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한당 명랑쾌활

Indonesia/서식기 V

[회사의 부득이한 사정] 외전 1. 왜 굳이 남의 회사에 창고 외주 관리를 맡길까?

명랑쾌활 2020. 6. 12. 09:52


대부분의 사람들은 창고 관리 업무란 게 별 거 없어 보일 것이다.

생산할 제품에 필요한 자재들을 파악하고 소요량을 계산하는 것도 아니고, 생산 일정에 맞춰 자재 발주 스케줄을 조율하는 것도 아니고, 특별한 기술이 필요한 가공 작업을 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납품된 물건 종류와 수량 맞는지 확인하고, 잃어 버리거나 파손되지 않게 잘 보관했다가, 생산에서 달라는 대로 인계하면 되는 거 아닌가.

맞다. 창고 관리 업무라는 건 그 게 전부다. 별 거 없다.

하지만 그렇다면, 왜 어떤 회사들은 다른 회사에 비용 지불해가며 외주 관리를 맡길까?

단순하게 생각하면 답이 나온다.

납품된 물건 종류와 수량 맞는지 확인하고, 잃어 버리거나 파손되지 않게 잘 보관했다가, 생산에서 달라는 대로 인계하면 되는 그 별 거 없는 업무가 어렵기 때문이다.


창고 관리 업무가 어렵다는 사실을 이해하려면 먼저 한국 봉제 업체의 환경을 알아야 한다.

봉제 산업은 경공업, 즉 자본과 기술의 비중이 낮은 산업이다. 다시 말해, 교육 수준이 낮은 저임금 근로자를 때려 넣어 제품을 싸게 뽑아내는 게 중요하다는 뜻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저개발 국가가 국가 산업 발전을 도모할 때 첫 걸음으로 시작하는 산업 중 하나가 봉제 산업이다. 일본이 그랬고, 한국이 일본의 자리를 탈환해서 그를 발판으로 산업을 발전시켰다. 그렇다면 한국도 일본처럼 중국을 비롯한 후발국들에게 봉제 산업의 자리를 빼앗기는 것이 필연적이다. 하지만, 비록 저임금 국가로 공장을 이전하긴 했지만, 한국 봉제 업체들은 여전히 전세계 봉재 업계에서 높은 점유율을 유지하고 있다.

저임금 국가로 진출한 초기라면 모를까, 시간이 지나면 그 국가의 현지 업체들에게 점차 주도권이 넘어간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봉제 산업은 자본과 기술의 비중이 낮기 때문이다. 봉제를 비하하는 건 아니지만, 초고가의 특수한 옷이 아닌 이상 봉제 기술이란 결국 거기서 거기다. 학교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도 숙련할 수 있고, 감춰진 기술이랄 것도 없다. (교육 수준이 낮은 저개발 국가가 봉제 산업에 적합한 이유 중 하나다.) 하지만, 한국 봉제 업체들이 해외에 진출한지 30년이 넘었음에도 여전히 건재하다.

한국 봉제 업체들이 건재할 수 있는 이유는 운과 특별한 능력, 바로 '말도 안되는 걸 어떻게든 해내는' 능력이다.

제조업의 경쟁력은 시간, 단가, 품질, 3요소로 결정 된다. 제조 시간은 짧고, 단가는 저렴하면서도, 품질은 좋을수록 경쟁력이 뛰어나다. 하지만, 3요소는 상호 배타적 관계이기 때문에 모두를 충족하기는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필요한 것이 기술력이다. 품질에 영향을 주지 않으면서 빨리 만드는 기술력, 자재를 최소한만 사용하는 기술력 등등. 여기까지라면 한국 봉제 업체들은 후발 주자들에게 주도권을 빼앗겼을 것이다. 전술했다시피, 봉제 기술이라는 건 딱히 첨단 과학이 필요한 여지도 적고, 시간, 단가, 품질을 끌어 올리는 것도 결국 물리적 한계가 있기 때문에 (작업자들 손을 4개로 만들거나, 자재를 순간이동 시킬 순 없다), 결국은 따라 잡힐 수 밖에 없다.

그런데, 하필 미국이나 유럽 등 주요 의류 시장이 다품종 소량이라는 새로운 트랜드로 변화했다. 한 가지 디자인을 대량으로 생산한다면, 기술력이 다소 낮더라도 얼마든지 경쟁할 수 있다. 숙련도는 점점 올라갈테고, 인건비 저렴한 인력은 널리고 널렸다. 하지만 다품종 소량 생산을 하려면, 취급해야 할 자재의 종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생산 공정이 빈번하게 변하면서 불량률은 늘어나고 숙련도 향상은 더뎌진다.

