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한당 명랑쾌활

여행기?/인도네시아

[Flores Indonesia] 8/18. Ruteng 읍내

명랑쾌활 2019. 9. 11. 10:25

숙소에 짐을 푸는 사이 비가 내리다 그쳤다.

숙소 직원 말로는 요즘 들어 매일 11시 쯤 비가 온다고 한다.

혹시 몰라 우산을 빌려 들고 점심을 먹으러 나섰다.


루뗑은 인근 반경 서너 시간 거리 내에서 가장 큰 도시이지만, 시골 읍내 풍경이다.


올해 4월 치뤄질 대선 및 총선 때문에 후보 홍보가 한참이다.

인니 선거 포스터는 한국처럼 심하게 정형화 되지 않았기 때문에, 지역별로 종족 전통옷이나 당시 유행하는 옷차림을 입는 식으로 시선을 끌려는 후보 사진이 종종 보여서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예전에 블리뚱 Belitung 동부의 망가르 Manggar 지역을 여행할 땐, 어느 후보가 캡틴 아메리카 복장에 자기 소속 정당 로고를 새긴 방패를 든 모습으로 합성한 선거 포스터를 본 적도 있었다. (그걸 사진을 못찍은 게 두고두고 아쉽다.)


독특한 교회 건물도 눈길을 끌지만, 그 앞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 아저씨의 사연이 궁금하기도 하다.


벽화 속 인물들의 눈이 묘하게 차갑다. ㅋㅋ

왼쪽 그림의 글귀는 종족어여서 전혀 이해를 못하겠다.

오른쪽 그림의 "Dengan KB, Keluarga Jadi Bahagia"가 '가족계획과 함께 하면, 가족은 행복해집니다'라는 뜻이니, 왼쪽 그림도 대충 그와 연관이 있을 그림이긴 한데... (KB = Keluarga Berencana = 가족 계획)

그럼 아빠 없이 엄마 둘에 남매인 가족인가!?!

아니면 친정 어머니와 시어머니가 충돌하는 막장 드라마?!?


인니도 한국처럼 예전엔 가족계획 캠페인을 했었기 때문에, 시골 지역은 아직도 그 흔적이 남아 있다.

지금은 인구가 곧 국력이라는 게 판명되었기 때문에 하지 않는다. (한국은 가족계획을 너무 잘해서 좆망했지... ㅋㅋ)


도로 끝에 보이는 건물은 라마 성당 Gereja Katedral Lama 다.

쭉 뻗은 도로의 끝에 정면으로 서있는 건물이 멋있어 보여서 한 번 가볼까 싶었지만, 고갯길 운전에 시달리고 허기진 몸상태 때문에 포기했다.

뭐 고행하려고 여행하는 건 아니잖나.


사진 속에 나를 쳐다보는 행인들이 찍혔다.

아직은 시골이라 외국인 돌아다니는 게 드문지, 길을 걷는데 다들 한 번씩은 쳐다봤다. ㅋ


라부안 바조부터 버스를 같이 타고 온 수녀님이 내렸던 교회가 바로 점심 먹으러 가는 식당 바로 옆에 있었다.


카페 아가뻬 Agape

확실히 기독교가 주류인 지역다운 간판명이다.

거리에 내걸린 빈땅 간판이 마음을 편하게 한다.

동그란 빈땅 간판은 맥주를 취급한다는 뜻이다.

이슬람이 강성인 지역엔 눈에 뜨이는 곳에 저 간판을 세우는 것조차도 통제한다.

다시 말해, 저 간판이 거리에 보이는 지역은 그만큼 개방적이라고 봐도 된다.


허름한 외관에 비해 내부는 깨끗했고, 꽤 많은 손님들이 있었다.

같은 버스를 타고 왔던 수녀님도 교회 관계자로 보이는 사람들과 식사를 하고 있는 게 눈에 띄였다. ㅋ


서양식 메뉴 구성인데 아주 저렴하진 않다.


플로레스 커피가 독특한 풍미가 있다고 하던데... 이건 그냥 꽝이었다.

숙소에서 무료로 제공하는 저렴한 막커피와 별 다를 게 없었다.


일행이 시킨 미 고렝


내가 시킨 나시 고렝. 한 대접 정도 양이 꽉꽉 눌러 나왔다. +_+

둘 다 맛있었다.

