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에 산적한 문제들을 점진적으로 개선해 나갔고, 가시적인 성과가 나타났다. 잘해서가 아니라, 이전에 워낙 개판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영업 부서는 소소한 시스템 개선만 진척됐을 뿐, 근본적 문제의 개선은 벽에 부딪혔다. 거의 모든 문제의 근원인 영업부 최고참 현지인 직원 야니에 대한 조치 만큼은 사장이 가로막았기 때문이다.
사장은 야니에 대한 신뢰가 비정상적이라 느껴질 정도로 굳건했다. 야니와 공장장이 업무상 문제로 갈등을 빚다가 심각한 감정 싸움으로까지 번지자, 사장이 공장장을 해고했던 적도 있었다. 10여년을 근무해온 사람이었다.
이후로 야니는 더욱 의기양양해져서 생산 현장 상황을 무시하고 자기가 컨트롤하는 오더 위주로 생산 지시를 내렸다. 생산 부서 직원들은 자포자기하는 경향이 강해졌다.
언젠가 사장이 사석에서 술에 잔뜩 취해서, '나 처음 이 일 시작하면서 말도 잘 안통해서 직원들 전부가 바보 취급했을 때 자기 믿고 따라준 직원이라며, 회사를 닫는 한이 있더라도 야니를 자르진 못한다'고 내게 말했을 정도였다.
내연 관계는 없어 보였다. 아니, 내연 관계를 맺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할 외양이 전혀 아니었다. 그래서 미스테리다.
한국인 여직원의 경우와 비슷하게, 케빈은 야니에 대해서도 이미 손을 떼버린 상황이었다.
케빈은 자기 뜻대로 통제할 수 없으면 적대시하고 배척을 하는 성향이었다. 편제 상으로는 자기 부서 소속 부하 직원임에도.
사장이 싫다면 억지로 우길 수도 없는 일이다. 사장 지침에서 벗어나지 않으면서 성과를 내야 하는 게 월급쟁이다.
자꾸 불량을 일으키는 설비를 손도 대지 못한다면, 그대로 두고 다른 설비를 구해서 쓰면 된다.
사장이 회사 망하는 한이 있더라도 야니는 보호하겠다니, 야니가 지금껏 자신이 해왔던대로 하고 월급도 따박따박 받으며 행복하게 살도록 해주면 될 일이다.
케빈과 나는 상의 끝에 얀띠의 기존 영업부는 영업 1부로 두고, 케빈이 새로 개척하는 거래처들을 전담하는 영업 2부를 새로 만들기로 했다. 케빈은 자신이 부서를 통솔하기에는 역량이 부족한 것 같다며, 내게 부서를 세팅해줄 것을 요청했다. 자기 업무 스타일에 맞출 수 있게만 해주면 된다고 했다.
나는 사전 작업으로 영업직을 2명 충원했다. 신입을 뽑았다간 영업 1부로부터 일을 엉망으로 배우게 될 것이 우려됐기 때문에 경력직으로 뽑았다. 영업 실무는 케빈이, 나머지 회사 내부 시스템은 내가 교육 시켰다. 새로 뽑은 경력직들에게는 영업 1부 체계를 절대 참고하지 말라고 늘 신신당부했다.
단순히 2부를 만드는 걸로는 부족하다. 나와 케빈이 따로 교육시킨다고 해도, 영업 1부와 같은 공간에 있다면 결국 물이 들 수 밖에 없다. 한국인까지 포함한 전 직원 중에서 가장 파워가 센 직원인 야니의 말을 거역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마침 케빈이 1년 간 작업한 대형 글로벌 기업 납품 건이 거의 성사되어, 테스트 납품을 앞두고 있는 시점이었다.
케빈과 나는 이 대형 납품 건을 명분으로 지사 격인 마케팅 사무실 오픈하는 것을 사장과 고문으로부터 승인 받았다.
지사장은 케빈이, 나는 본사와 지사를 오가며 양쪽 내부 관리를 맡게 되었다.
