 일들 중 하나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