중학생도 충분히 풀 수 있는 시험 난이도가 지속됐다면 고등학생이 유리할 것이 없지만, 시험 난이도가 올라간다면 유리해진다. 시장의 변화로 인해 봉제 제조업의 난이도가 올라간 덕분에 한국 봉제업체는 주도권을 놓치지 않을 수 있게 됐다.

공정이 단순할수록 변수가 적다. 자재 단가와 생산 속도가 뻔하다면, 결국 인건비 싸움이다. 하지만, 공정이 복잡해진다면, 고려해야 할 것이 많아진다. 소요 자재 확보와 관리, 생산 중 제품을 변경하기 위해 공정을 교체하는데 걸리는 시간, 변경으로 인한 잔여 자재와 신규 투입 자재 관리, 각 제품별 제조 및 납품 스케줄 관리 등등인데, 바이어는 이런 '시시콜콜한 것들'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고 관심도 없다. 바이어에게 중요한 건 시간, 단가, 품질, 그리고 '할 수 있어?'다. 이 부분에서 한국 업체들의 말도 안되는 걸 어떻게든 해내는 능력이 빛을 발한다.

다른 업체들이 '그 조건에 그 가격은 말도 안되는데요'라고 할 때, 한국 업체들은 '네, 가능합니다'라고 한다. 다른 업체들이 무능해서가 아니다. 현실을 상식적으로 생각해보고 그러는 거다. 한국 업체들은 비상식의 영역까지 넓혀서 방법을 생각하기 때문에 가능한 거고. 비상식적인 방법은 여러 가지다. 가령 주당 제한 근로시간을 넘겨 야근 특근을 시키면서 수당을 현금으로 지급해서 증거를 남기지 않는 방법은 어지간한 현지인 노동자들도 다들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 외에도 많지만, 이미 장황한 이야기가 두 배로 장황해질테니 넘어가기로 한다. 중요한 건, 한국 업체들이 '상식적으로 말도 안되는 일감'을 수주한다는 사실이다.

한국 봉제 업체들은 가능은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말도 안되는 일감을 쳐내는 게 일상이다.


가능은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말도 안된다는 건, 다시 말해 모든 상황이 이상적으로 맞물려 돌아갔을 때 가능하다는 뜻이다. 하지만, 완벽한 공장은 있을 수 없다는 건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다. 가뜩이나 저임금 국가 내에서도 다른 산업에 비해 노동력의 평균 수준이 낮은 편인 봉제 업계라면 더욱 그렇다. 그렇다고 한국인 관리자의 수준이 뛰어나느냐 하면 그렇지도 않다. 애석하게도 한국 봉제 업계 현장 기술자들 대부분은 쌍팔년도식 막무가내 스타일이 골수에 박힌 사람들이다. 그런 공장에 애초부터 말도 안되는 일감을 줬으니, 그 걸 어떻게든 쳐내려면 생산 역시 상식적으로 돌아 갈 수가 없다. 생산이 상식적으로 돌아가지 않으니 자재에도 문제가 생길 수 밖에 없고.


가령 A제품 1,000개를 생산하고, 이어서 B제품 1,000개를 생산한다고 치자. 불량률 감안하여 A 제품 1,010개를 생산할 자재를 투입하고, 이어서 B제품 1,010개를 생산할 자재를 투입하면 된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게 딱 떨어지고 만만하지 않다.

1. B제품 자재들 중 일부를 원래 있어야 할 장소가 아닌 다른 곳에 갖다 놓는 일이 벌어지면?

2. A제품을 한참 생산하고 있는 중에 다른 라인에서 선적 때문에 급하게 쳐내야 하는 C제품 생산에 차질이 생겨 갑작스럽게 C제품으로 생산을 변경해야 한다면, 남아 있던 A제품 자재와 B제품 10,10개 분량 자재는 어디로 치워질까?

3. 위 2번의 치워진 자재를 기억하는 직원은 퇴근하고, 야간조가 투입되어 생산을 이어서 하려고 한다면?

4. 의사소통이 잘못되어 A제품 생산하는데 B제품 자재를 붙여서 생산했다는 사실을 한 500개 정도 생산하고 나서야 알았다면?