지사 오픈 업무는 내가 맡아서 진행했다. 원래 내 일이기도 하고, 케빈은 관련 경험이 없었다.
장소 선정이 끝나고 인테리어 업체를 선정하는데, 케빈이 업체를 추천했다.
"제가 아끼는 후배가 일하는 업체가 있는데, 일 괜찮게 한다고 하더라고요."
케빈의 후배와 업체 대표가 찾아와서 미팅을 했다. 그런데 업체 대표 상태가 이상했다.
느낌이 쌔해서 그쪽으로 발이 넓은 선배를 통해 알아봤더니, 평판이 매우 안좋은 업체였다.
선금 받으면 공사 자재를 구매하지 않고 다른 데 쓰고, 자재 없다며 공사 기한 질질 늘리며 자꾸 추가 선금 요청하고, 공사 의뢰인 측이 어떻게든 오픈해야 될 상황까지 몰리게 되면 안좋은 자재 써서 공사 마무리 해버리는 사례가 자주 있었다고 한다.
케빈에게 얘기를 하니, "아, 그래요? 몰랐어요. 참 열심히 사는 후배인데 안좋은 회사 들어갔나 보네요. 저랑 가끔 얘기할 적엔 회사 잘 다닌다고만 하고, 그 이상 깊은 얘기는 잘 안하니까 그런 줄 몰랐네요. 죄송해요, 형."
그럴수도 있겠다 싶어서,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다.
후보로 잡아둔 현지 업체를 선정해서 그쪽과 진행했다.
영업 직원과 경리, 두 명을 더 충원하기로 했다.
공고를 내서 충원하려는데, 케빈이 추천을 했다.
"저 쫓겨난 전 회사 직원들인데요, 지금은 퇴사했어요. 영업 쪽 직원은 일 아주 잘하는 건 아닌데, 무난해요. 경리 쪽은 정말 잘해요. 정직하고요. 왜 나왔는지는 모르겠어요. 경리는 저랑 친했는데 회사에서 뭐 누명 씌워서 쫓아냈다는 얘기 들었었어요."
일단 면접 보고, 어지간하면 뽑기로 했다. 어차피 지사장은 케빈이고, 자기 부서 직원 뽑는 거다.
"아, 근데 경리는 형님하고 면담 좀 먼저 하면 안되겠냐고 하네요. 그러고 입사할지 정하겠다고요. 아마 한국 회사에서 억울하게 쫓겨난 적 있어서, 또 그런 일 당할까봐 그러나봐요. 잘은 모르겠어요, 왜 그런지."
(이번에도!) 그럴수도 있겠다 싶어서, 경리와 면담을 했다. 경리는 근무 조건 등 이것저것 답을 듣고 입사하겠다고 했다.
전 직장에 관해 슬쩍 물어봤지만, 별로 얘기하고 싶어하지 않는 기색이 역력해서 그냥 넘어갔다.
지사는 별 일 없이 오픈했다.
본사에서 교육 받던 경력직 영업 2명도 지사로 출근했고, 캐빈의 소개로 채용한 영업직과 경리도 출근했다.
캐빈은 별다른 이슈가 없으면 주간회의가 있는 매주 월요일만 본사로 출근했다.
나는 1주일의 반은 본사, 반은 지사로 출근했다.
지사 오픈 1개월 후, 케빈이 본사의 영업 1팀 소속 직원인 에이프릴을 지사로 출근시켰으면 한다고 상의해왔다.
"제가 데려온 친구거든요. 그래서 그런가, 저 지사로 출근하고나서부터 야니 주도로 왕따 당하는 모양이예요. 밥도 혼자 먹고, 쉬는 시간에 대화할 때도 따돌린다네요. 애가 맘고생 심한지 살도 많이 빠졌고, 얼굴도 꺼멓게 죽었더라고요."
살이 빠졌는지는 모르겠고, 안색도 잘 모르겠던데...?