나시 고렝은 좀 짠 편이었는데, 한국의 소불고기 양념맛이 나는 게 좀 특이했다.

원래는 저렇게 많이 나오면 적당히 먹고 남기는데, 다 먹는 실수를 저질렀다.

지치고 허기져서 통제력이 약해진 모양이다.


아가페 카페 건너편 철물점 이름이 무려 '라인하르트'다.

왠지 그 옆으로 지크프리트 전파상이나 볼프강 미터마이어 잡화점, 로이엔탈 빵집 등등이 같이 있어줘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라인하르트 철물점의 경쟁업체 이름은 '얀 웬리'고.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후식으로 따후 고렝 Tahu Goreng (두부 튀김)을 샀다.

5천 루피아에 무려 7개, 1개에 60원 꼴이다. +_+


게다가 맛있기까지 하다.

두부 안에 비훈 Bihun (쌀로 만든 면) 이 들어있고 짭짤해서 잡채 군만두와 맛이 흡사하다.


마트에서 한국 라면을 판다.

인니에 이미 보편적으로 정착한 불닭볶음면 외에 장라면, 해물라면, 남자 라면, 일품 짜장면 등 희귀라면들도 있었는데, 수도에서 한참 멀리 떨어져 한국인도 거의 없는 이 곳에서 보니 신기했다.

속이 헛헛하니 안좋아서 몸보신이라도 할까 해서 곰탕 컵면을 하나 샀는데, 이후 일주일 가량 계속 가방에 넣고 다니기만 했다.


숙소 전경

오토바이 수리점인 옆건물 옥상으로 이어져 숙소 식당이 있다.


나름 독자적인 아메니티도 있는 격조있는 호텔이다.

저게 뭐 대단하겠냐 싶겠지만, 비누조차도 없는 숙소가 대부분이다.


컨디션이 좋지 않아 뜨거운 물로 샤워를 했다.

루뗑이라는 브랜드의 생수가 있을 정도라 이 지역 수질이 좋지 않을까 기대했는데, 역시나 피부에 확 느껴질 정도로 좋았다.


핫샤워를 하고 나자 갑자기 안좋은 증상이 확 올라온다.

현기증과 두통, 근육 피로에 몸도 으실으실 하다.

어제 1일 투어의 피곤함이 제대로 풀리지 않은 채로 구불구불 산길을 달려 내장 피로까지 겹치고, 허기진 상태에서 늦은 점심을 허겁지겁 과식하고, 고산지대 비 온 후의 냉기까지 더한 게 한 방에 터진 거 같다.

원인이 될 만한 것들을 꼽아보니, 점심 과식한 게 정말 바보짓이라 후회된다.

루뗑 시내를 돌아볼 계획을 취소하고 그냥 방에서 쉬었다.


이불 푹 뒤집어 쓰고 끙끙 앓고 나니 세 시간 쯤 지났다.

컨디션이 좀 돌아온 거 같다.

몸의 노화하고 있다는 걸 새삼 느낀다.

10년 전에 감당할 수 있었던 일정보다 훨씬 느슨하게 짰는데도 부족하다.

10년 뒤 쯤에는 나도 이제 장기 배낭여행은 힘들겠지 싶다.

어르신들이 왜 패키지 여행을 가나 이해가 간다.


남쪽 하늘

구름 높이가 낮아, 저녁놀 풍경이 특이하다.


서쪽 하늘

안개일지 낮은 구름일지, 지면 가까이 깔려 마치 바다나 호수 같은 풍경을 자아낸다.


동쪽 하늘


북쪽 하늘

큰 구름이 산을 조금씩 조금씩 삼키고 있다.


지기 전, 마지막으로 사이드에서 때리는 햇살에 정통으로 맞은 구름이 연기처럼 흩어진다.


저녁 6시 반 경, 저녁 먹으러 나섰다.

아직도 배가 싸르르 하고 기운이 없어 어디 돌아다닐 몸상태는 아니지만, 이럴 때일수록 끼니는 꼭꼭 챙겨 먹어야 한다.


숙소에서 멀지 않은 스프링힐 레스토랑으로 갔다.

구글 지도에서 보면 레스토랑 앞이 사거리, 오거리도 아니고 무려 칠거리길레 기대를 했는데...


그냥 뭐 그닥그닥이다.
하늘에서 내려다 봐야 멋질듯.


이건 길이라고 하기엔 좀...


