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한당 명랑쾌활

Indonesia/서식기 IV

떠난지 오래 되어 잊고 있었던 한국의 계급주의 문화

명랑쾌활 2020. 12. 30. 08:16


새 회사로 옮기면서, 이전 회사보다 두 직급 낮춰 들어가게 됐다.

내 입사 조건을 조율하는 역할을 맡은 팀장은 내게 직급을 낮추게 된 걸 양해해달라고 했다.

나는 괜찮다고 했다.

정말 괜찮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그게 양해해달라고 할 일인가 의아했다.

월급 액수가 중요하지 직급 따위 뭐가 중요한가?

업무에 있어서도 중요한 건 직무와 권한이지 직급이 아니다.

하지만, 내가 뭔가를 잊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건 그리 오래지 않았다.


원청 고객사의 부장은 차장인 나를 대할 때와 상무인 지부장을 대할 때의 태도가 달랐다.

나를 대할 적에 보이는 불손하고 강압적인 태도는 원청 갑질이려니 했었는데, 내가 속한 회사의 지부장에게 조심스럽게 대하는 걸 보니 그렇지 않은 거 같았다.

상무의 나이가 특별히 많은 것도 아니었고, 나이 대접하는 사람이었으면 두 살 많은 내게도 그러지 말아야 한다.

상무와 가까운 사이도 아니었고, 상무가 로열 패밀리인 것도 아니었다.


업무 범위 문제로 그 문제의 원청 부장과 충돌이 있었던 적이 있다.

인니 법률 상, 내가 뭘 어쩔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걸 원청 부장은 당최 이해를 못했다.

원청 부장은 급기야 "내가 직급이 높습니다. 그러니, 내가 지시하면 그냥 따르세요." 라는 말을 했다.

아무리 원청 갑질이라지만, 다른 회사 직원에게 어떻게 그런 개념 없는 소리를 할 수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며칠이 지나서야 문득 기억났다.

한국식 개념에서는 회사 직급이 곧 인간의 높고 낮음의 척도로 받아들여진다는 사실을.

한국식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은 과장보다 차장이, 부장보다 이사가 더 나은 인간이라고 인식한다는 사실을.

다른 회사 사람이라도 직급 대우를 해준다는 사실을.

대기업 부장 정도 되면 '일반인'과는 다른 특별한 사람으로 우러러 본다는 사실을.

한국을 떠나서 산지 10년이 넘은 나는 그런 사실을 언젠가부터 잊고 있었던 거다.

완전히 잊어서 의식조차 못했기 때문에 이해가 안간 거였다.

인니에서는 조직 안에서의 계급과 조직 바깥의 인간 관계는 별개인 게 너무나 당연한 상식이니까.


한국 사회에서 벗어나 본 적이 없는 사람들 거의 대부분은 깨닫지 못한다.

너무나 당연해서 의문조차 품어보지 못했던 한국의 문화들 중에 불합리하고 비논리적인 것이 얼마나 많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