5. 미숙련 인원이 투입되어 심각한 불량이 50개 정도 발생했다면?

6. 바이어 공장 시찰 때문에 생산 구역 여기저기 쌓여있던 자재들을 급히 치워야 한다면?


위 사례들은 실제로 있었던 일들이고, 그밖에도 많다. 심지어 그리 드물지도 않다. 이상적인 공장이라면 있을 수 없는 일들이다. 위 사례들에 대한 '현실적인 대응'은 다음과 같다.

1. 작업 반장이 찾아 다닌다. 찾으면 다행이지만, B제품 생산 투입 시점에서야 알게 되어 찾기 때문에 계획보다 생산량이 그만큼 떨어지게 되는 건 어쩔 수 없다. 못찾으면 일단 자재 창고에서 훔치든 무릎 꿇고 빌든 어떻게든 갖다 써야 한다.

2. 공간은 돈이다. 통상적이지 않은 돌발 상황에 대비해 여유 공간을 두는 공장은 없다. 자재들은 통로든 작업대 밑이든 일단 어떻게든 치운다. 급하게 치워야 하니 잘 분류해서 정리할 시간 여유도 없다. 대충 정리해서 때려박는다.

3. 일단 찾아 헤맨다. 누구에게 전화해서 물어봐야 할지도 확실하지 않고, 퇴근하면 어지간하면 회사 전화 안받는다. 못찾으면 일단 어떻게든 창고에서 갖다 쓴다.

4. 일단 어떻게든 창고에서 갖다 쓴다. 원래대로라면 한국인 관리자에게 보고하고 확인서 받아서 창고에 요청해야 하지만, 그랬다가는 한국인 관리자가 미친 개처럼 버럭버럭 소리지르며 죽일듯이 화를 낸다. 일단 모면하고 나서 나중에 여유 자재로 채우든 어떻게든 해결하면 된다. (그렇게 될 리가 없다.)

5. 4번과 마찬가지다. 그러니 일단 어떻게든 창고에서 갖다 쓴다.

6. 공장이 넓은 거 같아도 생산 구역엔 의외로 물건을 숨길 공간이 없다. 물건을 보관할 목적으로 만든 장소인 창고 밖에 없다. 일단 몽땅 때려 모아서 창고에 갖다 숨긴다. 창고는 받지 말아야 한다. 하지만, 급한 상황에 그딴 건 없다. 지랄을 하든 사정을 하든 어떻게든 창고에 갖다 놓는다. 하지만, 바이어 시찰이 끝났다고 다시 찾아갈 리는 없다. 현재 생산하는데 필요한 자재였다면 처박혀 있었을리 없고, 장기간 처박혀 있었다는 건 필요 없다는 뜻이다.


이런 일이 어째서 일상적으로 벌어질 수 있는지를 이해하려면, 직원들의 인식을 알아야 한다. 직원들은 창고 자재를 비정상적인 경로로 갖다 쓰는 걸 '도둑질'이라고 인식하지 않는다. 집에 가져가거나 팔아 먹는 게 아니라, 회사의 제품 생산을 위해 회사 자재를 쓴 것이니, 사소한(?) 규정을 위반했을 뿐 회사의 생산이 차질 없도록 하기 위해 한 행동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인식은 바꿔 말해, 회사의 현지인 생산 직원 누구든 창고 자재를 '비정상적인 경로'로 유용할 수 있는 잠재적 위험이 있다는 뜻이 된다. '도둑질'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니까. 그리고 도둑질이 아니기 때문에, 창고 관리 직원 역시 눈에 불을 켜고 지켜야 할 책임 의식이 약화된다. 우리 회사의 생산을 위해 같은 회사 직원이 자재를 급하게 쓰겠다니까. 창고를 다른 회사에게 맡기고 책임을 지우면, 그렇게 할 수 없다.

그래서 대부분의 회사는 창고 구역을 생산 구역과 물리적으로 완전히 분리한다. 하지만 물리적으로 분리해도 결국은 사람이 문제다. 사람이 빼서 넘기겠다면 물리적 분리도 소용없다. 직원 통제가 안되는 회사는 물리적 분리만으로는 문제 해결이 되지 않는다. 사람의 소속도 분리를 해야 할 필요성이 생긴다.

다른 회사에 비용 지불해가며 외주 관리를 맡기는 이유다.