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한당 명랑쾌활

Indonesia/서식기 IV

자연에서 산다는 건 벌레와 함께 산다는 것

명랑쾌활 2019. 8. 16. 12:58

바퀴벌레를 보면 비명도 못지르고 도망 갈 정도로 곤충에 대한 공포증이 심합니다.

살고 있는 곳이 워낙 공기 좋고 물 맑기로 인근에 소문난 지역이라서 그런지, 집에 잘 먹고 훌륭하게 자란 바퀴벌레가 워낙 심심찮게 출몰을 하다보니, 지금은 "우웩 씨부얼~" 하면서 휴지로 때려 잡는 정도는 됩니다. ("씨부얼~"은 욕이 아니라 본능을 극복하고자 하는 일종의 기합입니다.)

그것도 한국인들이 가장 무서워한다는, 크기가 엄지 손가락 만하고 위급하면 푸더더덕 하는 소리를 내며 날 수 있는 그런 놈들을요.

역시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에요.


하루 집을 비운 적이 있었는데, 다음 날 화장실에 들어갔다가 식겁했습니다.

바퀴벌레가 한 두 마리가 아니었는데, 그 중에는 서로 꽁무니가 붙이고 사랑을 나누는 열정적인 커플도 있었지요.

무심코 화장실 안에 두 발짝 들어갔다가, 상황을 인지하자 마자 소름이 쭈뼛 돋으며 0.5초간 몸이 굳었다가 최대한 은밀하면서도 빠르게 밖으로 나왔습니다.

그리고 즉시 사람도 죽을 분량의 살충제를 화장실 안에 때려 붓고 문을 닫았습니다.


30분 뒤 열어보니 상황은 정리되었습니다.

수채구멍이 살짝 틀어져서 열린 구멍으로 유입된 모양입니다.

총 아홉 마리더군요.

열정적인 커플도 꽁무니가 붙은 채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한날 한시에 태어나지는 못했어도 한날 한시에 죽을 수 있게 된 그들의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에 한 몫 거들 수 있어서 저도 씨발 흐뭇합니다.


인간에게 살기 좋은 환경은 대부분의 다른 생물에게도 살기 좋은 곳입니다.

대도시에 벌레나 동물이 드문 이유는, 인간이 그럭저럭 죽지는 않을 정도 수준의 적당한 공해로 찌들었기 때문이지요.

마치, 벌레는 죽일 수 있지만, 인간은 대충 흡입하는 정도로는 죽지는 않지만 분명히 몸에는 나쁜 살충제처럼요.

공기 좋고 물 맑은 자연에서 살고 싶은 분들은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자연 속에 산다는 것은, 그 자연에 '속한 것들'과 더불어 산다는 의미라는 걸요.

벌레 공포증이 있는 사람이 자연 속에서 산다는 건 너무 가혹한 환경이지요.
그래서 전 도시가 좋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