그레자 크리스투스 라자 Gereja Katedral Raja

무려 '예수 왕 교회'라는 뜻이다. ㅋㅋ


스프링힐 레스토랑은 리조트에 딸린 곳이다.

정원과 연못을 정성 들여 멋지게 꾸민 보람이 있는지, 온동네 모기들이 여기 다 모여 사는 거 같았다.


돼지고기 요리가 있다.

중국 음식 위주의 메뉴였는데, 가격도 비싼 편이었다.

주인으로 보이는 아줌마의 외모도 중국계였다.


핫플레이트 두부 스페샬
종업원이 매운데 괜찮겠냐고 겁줬는데, 코로 먹어도 될 정도로 안매웠다.
그 종업원이 만약 불닭볶음면을 먹는다면 공중 3회전 떰부링 발광을 하며 독살 시도라고 경찰에 신고라도 하겠군.


속을 달랠겸 시킨 아스파라거스 닭고기 스프

울면 비슷하게 전분이 들어 가서 끈적한 국물이었는데, 짭짤하고 뜨끈한 게 좋았다.

이 정도 실력이면 게살 스프도 잘 할 거 같다.


역시나 속을 달래고 에너지도 보충할 겸 시킨 달달한 타로 Taro 밀크티 (taro 토란)

맥주는 눈물을 머금고 포기했다.


바비 아삼 마니스 Babi Asam Manis (babi 돼지, asam 신맛, manis 단맛)

뭐 그럭저럭 나쁘진 않았는데, 한국 탕수육에 비하면 좀 떨어지는 편.


인니 요리 이름에 asam manis가 붙었다면 탕수육 소스 비슷한 맛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탕수육 소스에 비해 신맛이 좀 강한 편이다.


맥주를 안마시니 확실히 식사 가격이 준다.

맥주 두세병 마시면 10만 루피아는 가뿐히 더 붙으니 뭐.


캄캄하지만 위험하다는 느낌은 없었다.


숙소 옆 오토바이 수리점은 삼발 세탄 Sambal Setan 이라는 노점으로 변신했다.

sambal 은 인니의 매운 소스고, setan은 사탄의 인니식 발음인데, 엄청 매운 음식을 전문으로 하는 모양이다.

맛집인지 손님이 바글바글했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일행이 산 양말

요상한 한글이 쓰여 있는데...


역시나 중국제다.

2만5천 루피아로 가격도 더럽게 비싸다.


천천히 걸어 숙소로 돌아오는 내내 식은땀이 나고 몸에 힘이 없다.

마숙 앙인 Masuk Angin 에 걸린듯 하다.

마숙 앙인은 굳이 번역하면 '감기'라고 할 수 있지만, 증상이 약간 다르다.

감기하면 떠오르는 일반적인 증상은 고열과 기침이고 몸에 통증이 있으면 몸살이라고 한다.

마숙 앙인은 몸이 으실으실하고 배가 싸르르 해서 기력이 없으며 두통을 동반하는 게 일반적인 증상이다.

현지인과 대화할 때 마숙 앙인을 머릿 속에서 감기라고 번역해서 인식하면, 한국의 감기 증상이 이미지로 그려져서 의사소통이 왜곡될 수 있기 때문에 그냥 원어 그대로 받아들이는 편이 낫다.


마숙 앙인에 좋은 똘락 앙인 Tolak Angin 이라는 약을 사먹었다. (약 이름부터가 angin을 거부한다는 뜻이다)

나온지 50년도 더 된, 인니 전통 생약을 재료로 만든 약이다.

인니의 국민약이고, 처방전이 필요없는 상비약이라 깡촌 시골 점방에서도 구할 수 있다.

인니인들은 몸 상태 좀 안좋다 싶으면 음료수 마시듯 이 약을 쪽 빨아 먹는다.

약효를 인정받아 네덜란드를 비롯한 외국으로 수출된다고 한다.

쌍화탕 농축한 맛인데 까스활명수 비슷한 효과가 나는 거 보면, 사람 사는 게 다 똑같구나 싶다.

내 체질에만 적용되는지 모르겠지만, 멀미 방지 효과가 있어서 이후 여행 중에도 요긴하게 썼다.


내일은 늦잠 푹 자고 오후에 출발하는 교통편을 알아볼까 한다.

내일 일어나봐서 컨디션이 영 안좋으면 하루 더 묵거나, 차량을 대절하는 것도 나쁘지 않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