나는 직원들 끼리 사적인 감정 문제로 부서 변경을 하는 건 온당치 않다고 했다.
"영업 2팀이 따로 영업한다고 해도 어차피 본사랑 커뮤니케이션 할 일이 없을 수가 없는데, 에이프릴에게 맡기면 적임이지 않을까요? 2팀 애들이 경력직이긴 해도 본사 돌아가는 사정은 잘 모르니까 그런 부분도 도움이 되고요. 제가 데려온 친구라 어떻게든 책임져주고 싶어요."
영업 부서 내부 문제에 대한 영업 부서장의 의사다. 난 상명하복 지키겠다고 하고 입사한 입장이기도 하고.
관련 사항을 사장에게 보고했다.
사장은 자기가 봤을 땐 아무 문제 없다며, 밥도 같이 먹고 자기들끼리 웃으면서 얘기하고 예전이랑 분위기 똑같다면서도, 아무튼 영업 부서장이 요청했으니 진행하라고 승인했다.
에이프릴도 지사로 출근하게 됐다.
내가 입사한 이후로, 선배형은 자신이 내 입사에 큰 도움을 주지 않았냐며, 케빈 빚 문제를 나더러 옆에서 압박하라고 했다.
케빈이 결혼할 때까지는 여유가 없다며 상환을 미뤄왔는데, 결혼하고 나서도 매달 나눠서 갚는 걸 자주 빠뜨렸다.
빌려주고도 제촉해야 하니, 선배형은 여간 짜증 난 게 아니었다.
매월 월급날이면 케빈에게 선배형 빚 갚아야 한다고 알려줬다. 그럴 때마다 케빈의 반응이 좀 묘한 것이, 아차 깜빡했다고 말은 하는데 표정이 어색했다. 깜빡했다기 보다는 돈이 쪼들리는 것처럼 보였다.
케빈은 돈 문제에 대해 흐릿했다.
매월 빚을 갚을 때 이자 대신으로 선배형에게 저녁을 사기로 약속했은데, 나도 자주 그 자리에 합세했다. 그런데, 세 번에 한 번 꼴로 카드를 부인에게 잠시 빌려줬다거나 카드 한도가 다 됐다는 등등의 이유를 대며, 나에게 대신 계산해 달라고 했다. 그 영수증을 자신이 챙기며 회사에서 영업비로 처리해서 주겠다고 했는데, 영업비로 정산 받고도 바로 갚는 일이 드물었다.
어쩌나 내버려뒀더니 한 달을 훌쩍 넘겨가며 그 사이 몇 번을 내게 대신 계산해 달라고 한 적도 있었다. 그래서 내가 먼저 얘기를 꺼내니, 예의 그 어색한 표정으로 깜빡했다며 다음에 영업비 처리하면 주겠다고 했다. 나중에 돈을 갚는데, 금액도 맞지 않았다. 네 번 빌려준 것 중에 하나 빠뜨리고 셋만 갚은 것처럼 딱 맞아 떨어지지도 않고, 그냥 50~100만 루피아가 부족한 일이 빈번했다. 영수증을 자기에게 넘겨주고 없으니, 내가 금액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하지만, 내 지갑에서 현금으로 계산하는 거라 적어도 10만 루피아 단위까지는 기억한다.
내 집 근처 식당에서 접대 중이었는데 카드 한도가 다 됐다며, 밤에 내 집으로 찾아와 돈을 빌려 간 적도 몇 번 있었다. 물론 그런 돈은 며칠 내로 갚기는 했다.
하지만, 영업한다는 사람이 계산 수단이 그리 자주 없어진다는 게 이해가 안갔다.
월급 액수도 충분히 크고 영업비도 꼬박꼬박 정산해 갔다. 알콜 알레르기 때문에 술은 입에도 대지 않는다.
돈 쪼들리는 사람이 보이는 전형적인 행태인데, 주변 상황이 딱히 그럴만 하지 않아서 이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